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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경상남도 진주시 의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가야유물 반환운동. 1910년 일본의 조선 침략과 함께 가야시대의 많은 유물들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는데, 이들 유물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근거자료로 이용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시는 상고시대 가야문화권의 한 지역으로, 1994년 경상남도 진주시 의회를 중심으로 이들 유물에 대한 반환을 촉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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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청 이전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진주 시민들의 반대운동. 경상남도청 이전 반대운동은 크게 두 번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진주에 있던 경상남도청을 부산으로 이전하는 데에 따른 반대운동이었고, 두 번째는 부산에 있던 경상남도청을 진주로 이전하지 않고 창원으로 이전하는 데에 따른 반대운동이었다. 진주는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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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 11월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년남자의 상투를 자르게 한 명령.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국제적 범죄를 자행한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고조되고 있을 때 일본의 지원으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이 11월 15일 고종의 조칙으로 단발령을 실시한다고 선포하였다. 당시 내세운 단발의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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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장사리 덕의마을에 있었던 무장간첩 침투사건. 1966년 5월 17일 새벽 2시 15분경 당시 진양군 금산면 장사리 덕의마을에 재일교포를 가장한 정상규가 유경태·김동기를 대동하고 민심교란을 목적으로 침투해왔다. 진주경찰서에서는 경사 유병두, 순경 최용섭·안봉근·김상용·이형·최부성 등 6명으로 구성된 특공대를 투입하여 생포하고자 하였으나 상호간 총격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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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운동. 동학운동 당시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대규모 격전이 있었던 곳은 진주 고승당산(高僧堂山)이었다. 고승당산은 해발 185m로, 일명 고시랑산 또는 고성산(高城山)이라 한다. 고승당산은 지표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동남쪽 들판은 덕천강을 경계로 하여 진주시 수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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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일대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사건. 1950년 7월을 전후하여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일대에서는 육군 특무대 부대원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민간인 학살의 발단 경위와 경과 등에 대해서는 정확한 조사가 미흡하여,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몇몇 증언들에 의해 사건의 참상이 드러났다. 이를 통해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소재 지역별 보도연맹원들을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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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에서 일어났던 미군 전투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한국전쟁 당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사망도 많았다. 이 중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군이 아닌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도 미군 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제기되고 있다.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 기총소사사건은 당시 현장 목격자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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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반성면 일대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대량 학살사건. 한국전쟁 중에 전국적으로 각 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공산주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 많이 발생하였으며, 진주지역에서도 민간인들이 학살된 사건이 여러 발생하였으며 그 중 하나가 반성면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계속 남쪽으로 남하하자 그들에게 합세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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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내에 침입한 빨치산 유격대원들에 의한 진주군청 습격·방화사건. 1949년 9월 지리산 유격대가 진양군 수곡면 사곡마을을 습격하여 지서와 연결되어 있던 참호 방어업무를 하던 마을 주민 5명을 살해하였다. 또 진주시 판문북동 농민위원회 위원장 최팔십(崔八十)은 9월 초순경 진주시 남로당의 지시에 의하여 지리산 유격대원에 보급할 의류 20점, 신발 20컬레를 갹출하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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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지도로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으로, 1919년 5월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전개되었다. 연 집회횟수 1542회, 집회 참여인원 200여 만명을 기록하며 평화적 시위를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명, 피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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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 일어났던 소작 농민운동. 소작노동자대회는 1922년 9월 4일에 발생한 전국 최초의 소작 농민운동으로서 조선 농민운동단체 조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3·1 운동 이후에는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자본주의 발전 속에서 배출되고 있던 노동자층의 민족적·계급적 자각이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동시에 새로 생긴 교육기관들이 사회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인적자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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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에서 일어났던 미군폭격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한국전쟁 당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사망도 많았다. 이 중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군이 아닌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도 미군 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제기되고 있다.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에서 미군기에 의한 양민학살이 이루어 졌다는 정황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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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일본인 해적집단인 왜구가 남해안에 출몰하여 인명 살상과 재물을 약탈한 사건. 고려 말에 이르러 진주가 위치하였던 남해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왜구의 출몰이었다. 기록에는 고려시대를 통하여 약 500회의 왜구 침략이 있었고, 진주의 인근 해역에만도 31회나 침입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진주에서는 이와 같은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379년(우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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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청년형평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일제가 전라남도 광주형평청년회를 비롯한 청년회원들을 공산주의운동가로 조작한 사건. 