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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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Chronology of Jinyang, Root of the Jinju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덕현 |
[정의]
조선 중기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진주의 사찬(私撰) 지리지.
[개관]
지리지는 수록된 공간 범위에 따라 전국지인 여지(輿誌)와 지방지인 읍지(邑誌)로 나눌 수 있다. 또 지리지를 편찬한 주체에 따라 국가기관에서 만든 관찬(官撰) 지리지와 개인이 편찬한 사찬 지리지로 나누어진다. 전국 단위의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된 읍지는 전국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의 체제와 내용을 대체로 따르고 있으나, 전국 지리지가 다룰 수 없었던 지역적 내용을 보다 상세하기 기록하고, 또 지역적 관심 사항을 반영하고 있다. 『진양지』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진양속지(晋陽續誌)』와 『진주통지(晋州通誌)』 등의 이름으로 발간되었는데, 주로 인물편이 보완 증보되었다.
[편찬 및 증보과정]
『진양지』는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622년(광해군 14) 진주 사람인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이 주도하여 10년 후인 1632년(인조 10)에 완성하였다. 편찬에는 창주(滄洲) 하증(河撜), 능허(凌虛) 박민(朴敏)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한 채 편자의 문집에 포함되어 있다가 1730년(영조 6)에 비로소 다소 증보된 필사본으로 반포되었다. 『진양지』가 이루어진 지 거의 삼백년이 지난 1924년에 진주의 사마소(司馬所 : 지방 자체 협의기구)인 연계재(蓮桂齋)의 논의에 따라 비로소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2년에 목판본 『진양속지』 4권 2책이 발행되었는데, 이는 1927년 정광현(鄭光鉉)이 편저한 활자본 『진양지속수(晋陽誌續修)』 3책을 발행한 데 자극받아 『진양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연계재 향회(鄕會)의 공론에 따라서 발간하게 된 것이다. 이후 1964년에 하영기(河永箕)의 『진주통지』발간에 자극되어 다시 연계재 향회를 열어 속지 증보를 1967년에 발간하였다. 당시 10권 6책으로 발행되었는데, 이는 『진양지』를 원(元)·형(亨)으로 하고, 『진양속지』를 이(利)로, 『진양속지』 증보판 2권 1책을 정(貞)으로 추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증보판으로 『진양지』는 모두 10권 6책이 되었다. 이러한 ‘속지’가 계속 발간되어 진양지가 증보된 것은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읍지의 내용을 수정 증보해야 필요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속지’나 ‘속지 증보’의 그 구체적 계기가 된 것은 대체로‘속지 증보’의 주된 내용이 되는 인물조에 어떤 사람을 넣는가 하는 문제에서 촉발된 것이다. 수록할 인물을 선정함에 있어서 공론을 거치지 못하여 공정치 못한 속지가 나오게 된다고 판단되면, 지역의 논의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연계재 모임을 열어 지역의 뜻을 모으는 향의(鄕議)에 따라 새로운 편찬을 결의하게 되는 것이 사찬 읍지의 특성이다. 이에 관련된 내용이 『국역 진양지』 해제와 일러두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어쨌든 『진양지』는 19세기 초에 처음 편찬된 이후 20세기 후반에까지 ‘속지’와 ‘속지 증보’를 거쳐 보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읍지 증보를 보더라도 진주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향토의 기반을 중시하는 지역사회이며, 또 읍지가 지역민을 교화하는 데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수록 항목]
