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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본래 이곳은 갓방 또는 관방·갑방·가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대여촌면과 기동(基洞)·가방동(加芳洞)·사곡동(沙谷洞)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방리라 하였다. 가방리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진주군 대여촌면의 속리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진주군 대여촌면과 기동(基洞)·가방동(加芳洞)·사곡동(沙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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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 앞에 있는 큰 숲이 아름답다고 하여 가정(佳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조선 전기에는 진주목 동면 오곡리 가정자(柯亭子)였다. 임진왜란 후 대곡리에 합해진 후 대곡면 가정촌(佳亭村)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정촌과 중촌(中村), 용동(龍洞) 각 일부를 통합하여 가정리라 하였다. 가정촌에는 서재골, 지식골, 매봉,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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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월 진주노동공제회 등 삼남지역 60여개 단체의 대표자들이 진주에 모여서 남조선노농동맹(南朝鮮勞農同盟)을 조직하기로 결정한 모임. 간친회(懇親會)란 일반적인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다정하고 친밀하게 사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간친회란 특정 모임을 지칭하는 것으로, 1920년대 활발히 전개된 노동·농민운동과 관련된 모임을 뜻한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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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 어귀에 검바위 또는 검암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본래 진주군 송곡면과 금동어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송곡동(松谷洞), 홍정동(鴻亭洞), 검암동(儉岩洞), 가토동(佳吐洞)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검암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엄정(嚴亭), 운문(雲門), 차현(車峴), 신담(新潭)의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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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대천리에 있는 수목원. 아름다운 꽃과 숲의 향기가 가득한 산림과 동식물에 대한 자연생태 종합학습교육장으로서 테마별 학습은 물론, 가족 단위의 건전한 휴식명소로 제공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약 22만 5천여 평(부지 1,003,640㎡)의 면적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자생종과 외국에서 도입한 수종(樹種) 중 보존가치가 있는 식물 3,100여 종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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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 전기 이래로 이천(耳川)[귀내]이라 하다가 1995년에 구천(龜川)이라 개칭하였다. 현지 주민들은 지금도 귀내 또는 구내라 한다. 진주목 시대에는 내진성면(內晋城面)에 속했으나, 1914년에 진성면으로 편입되었다. 도동(道洞), 구천(龜川) 2개 마을이 형성된 후 삭녕최씨(朔寧崔氏)가 입향하고, 다음 진양정씨가 입촌하였다. 문산읍과 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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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판문동(행정동)에 속하는 법정동. 경상남도 진주시 귀곡동(貴谷洞) 일대는 1970년 남강댐의 준공과 더불어 수몰된 지역이 많은 편이다.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지역에 해당하여 마을 이름과 지명 등에 얽힌 사연과 유적이 산재하는데, 1997년 발굴 조사된 ‘진주 귀곡동 귀동유적(晋州 貴谷洞 貴洞遺蹟)’이 대표적이다. 본래 경상남도 진주군 가귀곡면 지역으로 ‘귓골’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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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주목과 곤양군 경계에 있었던 포구. 조선 세종 19년(1438) 남해현(南海縣)을 설치하고 진주 김양부곡(金陽部曲)을 내속시켜서 곤양군(昆陽郡)을 형성하였다. 이때 김양포는 곤양군의 경계에 있었으며 어장이 있었다. 김양포를 ‘금양포’로 부르는 것은 한자어 김 또는 금을, 옮기는 이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어 이를 하나로 바로잡아 통상적으로 지명을 일컫는 ‘금’으로 표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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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우수리에 있었던 지명. 이 곳을 노루목(또는 노루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 산자락을 넘어가는 고개가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옛 문헌에는 ‘노루 장(獐)’자와 목 항(項)‘자를 써서 한자어로 장항(獐項)이라고 했다. 노루목은 우수리 우수마을회관에 가까워 우수리 노루목이라고도 부르지만 용산리 노루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옛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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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과거에 합격한 이 마을 선조가 깃발을 앞세우고 마걸둥천 연못가에 내리니, 저녁 노을 햇빛의 그림자가 연못물 위에 붉게 비치고 말은 물을 먹었다 한다. 이로 인하여 붉은 단(丹) 자와 먹일 목(牧) 자를 따서 단목(丹牧)이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전기에는 진주목 단지동(丹池洞)이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단목리라 하여 대곡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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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작성된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답천리의 호적대장. 