항목 ID | GC02002117 |
---|---|
이칭/별칭 | 「보냇다리 설화」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종익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에서 보냇다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81년에 논산문화원에서 출간한 『놀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표진강은 양촌, 반야산 앞을 지나 논산·강경을 안고 돌아 금강과 합류하여 서해 바다로 들어간다. 예전에는 그 강을 가로질러 반야산 우측 마을 거북실에서 오약골 넉바위까지 380칸의 긴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 다리는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유일한 대로였다. 표진강은 현재 저수지 시설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그 다리는 지금도 돌다리 세 칸으로 남아 있다.
조선 숙종 때 이 다리는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과 연산면 경계에 있었는데, 다리 근처에는 주막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곳에서 미모가 뛰어난 청상과부 춘희가 주막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봄날 은진 고을에 부임한 총각 원이 춘희의 주막에 들렀는데, 그는 젊은 과부 춘희를 보고 한눈에 반하였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구나’라고 생각하며 눈을 떼지 못하였다.
총각 원은 춘희와 술잔을 나누었고,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아주 정다워졌다. 그리하여 총각 원은 이 고을로 부임한 첫날밤에 춘희와 정을 통하고 미래까지 약속하였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춘희를 찾아와 즐거운 나날을 보냈고,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 갔다. 그는 항상 “춘희! 한평생을 이렇게 헤어지지 말고 살자꾸나.”라고 말하였다.
세월이 흘러 총각 원은 승진하여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춘희, 걱정할 것 없소. 반드시 내가 이곳으로 찾아오리다.”라고 말하였다. 주막 근처의 다리 위에서 총각 원과 춘희는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였다. 춘희는 원이 찾아온다는 약속을 믿고 하루하루를 기다림으로 살았다. 그러나 날이 가고 해가 바뀌었지만 찾아온다던 총각 원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다리 위에서 한양 쪽을 바라보는 춘희의 눈에서는 그리움에 젖은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다림에 지친 춘희는 다리 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기다림에 지친 몸을 푸른 물속에 던져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춘희의 애달픈 사연을 알게 된 사람들은 시신을 건져 장사 지냈다. 그리고 주막 앞의 다리를 춘희가 임을 ‘보낸 다리’라 하여 보냇다리라고 이름 지었다. 또 훗사람이 춘희의 사연에 ‘천리길에 낭군을 보냈으나 끝내 소식이 없다(送君千里 終無消息)’라는 글을 지어 붙이고, 다리 이름을 송군교(送君橋)라 지었다고도 한다.
[모티프 분석]
「보냇다리」의 주요 모티프는 ‘신분이 다른 남녀 간의 사랑’과 ‘극복하지 못한 신분 갈등’이다. 춘희가 총각 원을 보낸 다리라 하여 보냇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지명유래담이자 남녀의 사랑을 다룬 연정담이다. 「보냇다리」는 신분이 다른 남녀 간의 사랑에서 비롯한 신분 갈등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 설화 가운데는 「보냇다리」와 같이 신분 갈등이 나타나는 예가 다수 전한다.
대개 신분 갈등은 남성이 상위의 신분을 보유한다. 따라서 두 사람의 연정은 남성이 주도하며, 약속을 파기하거나 여성을 버리는 쪽도 남성으로 설정된다. 그리고 남성에 의해 버림받은 여성이 자신의 사랑을 간직하기 위하여 죽음을 택한다고 하는 점도 우리나라 설화가 보여 주는 한 특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