16~17세기에, 특히 경상도 지역에 많은 사찬 읍치가 편찬되었는데, 『진양지』는『함주지』·『영가지』 등과 더불어 이 시기에 지역 사림들이 주도하여 편찬된 대표적 사찬 읍지이다. 사찬 읍지를 발간하게 된 이유는 우선 이미 간행되어 전국적으로 유포된 전국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이 지나치게 인문적 내용에 치우쳤으며, 특히 전국지리지가 가진 한계로서 지방 기록이 너무 소략하기 때문에 각 지방이 스스로 지역 중심의 새로운 지리지에 대한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나아가 16~17세기 북쪽 국경에서의 여진 침입과 남쪽에서의 왜구 침입 같은 변경의 불안, 수령의 탐학과 부역의 불균형, 훈구세력의 지역 침탈과 같은 사회적 변동기에 대한 대응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방 재지 사림세력의 성장과 이들이 주도하는 향약의 보급과 같은 성리학적 향촌 질서의 확보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방의 재지 중소지주인 이들 사림 층은 그들이 주체가 되어 자기 지역의 풍속을 교화하고 성리학적 명분 질서로 바로잡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었다(양보경, 1987). 『진양지』를 비롯한 지방지의 이러한 편찬 취지는 수록 항목을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진양지』는 먼저 <제1권> 진주의 지리적 입지를 기술한 경사상거(京師相距)·사린강계(四隣疆界)에서 시작하여 역사적 입지에 해당하는 건치연혁(建置沿革), 그리고 속현·진관·관원·주명·형승·풍속 등의 항목을 기술하였다. 이는 모두 『동국여지승람』의 체제를 따른 것이다. 다음에 나타나는 각리(各里)와 호구전결(戶口田結)은 『동국여지승람』에는 없고 속현(屬縣)만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어 산천(山川)·임수(林藪)·토산(土産)·관우(官宇)·성곽(城郭)·단묘(壇廟) 등이 <제1권>에 게재되어 있다. 이 또한 『동국여지승람』의 체제와 기록 내용을 따르되 보다 자세하게 기술한 것이다. <제2권>은 학교(향교)·서원·서재·정대·군기·관방·봉수·제언·관개·교량·불우 등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항목의 대부분은 『동국여지승람』에 있는 것이지만, 제언·관개와 같은 경제 항목은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지 않는다. <제3권>과 <제4권>은 인물에 관한 항목이다. 진주목 역대 임관(任官) 성씨, 인물, 열녀, 문과·무과·사마시 급제자, 남행·유배·총묘 등이 인물 관련 항목이다. 인물 관련 항목은 『승람』에도 있지만 소략한데, 『진양지』는 지역적 관심을 반영하여 인물 기록이 대폭 보강하였기 때문에 전체 분량의 3분의 2 이상을 자치한다. 다음이 고적인데, 역시 『동국여지승람』의 예에 따라 매우 자세하다. 『진양지』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제4권> 마지막 부분의 관기총론(官基總論)·관가대로(官街大路)이다. 여기에서 진주 읍치의 풍수에 관한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진양속지』와 그 ‘증보’는 행정구역의 변경과 교통 이외에는 주로 인물에 관련되는 항목으로, 『진양지』를 증보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주요 내용]
(1) 지리적 위치 : 서울로부터의 거리, 사방 영역의 경계 등으로 기술되었다. 진주(목)는 서울까지 거리가 8백66리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데, 10리를 4㎞로 보면 333㎞에 해당한다. 진주에서 서울까지 3백여㎞라는 것은 조선시대 진주~서울의 주교통로가 팔령을 넘어 호남지방으로 통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입지를 서울로부터 거리로 기술하는 것이 중앙집권적 전통 관료사회인 조선시대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진주라 천릿길”이란 말도 서울을 나라의 중심으로 보고, 중심에서 매우 먼 곳이라는 상대적 입지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또 동서남북에 인접하는 군현으로 함안·진해(지금의 마산시 진동면)·사천·고성·단성·곤양·하동·의령·삼가 등, 그리고 전라도 광양이 있다. 이들 중 진해·단성·곤양·삼가 등은 1914년 부·군 폐합으로 면단위로 격하되었다. 지역의 성립과정을 기술하는 건치연혁도 유래를 밝힌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입지라 하겠다.
(2) 건치연혁 :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 2년에 취하여 주(州)를 두었고, 신문왕 4년에 거열주를 올려서 청주(菁州)로 하고 총관(摠管)을 두었으며, 경덕왕이 강주(康州)로 고치고, 혜공왕이 다시 청주로 하였다. 고려 태조는 또 강주라 고쳤다. 성종 2년에는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에 진주라 고쳐서 절도사를 설치하고, 정해군(定海郡)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이 안무사로 고쳤고, 뒤에 8목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이라 하여 진양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태종 때 다시 진주목으로 환원되었고, 세조 때 진(鎭)을 설치하였다. 이상의 『진양지』 건치연혁은 『신증동국여지승람』제30권의 내용과 같다.