민적부(民籍簿)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나라 국민의 이름을 한자로 바꾸어 기록해 놓은 호적대장을 말한다. 이 제도가 현재 우리나라 호적제도의 기본을 이루었으며, 광복 후 1960년 1월 1일에 호적법으로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에는 당시 답천동장이었던 하한주(河漢柱)가 작성한 진주시 일반성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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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를 예방, 경계하고 진압시키는 작용. 조선시대의 소방제도는 대체로 세종 무렵에 정비되었으나, 법제상으로는 세조 때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해 이미 확립되었다. 소방을 뜻하는 용어로는 금화·구화·멸화·비화(禁火·救火·滅火·備火)등이 사용되었는데, 금화는 화재의 예방·단속·소화등 포괄적인 뜻으로 사용되었고, 구화는 인명·재산의 구제, 멸화는 진화, 비화는 사전 예방을 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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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에 있는 자연마을. 운문은 지형이 구름 가운데로 학이 나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운문의 뜻을 따서 부르면 ‘구름문’이 되므로 통칭 발음상 줄여서 ‘굴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 살던 하씨 선대 하순(河淳)이 1414년(태종 14)에 생원에 오른 사실이 있고, 그의 며느리 박씨부인이 1470년(성종 1)에 별세하고 세운 비석이 현재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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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 전기 때 진주목 소속의 북면 월배곡리(月拜谷里)였다가 임진왜란 후에는 설매곡리(雪梅谷里)에 병합되고, 1864년(고종 1년) 리(里)가 면으로 개편되면서 다시 설매곡면 월배리로 되었다. 1914년에는 지방 행정 구역의 개편으로 월암리라 하여 미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2월 11일 대곡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덕촌(德村)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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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본래 진주군 사죽면의 느티골[楡谷]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한자어로 유곡리라 하여 대곡면에 편입시켰다. 1914년 지방 행정 구역 개편으로 대포동과 지석동, 대여촌면의 송곡 일부, 미천면의 정성동·호동 일부를 병합하여 대곡면 유곡리라 하였다. 느티골을 비롯하여 모시골[楮谷], 원촌(院村), 살구정[杏村洞], 샘땀, 안마을, 서재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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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의 법정리 유동의 ‘유(柳)’자와 수거촌의 ‘수(樹)’자를 따서 유수리(柳樹里)라 하였다. 한자 표기가 ‘柳樹里’ 와 ‘柳水里’로 혼용되고 있으나, 문헌 조사에 따르면 유수리(柳樹里)가 맞는 표현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주군 축곡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주군 축곡면 유동(杻谷面 柳洞)·수거촌(樹巨村)과 곤양군 가리면 가화동(加利面 加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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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에 속하는 법정리. 지형이 사람의 귀처럼 생겼다 하여 귀실(구실)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한자어인 이곡리로 명칭을 정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주군 문산면 삼동, 송곡면 정자동, 이곡면 어수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이곡리라 하였다. 이곡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 뫼 등이 이어져 있어 마치 귀안과 같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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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양지바른 골짜기에 매화나무가 많이 있는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고 해서 ‘자매실’ 또는 ‘자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자매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주군 대각면 자매동과 대우동, 산청군 파지면 덕동의 각 일부가 합하여 형성되었다. 자매(紫梅)와 월계(月桂) 두 마을이 남북으로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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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대여촌면 가방동(加芳洞)과 사동(沙洞), 금산면 중촌동(中村洞) 각 일부를 병합하여 사동의 이름을 따서 장사리라 하였다. 사동은 무제봉 통사바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형국이 흡사 가래삽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삽골’ 또는 ‘삿골’로 불리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하여 오는 이야기로는 이 곳 상의마을에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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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 인조대왕이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고성에 있는 심부원군을 만나러 장안산을 지날 때 산세가 수려하여 산중의 암자에서 국난을 타개하기 위한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그 후 동네의 명칭을 임금이 머물던 곳이라 하여 장안리라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진주군 이반성면 후촌동(後村洞), 반덕동(反德洞), 사령동(沙寧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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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과 동성동 일부에 형성된 장어구이 전문업소 거리. 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진주에서 널리 알려진 거리 중의 하나로, 진주의 별미인 장어구이집이 늘어서 있는 거리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진주 남강가 식도락의 맛자랑 가운데 장어구이를 손꼽는 이들이 많은데, 장어구이는 비린내가 없고 담백한 영양만점의 진주 전통음식이다. 