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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본관은 진주. 호는 벽촌(僻村). 정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한 강재순의 4남 1녀 중 장남이다. 1882년(고종 19)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넉넉한 경제적인 여건을 배경으로 신학문을 접한 후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눈을 돌렸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진주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29명 중 한 사람으로 대구교도소에서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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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자산가이자 친일파. 본관은 진양. 1885년 출생하여 경상남도 진주군 가차례면 강주동에서 성장하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유년시절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보냈다. 1913년 당시 재산이 40만원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자산가였으며, 일제의 식민정책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협력한 친일인사이다. 학력에 관한 사항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관리로 진출한 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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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활동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교육가. 가난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사재로 야학을 설립하여 가난한 아동들을 교육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평생을 교육하다 60여세로 작고하였다. 권홍우(權烘宇)는 가난한 학생들이 돈이 없어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사재를 털어 1923년 제3야학교를 설립하였다. 권홍우는 야학을 통해 문맹률을 타파하는 것은 물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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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의 친일파. 1887년 8월 5일 경상남도 진주군 내동면 독산리에서 태어나 대부호인 정부인 김씨의 손자로 입양, 성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380만원에 달하는 자산을 소유한 대지주로서 서울 이부자[李鳳來], 경주 최부자[崔浚]와 더불어 진주 김부자[김기태]로 일컬어지는 남한의 3대 갑부 중 한사람이었다. 진양군 문산면 삼곡리에서 사업을 하다가 지병 악화로 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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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순절한 의기(義妓). 본관은 신안(新安). 아버지는 주달문이고, 어머니는 허씨이다.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다. 1593년(선조 26)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6월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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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수원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2「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백홍제는 성품이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나이가 아직 어려 어머니와 함께 산속에 피신해 있었는데 갑자기 적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 배에 태워져 바다를 건너려 할 때, 기지를 발휘하여 적이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칼을 훔쳐내어 배 가운데 있는 적을 모두 죽이고 같이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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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기녀. 기녀 산홍은 진주 교방 소속의 기녀이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사람인 이지용(李址鎔)이 1906년(광무 10)에 진주에 왔다. 진주에 온 이지용이 산홍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내놓고 첩이 되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산홍이 큰소리로 “세상사람 역적의 첩이 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지용이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고도 하고 죽였다고도 하는데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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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1893년 진주에서 태어나 망경동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신영균, 어머니는 여산송씨이다. 사회운동으로 평생을 보냈으며, 1961년 68세로 사망하였다. 1911년 진주제1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일본에 있는 중학교를 수료하였다. 1920년 전후 토지조사국에서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으로 옮겼으며, 이후 다양한 조직에서 사회운동을 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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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진주지역 문화운동과 교육운동을 주도한 교육자이자 시인. 1905년 11월 11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하였으나 1926년 중퇴하였다. 이어 교호쿠[京北]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졸업한 후 귀국하였다. 1946년 진주지역 문인들과 동인지 『등불』 발간을 주도하는 한편, 교육계에 종사하다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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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오광대 대본 소장자. 진주오광대의 대본은 정인섭본, 송석하본, 최상수본, 리명길본 등이 있다. 리명길본은 1930년대 진주오광대를 놀던 연희자 몇 명이 60년대에 직접 채록한 것이다. 리명길씨가 1960년에 신길용의 친구인 정수영에게 세배를 하러 가는 길에 진주오광대 대본 채록을 부탁했는데, 신길용이 1961년부터 2년간 자필로 쓴 대본을 1965년에 받았다고 한다. 그것을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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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백정의 신분해방을 주도한 사회운동가. 백정들은 일반인과 격리된 관계로 사실상 공교육을 받을 기회조차도 없었다. 다만 재산을 상당히 축적한 부호로서 사숙·의숙에서 수학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전문(傳聞)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도수업·수육판매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부호로서 잘 알려져 있다.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 중 하나로, 이학찬의 자제의 공립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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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언론인·애국계몽운동가.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지윤(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경상북도 상주 출신. 장용상(張龍相)의 아들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1864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상주군 내동면 동곽리에서 태어났다. 장지연은 일찍이 장석봉(張錫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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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1882년 경상남도 의령의 백정 집안에서 태어나서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에 평생을 보냈다. 해방 후에는 우유업에 종사하다가 1970년대 중반 사망하였다. 백정 신분 때문에 정식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독학으로 글을 익히며 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20살을 전후해 진주에 살던 일본인 지주 겐지로의 도움으로 일본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였다. 법학을 전공한 장지필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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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서 활동했던 소목장(小木匠). 정돈산은 1939년 7월 13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하였다. 1952년, 열세 살 되던 해 진주에 있는 박우희 농방에 들어가 소목장 일을 시작하였고, 그 뒤 여러 가구점을 거쳐 1972년에는 김동진 가구점에서 고가구를 배웠다. 1979년부터 공방을 자영하였으며, 전국민예품경진대회 및 공모전에서 많은 수상을 하면서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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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자산가이자 친일파. 본관은 연일. 초명은 우용, 자는 상진. 1878년 출생하여 경상남도 진주군 봉정동에서 성장하였다. 1880년대 후반부터 상업에 종사하여 3천석에 달하는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주로 수산물·미곡·소금 등을 거래하여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빈민구휼과 육영사업을 지원하는 등 주민들로부터 중망을 받았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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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지주·금융가이자 친일파. 경상남도 진주군 중안동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1909년 중안3동에서 전당포를 경영하는 부호이자 금융업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빈민구휼과 육영사업을 지원하는 등 주민들로부터 중망을 받았다. 본격적인 사회활동은 1920년을 전후로 이루어졌다. 1920년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 발기인과 경남도청 이전방지 동맹회 상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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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강상호(姜相鎬)의 후배로서 종이 가게를 경영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1923년 형평사 창립 전에 진주금주단연회·진주저축계·보천교소년회 등에 참여했으며, 형평사 창립에 적극 관여하였다. 1923년 4월 25일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인 강상호와 함께 이학찬(李學贊)·장지필(張志弼) 등 경제력을 가진 백정들과 같이 진주에서 형평사를 창립하였다. 이후 형평사의 중앙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