『진양지』진주 건치연혁 가운데 다음 부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없는 내용으로, 추가한 부분이다.“선조 임진년에 경상도 우병영이 있던 합포영(合浦營)이 왜적에게 분탕되면서 형세가 험고한 진주 촉석성이 적지로 거론되어 마침내 선조 36년(1603)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계청에 의해 우병영이 진주성으로 이전되었다. 병마절도사가 목사를 겸하였는데 이때 병사가 이수일(李守一)이다.”
경상우병영을 진주에 두게 되면서 우병마절도사(무관 종2품)가 진주목의 목사(문관 정3품)를 겸임함으로써 조정에서는 진주목사를 따로 발령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우병사를 도와 진주 고을의 일을 전담할 판관(종5품의 벼슬)을 두기로 했다. 이에 따라 우병사 겸 진주목사로 이수일이 진주지역을 총괄하는 수령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진주에 군인이 와서 고을을 다스리게 되니 인재가 나오지 않고 풍습이 잘 교화되지 못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인조 13년(1635)에 병사가 목사를 겸하는 조치를 폐지하고 다시 목사를 파견해 우병영과 진주목의 업무를 분리했다.
『진양지』 건치연혁 가운데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인데” 구절이 거창의 “본래 신라 거열주, 일명 거타(居昌縣 本新羅 居烈郡 一名 居陀)”의 거열주와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고려사』지리지에 처음 나타나고 『세종실록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도 진주의 건치연혁으로 기록된 이 내용은 통일신라 신문왕 5년 진주와 거창이 분리되기 이전 같은 행정구역 안에 있던 시대의 기록이지만, 진주가 본래 백제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본래 백제의 영역이라는 내용이 없고, 거열주로부터 빼내어 청주(菁州) 곧 지금의 진주를 두어 구주제도를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의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인데”라는 구절은 삼국시대 말기 일시적으로 거열성(지금의 거창 지역)이 일시적으로 백제의 역역에 편입된 시기가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나, 당시 지리산 남쪽의 진주 지역에서는 전쟁 기록이 없다. 따라서 『진양지』의 “본래 백제 거열성” 구절은 잘못된 기록이라 하겠다.
(3) 형승 : 지형지세를 기술하는 형승조는 주위 산줄기와 하천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정의하고 있다. 형승조에서 산과 물을 통하여 입지를 정의하는 것은 유교적 연원의식과 풍수적 산천인식이 결합된 조선시대 자연지리적 입지 인식의 전형적 방식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선인들의 진주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여 진주의 형승을 “시내와 산의 경치가 영남제일이요, 큰 산과 큰 강이 있어 인물이 많고, 동방지육해(東方之陸海)라고 부를 만큼 수산(水産)과 토산(土産)으로 나라에 바치는 물산이 영남 여러 주의 절반이다.”고 표현하고, “비봉산은 북쪽에 멈춰 있고, 망진산은 남쪽에서 공손히 절한다. 이 두 산 사이에 긴 강이 흐르는데 동서의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러섰다”고 지형을 묘사하였다.
산천조에서는 진주읍 터전을 이루는 산줄기의 계통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덕유산의 한 맥이 동으로 달려 의령 자굴산이 되고, 자굴산이 서쪽으로 구부러져 집현산(集賢山)이 되었고, 진산 비봉산(飛鳳山)은 집현산이 남으로 내려온 것”이라 하였다. 즉 진주목의 진산은 비봉산인데, 비봉산-집현산-자굴산-덕유산까지 백두대간이 이어온 맥(脈)을 기술하고 있다. 또 진산 비봉산과 남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안산(案山)은 망진산(望晉山)인데, 배봉의 형국과 관련하여 망진산(網鎭山)으로도 불린다 하였다.
