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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569
한자 李思之
영어공식명칭 Lee Sa Ji
이칭/별칭 여은정(麗隱亭),여은동(麗隱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현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922년 - 이사지 용안서원에 배향되어 향사
묘소|단소 용안서원 -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내진1길 39-18[내진리 173]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벽진
대표 관직|경력 중랑장(中郞將)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내진리 용안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고려 후기 학자.

[가계]

이사지(李思之)[?~?]의 본관은 벽진(碧珍)이고, 호는 여은정(麗隱亭), 여은동(麗隱洞)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고려 대제학 이견간(李堅幹)[?~1330]이며, 할아버지는 형조참판 이군상(李君常)이고, 아버지는 도원수 이희경(李希慶)이다. 아들은 대호군 이중림(李仲林), 생원 이중행(李仲行), 이중권(李仲權)이다. 딸은 권효헌(權效憲), 만호 임경(任慶), 이문통(李文通)에게 출가하였다. 증손자가 처음 밀양에 들어와서 살게 된 이식(李軾)이다.

[활동 사항]

이사지는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올라 공양왕 때에 중랑장(中郞將)으로 재직하였고, 왜구의 침입을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관악산에 들어가 기우자(騎牛子) 이행, 도은(陶隱) 이숭인, 목은(牧隱) 이색 등과 뜻을 같이 하여 시문을 쓰고 읊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 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불렀으나 끝까지 사양하였다.

이사지는 고려말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중 한 명이다. 두문동은 마을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두문동 72현은 고려가 망할 때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개국 세력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충신열사(忠臣烈士)를 지칭하는 것이다. 조선을 개국한 세력과 단절함으로써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두문동은 기존의 지명이 아니라 고려의 절신이 은거(隱居)한 이후에 붙여진 명칭이다.

두문동 72현의 ‘72’는 공자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육례(六藝)에 통달한 자는 72인이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두문동은 조선 개국 후 지정된 것은 아니고 1751년(영조 27)에 고려 충신 72명에게 제사를 지내고 비를 세운 것에서 시작되었다.

[상훈과 추모]

밀양시 무안면 내진리에 있는 용안서원에서 1922년부터 이사지를 봉안하고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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