또한 진주야경을 바라보며 먹는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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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주군 사죽면 장흥동, 신당동 각 일부를 통합하여 장흥리라 하고, 집현면에 편입하였다. 장흥마을은 사죽면 장흥동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으며, 월평(月坪)마을은 1947년 장흥리에서 분동되면서부터 월평이라 하였다. 장흥리는 장흥마을과 월평마을로 구성되며, 집현면 우체국의 소재지이다. 장흥마을 주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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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에 속하는 법정리. 진주군 모태곡면(毛台谷面) 검정동(儉亭洞)의 ‘정(亭)’자와 철수동(鐵水洞)의 ‘수(水)’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검정동은 동리 입구에 정자가 있어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주변 산에 숯을 구운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철수동은 쇠의 녹물이 흐른 흔적과 제철소가 있어 유래되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 구역의 통폐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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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진주군 송곡면(松谷面)의 정자동과 홍정동(鴻亭洞)을 중심으로 1914년 행정 구역이 통폐합될 때 정자동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진주군 송곡면 정자동·홍정동, 이곡면(耳谷面) 이곡동(耳谷洞), 성을산면(省乙山面) 하인담동(下仁潭洞), 금동어면(金冬於面) 검암동(儉岩洞)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형성되었다.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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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에 속하는 법정리. 진주군 모태곡면(毛台谷面) 정자동(亭子洞)과 평방동(坪芳洞) 일부를 통합하여 정평리라 하면서, 정자동의 정(亭)자와 평방동의 평(坪)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정자마을은 평방마을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백 년 된 정자나무가 집단으로 많이 있는 마을이다. 조선 이후 도룡골[道龍谷], 집수골[集水谷], 아랫골, 배량골, 창대골 등에 1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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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진주군 성을산면(省乙山面)의 죽곡동과 장지동(長芝洞), 성산동(省山洞) 일부를 통합하고, 죽곡동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죽곡리라 하였다. 죽곡은 대나무가 많아 붙인 명칭으로 대실이라고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죽곡에는 옛날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그 대밭에는 봉(鳳)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봉이 앉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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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본래 마을 앞 건너편에 큰 내가 있어 중천동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중천리라 하였다. 본래 진주군 금산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중천동과 개천동(介川洞), 말암동(末岩洞)의 각 일부가 통합하여 형성되었다. 구암(龜岩)은 면의 서쪽 끝 바위산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말암(末岩)이라 하였고,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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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진주군 집현면 지내동, 당하동(堂下洞), 신기동(新基洞), 달리동(達理洞) 일부로서 형성되었다. 현동(賢洞)마을 주변에 있는 당하촌(堂下村)은 300여 년 전에는 현재의 봉강과 합쳐서 현동이라 불렀다. 그 후 서편이라 개칭하였고, 다시 당하마을 뒤에 있는 큰 정자나무 아래에 안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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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진주 행정구역 명칭. 진주는 고려 초기 청주(菁州)라 하였다가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83년(성종 2) 2월 주제(州制)를 목(牧)으로 개혁하면서 진주는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성종 14년(995) 9월 처음으로 전국에 10도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산남도(山南道)가 설치되어 10주 37현을 통할했다. 현종 9년(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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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부터 정부수립 후인 1949년까지의 진주 행정구역 명칭.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그동안 시행해오던 8도제(道制)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로 구분하고, 그 아래에 336군(郡)을 설치하는 획기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부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군(郡)에는 군수(郡守)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지금의 도격인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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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일본인 회사의 부당이득 행위에 저항하여 벌인 진주시민들의 시위운동. 조선 말기의 개항 이후 일본인이 진주에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 가을 요시무라[吉村俊二]가 들어오면서부터이다. 특히 을사조약 이후 급격히 늘어나 일제강점 후인 1914년 당시 진주관내의 일본인 가구수는 627호, 인구는 2,328명이나 되었고, 1923년에는 평거동·내동·도동면의 일부 지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