풍속조에서는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여“습속이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부유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여염(閭閻)이 태평하여 연화(煙火)가 서로 잇따랐다. 학문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농부와 잠부가 일에 부지런하고 아들과 손자가 효도에 힘을 다한다.”고 기술하였다.
(4) 지리산 : 『진양지』 산천조에는 지리산에 대한 기록이 매우 자세하여 지리산이 진주의 영역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지리산은 진주 서쪽 백 리 밖에 있는데, 산세가 높고 커서 수 천리에 걸쳐 자리하고 있다. 여진 경계에 있는 백두산으로부터 흘러내린 맥이 이룬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 일명 방장산(方丈山)으로도 부른다.”이상향으로 일컬어지던‘청학동’과 이상향의 조건을 유사하게 갖춘‘덕산동’과‘사륜동’에 관한 기술이 ‘지리산조’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인용할 만하다.
청학동(靑鶴洞)은 지리산 속에 있으니 주에서의 거리가 서쪽으로 147리 이다. 이인로(李仁老)[1152~1220]의 문집 『파한집(破閑集)』에 “지리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꽃과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과 같은 골짜기가 면면(綿綿)·연연(聯聯)하여 대방군(帶方郡)에 이르러서는 수 천리 서리고 맺히었으니 산을 둘러 있는 것이 십여 주(州)요, 순월(旬月 : 한 달)이 넘게 걸어야 그 주변을 다 볼 수 있다.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그 안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근근히 통할 만 하고 엎드려 수리(數里)쯤 지나가면 곧 허광(虛曠)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사우(四隅)가 모두 양전(良田) 옥토(沃土)이어서 곡식을 뿌려서 가꾸기에 알맞고 청학(靑鶴)이 그 가운데서 서식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인 것이니 아마도 옛날 둔세자(遁世者)가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형극(荊棘) 속에 남아 있다”라 하였다.
전일에 인로(仁老)[자신을 가리킴]가 최상국(崔相國) 모(某)로 더불어 옷을 털어버리고 같이 들어갈 뜻이 있어서 이 청학동을 찾기로 서로 약속한 바가 있었다. 장차 죽롱(竹籠)에 송아지 두서너 마리를 담아가지고 들어가면 세속과 서로 관계를 맺지 아니하여도 되리라 생각하고 화엄사(華嚴寺)에서부터 화개현(花開縣)에 이르러 신흥사(新興寺)에 유숙하니 지나는 곳마다 선경(仙境) 아닌 데가 없었다. 일천 개의 바위는 다투어 빼어났고 만개의 구렁은 다투어 흐르며 대나무 울타리와 띠로 엮은 지붕에는 복숭아꽃이 가려졌다가 비쳤다가 하니 자못 인간이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이런데도 이른바 청학동이란 곳은 끝내 찾지 못하였다. 내가 이어 암석에 시를 남겨 지팡이 끌어 잡고 청학동을 찾았지만 수풀을 사이에 두고 원숭이 울음만 들려오네 라고 하여 시로 읊기를, “누대(樓臺)는 아득하고 삼산(三山 : 三神山)도 멀다 하니, 태선(苔蘚 : 이끼)이 미망(薇茫 : 아득하게 먼 모습)타고 네 글자를 써보았네. 선원(仙原)이 어디냐고 시험 삼아 물어보니, 유수(流水)가 사람을 미혹케 하는구나.”라 하였다. 또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두류록(頭流錄)」에 이르기를, “이른바 불일암(佛日庵)이 곧 청학동이다. 바위가 공중에 매달린 것 같아서 아래로 구부려 볼 수가 없다. 동쪽으로 줄률(茁葎 : 가파르고 위태로운 바위의 모습)이 있어 탱돌(撑突 : 바쳐서 짜여 있음)하기를 서로 사양하지 아니한 것을 향로봉(香爐峰)이라 이르고, 서쪽으로 창애(蒼崖 : 이끼 낀 벼랑)가 있어 깎아지른 듯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선 것을 비로봉(毘盧峰)이라 이른다. 청학 두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어서 때때로 날아와 빙빙 돌다가 하늘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온다. 그 아래에 학연(鶴淵)이 있으니 물빛이 깊고 어두워 그 밑을 알 수 없고 좌우와 위아래로 절벽이 겹겹으로 둘러져 있다. 어떤 일 좋아하는 사람이 나무를 꺾어 다리를 만들어 겨우 들어가게 하였다. 앞면에 이끼가 낀 돌을 긁어서 찾아보면 삼선동(三仙洞)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그 연대는 알지 못한다.”라 하였다.
