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360 |
---|---|
한자 | 歷史 |
영어음역 | yeoksa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백태남 |
[정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진주시의 역사.
[개설]
진주시는 경상남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도농 복합형 통합시로, 동쪽은 함안군,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고성군·사천시, 북쪽은 산청군·의령군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712.84㎢, 인구는 약 33만명이며, 1읍, 21동, 15개 면을 관할하고 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육도시이자 문화도시로, 현재는 첨단산업단지가 입지한 혁신도시로서 이름난 도시이다.
[고대]
남강유역을 따라 지수면 승내리와 대평면 내평리 석기산포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진주 인근 지역인 수곡면·금산면·금곡면·대평면에서 신석기 유물이, 유곡동(진주), 대평면 남강변의 대규모 주거지를 비롯한 곳곳에서 청동기세대의 유물과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유적으로 보아 진주지역에서는 적어도 BC 2000년경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한시대의 변진 고순시국(古淳是國)과 6가야의 하나인 고령가야(古寧加耶)를 진주에 비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삼국시대 후기에 와서는 백제 영역 안에서 거열성으로 불리어지다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685년(신문왕 5) 9주를 정비하면서 거열주를 청주(菁州)로 고치고 총관을 두었다. 그리고 757년(경덕왕 16) 전국의 지명을 고치면서 청주를 강주(康州)로 개칭하였다. 799년(소성왕 1) 강주를 다시 청주로 개칭했고 816년(헌덕왕 8) 시중 김헌창(金憲昌)이 청주도독이 되었다. 825년(헌덕왕 17) 청주를 다시 강주로 고치고 강주도독을 두었다.
[고려]
936년(태조 19) 후백제의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고려에 영속되었고, 940년 강주를 진주로 개칭하였다. 광종 때에는 진주향교가 창설되어 진주의 학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강민첨(姜民瞻)이 진주향교에서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진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 5월 12목을 13절도사로 개정되면서 진주정해군절도사(晋州定海軍節度使)로 개칭, 9월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는 가운데 산남도에 영속되었고, 영(營)이 설치된다. 1171년(명종 1)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협주도(晋陜州道)로 양분된 진협주도에 영속되었으며 1186년 통합된 경상주도에 영속되었다. 1200년(신종 3) 공사노비의 폭동에 편승한 정방의(鄭方義) 일당의 반란이 일어나 인근 지역을 휩쓸며 기세를 떨쳤으나 진주민들의 협력으로 난을 진압하였다.
1204년(신종 7) 경상주도가 경진안동도(慶晋安東道)로 개칭되었고 1298년(충렬왕 24) 경진안동도가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로 개칭되었다. 1314년(충숙왕 1) 경상진안도가 경상도로 개칭되었다.1379년(우왕 5) 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진주성을 수축하였으나 1380년과 그 이듬해에 왜구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조선 건국 후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이라 하여 진양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1402년(태종 2) 진주목으로 환원하였다. 1466년(세조 12) 지방조직으로 진주에 경상도우부 진주진관을 두었다. 1519년(중종 14)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진주목은 경상우도에 영속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 진주목의 호구수는 1628호, 5906인이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고려·조선 양조에 걸쳐 하공신(河拱辰)·강민첨·정을보(鄭乙輔)·하륜(河崙)·하연(河演)·강희안(姜希顔)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나라와 지역을 빛나게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김시민 이하 3,800여 장졸들이 3만의 왜군을 맞아 전군이 몰살당하나 결국 승리하는 전과를 올려 진주성대첩으로 기록되었다. 1593년 6월 왜군의 진주성 재침 시에는 의기 논개(論介)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임진왜란 후 1603년(선조 36)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을 창원에서 진주로 옮기고 절도사가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 1635년(인조 13) 종래의 4면 111리의 진주목 방리를 4면 62리로 통폐합하였다. 1832년(순조 32) 진주목읍지가 완성되었고 1862년(철종 13)에는 진주민란이 발생하였다. 삼정의 문란과 이곳 병사 백낙신(白樂莘)의 횡포로 농민들이 봉기한 진주민란의 파문은 각지로 퍼졌다.
[근대]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 실시하면서 진주부가 되었으며, 1896년 13도제 실시 때 경상남도 진주군으로 개편되면서 경상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상주하였다. 1909년 도내 유지들이 장지연(張志淵)을 주필로 맞이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인 『경남일보』를 창간하였다. 1910년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으며, 1925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진주의 역할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앞서 1923년에는 천민 해방을 위한 형평사(衡平社)가 진주에서 결성되어 그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이 해에 진주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1931년에는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39년 진주부로 되고 나머지 지역은 진양군으로 개칭되어 16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현대]
1949년 8월 15일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되었으며, 1969년 남강댐 준공으로 서부에 진양호가 생겼다. 한국전쟁 당시 진주의 상징인 촉석루를 비롯하여 시가지가 거의 폐허화되었으나 1960년 촉석루를 재건하고 도시계획을 시행하여 새로운 문화도시로 갱생하였다. 1973년에는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2001년에는 진주~대전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다. 1995년 1월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되어 도농 복합형 통합시가 되었다.
진주는 예로부터 예술의 도시이며 지방문화의 총본산으로써 유서 깊은 곳이다. 수려한 남강을 끼고 임진왜란의 흔적이 있는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 정신을 이어받은 문화가 산재해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