일제는 형평운동 확산과 사회단체와 연대를 적극적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혁신파가 주도권을 장악한 이래 형평사는 고려혁명당사건과 같은 민족해방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녔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동시에 형평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책은 이 사건으로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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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회운동단체인 형평사의 운동노선 전환의 계기가 된 회의. 1923년 4월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는 창립 10개월만에 12개 지사와 67개 분사가 설립되는 등 일제강점기 사회운동단체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강상호·신현수·하석금 등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과 전라·충청·경기·강원도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장지필·조귀용·오성환 등이 운동노선과 주도권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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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신종 3)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발생했던 사건. 1200년에 진주의 아전 정방의가 그의 동생 정창대와 함께 폭동을 일으켜 사람들을 마구 죽이자, 진주 사람들이 의거(義擧)하여 정방의를 죽이고 난을 1년 만에 평정한 사건이다. 고려 중기인 12~13세기에 일어난 무신의 난 이후, 민란이 집중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원인은 귀족 사회의 상층구조가 붕괴되고 중앙 집권력이 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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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일대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사건. 한국전쟁 중에 전국적으로 각 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공산주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 많이 발생하였다. 진주지역에서도 민간인들이 학살된 사건이 여러 발생하였으며, 그 중 하나가 정촌면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계속 남쪽으로 밀려오자 그들에게 합세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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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진주에서 진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제1차 전투.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에 침입한 이래 조선 전 지역에서는 관군의 유명무실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성까지 함락되었다. 그러나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면서 왜군과의 전투에서 차츰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조선과 일본의 전쟁과정에서 특히 진주에서 벌어진 제1차 진주성전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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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시 진주성을 중심으로 1592년에 싸운 이래 두 번째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전투. 1592년 10월에 조선군과 왜군이 제1차로 전투를 벌인 결과 조선군이 왜군을 대패시킨 이래 왜군은 이를 만회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제2차 진주성전투로도 알려진 이 싸움에서 제1차 진주성전투와는 정반대로 조선군은 왜군에 대패하였다.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이래 1년 동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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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경상남도 진주시 주약동에서 일어났던 미군 전투기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한국전쟁 당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사망도 많았다. 이 중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군이 아닌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도 미군 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제기되고 있다. 진주지역에서도 1950년 8월 3일(음력 6월 20일)에 진주시 주약동 약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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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공립농업학교와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 전원이 동맹하여 휴학한 사건. 일제강점기에 자질을 갖추지 못한 일본인 교사의 한국민족에 대한 민족차별 및 모욕적 언동에 의한 멸시에 항의하여 1927년 6월에 진주공립농업학교 2·3 학년생 중심으로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학교당국은 주모자 6명을 퇴학, 6명을 정학시켰다. 이에 대하여 학부형과 졸업생이 조정책을 강구하여 퇴학생을 무기정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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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경상남도 진주시 봉래동 소재의 진주교회에서 일어났던 신분차별 철폐와 관련된 사건. 진주지역을 포함한 경상남도 지역에서의 기독교 시원은 직접적으로 호주장로교 선교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02년 커렐(Dr. H. Currell) 의사 부부는 의료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한 경상남도지방에서 의료활동의 시급성을 느끼고 진주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커렐 의사 부부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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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 13년(1862) 2월 14일 경상도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봉건 농민항쟁. 진주의 농민항쟁은 그동안 누적된 삼정문란과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하여 유계춘(柳繼春)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이었다. 엄격한 신분제와 자급자족적 경제체제에 바탕을 둔 지주(地主)·전호제(佃戶制)가 근간을 이루고 있던 조선왕조의 봉건적 사회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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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철종 13)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 1862년에 경상도우수사 백낙신(白樂莘)의 불법탐학에 반발하여 진주 출신 유계춘(柳繼春) 등이 일으킨 민란으로, 자진 해산하기까지 4일간 진주 일대를 휩쓸며 부정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였다. 이후 중앙조정에서 보낸 진주안핵사에 의하여 민란은 수습되었으나, 같은 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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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진주시의 비밀결사 단체가 체포된 사건 1932년 7월 박원효, 박수명, 강두석, 강병도 등이 적색노조 건설을 모색하고 학생층에게 의식화 작업을 진행하다 단체의 몇몇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다.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억압정책 및 민족말살정책이 실시되면서 모든 결사, 집회의 자유마저도 없어지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운동 세력은 지하운동으로 전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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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일본인 회사의 부당이득 행위에 저항하여 벌인 진주시민들의 시위운동. 조선 말기의 개항 이후 일본인이 진주에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 가을 요시무라[吉村俊二]가 들어오면서부터이다. 특히 을사조약 이후 급격히 늘어나 일제강점 후인 1914년 당시 진주관내의 일본인 가구수는 627호, 인구는 2,328명이나 되었고, 1923년에는 평거동·내동·도동면의 일부 지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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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의열단(義烈團) 최초로 국내에서 폭탄의거를 계획했다가 발각된 사건. 1919년 중국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일본인 고관 및 한국인 민족반역자 처단과 식민통치의 주요기관 및 시설물 폭파를 목표로 삼았다. 즉 의열투쟁의 목적은 일반 대중의 각성과 아울러 대대적인 반일봉기를 촉발시킴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 종식과 친일배를 응징함에 있었다. 맹목적인 테레리즘이 아니라 식민지 약소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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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병자년 8월 26일에서 8월 28일 사이에 진주 지역에 발생하였던 대홍수. 1936년 8월 26일부터 내린 호우는 27일 저녁 무렵부터 북동풍이 점점 강하게 불어 태풍 내습의 경보가 발령되었다. 오후 7시반경에는 전등이 꺼지고 곧 전신 전화도 불통이 되었다. 오후 8시 이후에는 상점가도 문을 닫았다. 밤 11시경에는 풍속이 40㎧ 정도의 폭풍우로 변하여 건물의 지붕,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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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4월 24일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衡平社)의 활동을 총칭하는 말.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의 주목적은 조선시대에 가장 차별받던 천민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이었다. 일차적인 목적이 ‘백정’이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 존중, 평등 대우를 주창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평등’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