덕산동(德山洞)은 지리산의 동쪽에 있다. 천왕봉의 한 가지가 동남쪽으로 내려와서 오대산(五臺山)이 되고 노현(蘆峴)이 되어 동쪽으로 살천(薩川)의 앞에 가로놓였고, 또 한 가지가 동북쪽으로 내려와서 조흘산(組屹山)이 되고 운상산(雲象山)이 되었다. 이 운상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삼장(三壯)의 앞과 살천의 앞에 가로놓여 덕천(德川)의 좌우에 마주 보니, 이를 수양(首陽)과 금음(昑陰)이라 이른다. 또 조흘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와서 살천의 뒷산이 된 것을 구곡(九曲)이라 이르고, 삼장의 뒷산이 된 것을 저전(楮田)이라 이르는데, 앞뒤 모든 산이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것과 같이 기세가 웅장하여 크다. 천왕봉의 물이 법계사(法界寺)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살천촌(薩川村)을 거쳐서 사제봉(社祭峰) 아래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흘러 살천이 된다. 또 조흘산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唵)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이 되어 살천으로 더불어 양당촌(兩堂村) 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 이른다. 반회(盤回)하고 굴곡(屈曲)하면서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으며 수양과 검음의 두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덕천으로 나와 옮아가니, 이른바 두류만학문(頭流萬壑門)이라는 것이다. 동천(洞天)으로 넓게 열리고 산수가 밝고도 수려하여 팔 구리가 될 만큼 계곡이 계속되고 상하 일대에 숲이 모두다 도화와 철쭉이다. 농사짓기에 알맞고 고기잡이에도 알맞으며 누에치기나 나물 캐기에도 알맞으니, 이른바 은자(隱者)가 반선(盤旋 : 왔다 갔다 하는 것)하며 지낼 만한 곳이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유산록(遊山錄)」에 이르기를, “덕천(德川)을 따라 올라가다가 장천(長川)을 내려다보면 내의 양쪽 언덕에는 가을이 산에 끼여 있어서 비단으로 거울 속에 수를 놓고, 고기가 나무에 놀며 새가 냇물 속에 날고 있는 것과 같다. 수석(壽石)이 기이하고 웅장하여 벌써 사람의 눈을 기쁘게 한다. 그 동네로 들어가니 이름을 양당촌(兩堂村)이라 하는데, 집집마다 큰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감나무들이 아지랑이 속에 가려져 있어 집안이 아득하면서 모습이 막혀져서 의연하였다. 저 무릉(武陵)에서 주진(朱陳)이 이름다운 선비들과 더불어 터전을 삼지 못하고 다만 어리석은 촌백성과 더불어 살게 된 것을 한탄한 것과 같다고 할 만하다.”라 하였다.
사륜동(絲綸洞)은 양당촌(兩堂村)의 동쪽에 있다. 옛날에는 산맹(山氓 : 산에 사는 화전민)들이 살더니 가정(嘉靖) 경신년(명종 15년, 1560년)에 남명 조식 선생이 삼가(三嘉) 토동(兎洞)으로부터 가족을 데리고 옮겨와 살면서 산천재(山川齋)를 짓고 장수(藏修)하는 터전을 삼았다. 집 앞에 또 무량사(無樑舍) 한 칸을 얽고 풍영(諷詠)하는 곳으로 삼으니 곧 상정(像亭)[산천재를 말함]이다. 선생의 시에, “우연히 사륜동에 거주하더니, 조물주가 남긴 것을 오늘에야 알겠구나. 일부러 허튼 편지 보내어 숨겨두고 갔던 것을, 법도를 이루려고 일곱 번째 여기 왔네.” 또 "봄 산 어느 곳인들 아리따운 풀이 없겠는가마는, 옥황상제 사시는 곳 가까운 천왕봉을 좋아하네, 빈손으로 돌아와서 무엇을 먹겠는가. 은하(銀河)가 십리나 되니 먹고도 남으리니.” 또 상정 기둥에 절구(絶句) 한 수를 써서 이르기를, “천석이나 되는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어떻게든 두류산 본을 떠서, 하늘이 울더라도 따라 울지 않으리라,” 라 읊었다.
(5) 「각리」 : 각리는 읍치의 리, 즉 읍내 리와 동서남북 4개 면의 리를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속현으로 기술되었던 반성(班城)·영선(永善)·악양(岳陽)은 각각 동면·남면·서면의‘리’로 기술하고 있다. 또 부곡으로 기술되었던 화개(花開)와 살천(薩川)은 서면의 화개현(花開縣)리와 시천(矢川)리로 기술되어 있다. 「각리」에서는 위치와 토지의 비옥 혹은 척박한 정도뿐 아니라 주민의 계급적 구성과 풍속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상사리(上寺里)와 월아미리(月牙彌里)에서는 동약(洞約)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읍지를 편찬하는 주요한 목적이 향리를 유교적으로 교화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 「각리」에서 주목되는 것은 지금의 시내에 해당하는 진주 읍치에 위치한 ‘읍내리’들이 임진왜란의 피해로 인한 인구감소 때문에 통합되었고 거주민의 구성도 달라졌다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읍내의 14개 동리가 3개 리로 통합되었다. 대안(大安)·적지(赤旨)·장조(長祚)·민고(民古)·풍고(豊古)·옥봉(玉峰)·고경(古京)·궁남(宮南) 등 8개리가 대안리로 합치고, 중안(中安)·공북(拱北)·현경(玄京) 등 3개리가 중안리에 합치고, 진주성 내의 몽화(蒙化)·갈남(碣南) 3개 리가 성내리(城內里)로 합쳤다. 이들 읍내리는 “모두 진주 내에서 토지가 비옥하고 인물이 풍부하여 도내에서 제일의 위치에 있다. 옛날에는 사족(士族)이 많이 살아 높은 벼슬아치가 계속 나오더니 지금은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임란이 영향뿐 아니라, 조선시대 중기에 들어와 사족의 거주지가 읍내에서 월경지를 포함한 외곽 촌락으로 옮겨지는 일반적 추세와 관련된다 하겠다(이수건, 1989, 172~173쪽). 하동과 악양이 진주의 3개 속현의 하나로 월경지(越境地)였으며, 조선 초기까지는 화개(花開)는 살천(薩川)[지금의 시천]과 함께 부곡(部曲)으로 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6) 「임수」 : 임수(林藪)란 숲을 말하는데, 마을이나 도읍의 터전을 자연재해로부터 지켜주고 풍수 형국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비보(裨補) 숲이 많다. 『진양지』에는 읍치를 비보하는 숲으로, 진주 읍치 서쪽 5리에 가정수(柯亭藪), 읍의 서편 남강 상류인 청천(菁川)에 개량수(開梁藪), 읍의 동쪽 입구인 개경원(開慶院) 앞의 가방수(佳坊藪), 그리고 하류 쪽 남강 북쪽 강변에 대평수(大坪藪) 등을 기록하고 있다.
(7) 인물 : 읍지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점하는 내용이 인물에 관한 기사이다. 또 읍지를 편찬할 때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 또한 「인물조」이다. 「성씨조(姓氏條)」「하씨족보서(河氏族譜序)」에 진주의 이름은 원래 청주(菁州) 혹은 강주(康州)였는데, “고려 현종 때 이 고을 사람 장군 강민첨(姜民瞻)이 적을 도벌하여 난을 마무리 짓자, 큰 공의 상으로 진주목(晋州牧)으로 삼고 지금에까지 그 이름으로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또 “토성(土姓)은 삼한시대부터 나온 것이 넷인데, 하(河)·정(鄭)·소(蘇)·강(姜)이라 일렀고, 주(州)를 세운 뒤에 또 삼성(三姓)이 류(柳)·임(任)·강(康)이다. 그밖에 나머지 성이 여럿 있다.”
(8) 「관기총론」과 「관가대로」 : 「관기총론(官基總論)」에 “진주의 진산은 비봉(飛鳳)의 모습이고 안산을 금롱(金籠)으로 하고 있다. 관청의 터가 그 아래에 있고, 이 때문에 사방 배치에 모두‘봉(鳳)’이란 것으로 이름을 붙였다”라고 진주의 비봉 형국을 완성하기 위한 진압과 비보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진주목 읍치에 조성된 비보(裨補)는 지명비보, 사찰비보, 조산비보, 임수비보, 못비보 등이 있다. 지명비보란 비보 목적을 위하여 건축물이나 장소 이름으로 비보하는 경우로 진주의 형국이 ‘비봉’이기 때문에‘봉’이란 이름이 들어간 건물과 장소가 많다. 우선 진산인 비봉산(飛鳳山)이 있으며, 안산 망진산(望晉山)은 봉이 날아가지 못하는 그물을 의미하는 망진산(網鎭山)으로 불렀다. 또 까치를 보면 봉이 날지 못한다 하여 들의 이름을 작평(鵲坪)이라고 불렀다. 객사 앞 누각의 이름을 봉명루(鳳鳴樓)라 하여 봉이 우는 상서로운 일이 있도록 기원하고 그 동편 집을 조양각(朝陽閣)이라 하여 아침의 서기(瑞氣)를 맞도록 하였다. 지명비보를 겸하는 사찰비보로는 가까운 골짜기에 봉의 조롱(鳥籠)이 된다는 대롱사(大籠寺)와 소롱사(小籠寺)를 두었다. 비봉산에서 바라보이는 마을 이름을 죽동(竹洞)이라 하고 봉의 먹이가 된다는 대나무를 심었다.
진주 고을의 흥망에 관련이 깊다고 생각되었던 경계비보는 남강과 그 지류에 조성된 임수(林藪)였다. “옛날 흥성하던 시대에는 숲을 잘 기르고 벌목을 엄금하여 산천의 비호와 맑은 기운이 고을에 모였고, 인재가 무성하고 재상이 배출된 것이 어찌 신령한 산 기운의 효험이 아니겠는가. 이것들이 모두 도선(道詵)이 그 형세를 살펴 진압과 비보를 잘 배치한 것이다. 그의 말에 ‘숲이 없어지면 고을이 망하고, 누각이 높으면 고을이 망한다.’ 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는 임수가 고을의 번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잘 보호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금기가 해이해지고 숲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서 인물도 줄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관가대로(官街大路)」에 비봉 형국이 진주의 번영을 보장한다는 생각은 큰길을 만드는 데도 관련되어 있다. 봉황의 왼쪽 날개에 해당하는 말티고개[馬峴]로 큰길을 내었다. 그러나 말티고개는 비봉의 왼쪽 날개인데, 여기에 큰길을 내서 날개의 기운을 끊어 놓았으니 봉황이 힘차게 날지 못한다. 즉 서울에서 지관이 와서, 남쪽 강변을 통해 진주로 들어오던 길을 말티고개 중간 허리를 파서 곧바로 진주에 들어오도록 하면 인재가 전보다 배나 더 나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대로를 냈다. 조선 초에는 진주 고을 인재가 매우 성하여 삼공(三公) 육경(六卿)의 절반이 이 고을 사람이었고, 8한림(翰林)과 12낭(郞)이 일시에 함께 나왔으니 당시 영남 인재의 절반이 진주에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말티고개로 길을 낸 뒤로는 인재가 전만 못하다. 대개 말티고개는 진주 진산 비봉산의 왼쪽 날개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비봉의 왼쪽 날개를 길로써 끊어버렸으니, 떨치며 날아오를 수 없는 까닭에 인재가 나지 않는다 한다. 서울 지관의 말은 속임수였는데, 진주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