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C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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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삼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호 |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鎮川 死居龍仁)’이란 말이 있다.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라는 말인데, 그만큼 진천군은 예부터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진천 지역에서도 특히 진천읍 삼덕리는 진천군 쌀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 마을이다. 우리는 삼덕리에서 오랫동안 살고 계시는 이상일 할아버지와 지숙현 할머니에게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유래를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두 분이 들려 준 이야기는 문헌에 나와 있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효심이 지극한 두 형제]
이상일 할아버지는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 생겨났다고 전했다. 옛날에 효심이 지극한 두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은 경기도의 용인에서 살고, 동생은 진천에 살았는데, 둘 다 효성이 지극해서 서로 어머니를 모시려고 다투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먹을 것도 많고 살기도 좋은 진천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어머니가 진천의 작은아들 집에서 도통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자, 참다 못 한 큰아들이 진천 원님을 찾아가 자기가 어머니를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송사를 냈다. 그러자 원님은 두 형제의 뜻을 갸륵하게 여기며, “부모를 모시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살아생전 모시는 것과 죽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있다. 따라서 살아서는 진천의 아우가 정성을 다하여 모시고, 돌아가시거든 묘를 용인에 두고 형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허 생원의 딸 이야기]
『내고장 전통 가꾸기』에는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아주 옛날 진천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충청북도 진천에 사는 허 생원의 딸이 용인으로 시집을 갔다. 그런데 얼마 후 시부모가 밤잠을 못 자고 무엇인가 소곤거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새아기가 들어왔는데 식량이 부족해서 어떻게 사나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허씨 부인은 낙담하지 않고,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부지런히 일하면 먹을 것이 생기겠지.” 하고는, 남편과 같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새색시가 남자들이 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해치우는 것을 보고 동리 사람들은 입이 벌어졌다.
그 후 부부 금실도 좋아지고 살림도 차차 늘어서 이제는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었다. 그 와중에 허씨 부인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도 낳았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길러 가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남편이 우연히 병이 들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허씨 부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땅이 꺼지는 듯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시부모마저 죽고 말았다.
의지할 데가 없어진 허씨 부인은 날마다 눈물로 지새우다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하루는 친정인 진천으로 다니러 갔다. 험난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고갯마루에 도착할 무렵 저만치 한 선비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 선비는 진천에 사는 유생으로서,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유생이 고갯마루에 앉아 잠시 쉬고 있노라니, 저만치 앞에 소복단장을 한 어여쁜 부인이 고갯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에라, 아무도 없는 산속이니 저 부인이 고개를 올라오면 쉬어 가라고 붙들고 얘기나 해 봐야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에헴!” 하는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건너편 소나무 밑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유생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허겁지겁 일어나 한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였다.
유생이 서서히 허씨 부인 앞을 지나쳐 가려는데, 어찌나 예쁜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잔꾀를 내어, “부인, 사람 좀 살려 주십시오. 눈에 티끌이 들어가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엄살을 떨며 허씨 부인 앞을 가로 막았다.
허씨 부인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선비의 눈을 비집고 입으로 훅 불어 주었다. 그랬더니 다시 한 번만 더 불어 달라고 애원하기에 수줍어하면서 재차 혹혹 불어 주었다. 선비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부인께서는 어디서,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자기는 진천에 사는 유생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한 뒤 서로 헤어졌다.
그날따라 혼자 된 딸 소식이 궁금했던 허 생원은 진천을 떠나 용인으로 가는 도중 산마루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소복단장을 한 여자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들고 입을 쪽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그러니, 참으로 해괴망측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산마루의 소나무 밑에 앉아 있던 허 생원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것은 아무리 봐도 혼자 된 자신의 딸이 틀림없었다. 허 생원은 놀라서 딸의 눈에 띄지 않게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왔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허씨 부인이 마침내 친정에 도착했다. 그런데 친정아버지의 노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출가외인이거늘, 네가 어찌 내 집에 발을 들여놓느냐? 당장 나가거라.” 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결국 허씨 부인은 겨우 하룻밤을 머물고 쫓겨 나오는 신세가 되었다. 발자국마다 방울방울 눈물이 흘러 괴었다. 한편, 평소에 글공부를 게을리 했던 유생 역시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집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허씨 부인을 만났던 고갯길이 보이자, 낙방한 것도 잠시 잊고 선녀처럼 아름답던 허씨 부인 생각에 싱글벙글 웃으며 고갯길을 올라섰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고갯마루 위에서 허씨 부인이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었다. 유생은 깜짝 놀라면서도 기쁜 마음을 숨기고 허씨 부인에게 위로의 말을 거듭하였다.
허씨 부인은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심정을 달래 주는 분은 이 유생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유생에게 끌렸다. 결국 앞일을 곰곰이 생각해 본 허씨 부인은 진천 유생에게 재가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아들은 시댁 삼촌에게 맡기고 진천으로 다시 시집을 갔다.
그 후 부지런하고 의지가 굳세었던 허씨 부인은 유생과 힘을 합쳐 열심히 일을 했다. 그리하여 살림도 펴고 또 아들을 하나 낳아서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눈 위에 콩알만 한 사마귀가 붙은 용인 아들이 눈앞에 아롱거려 기쁜 일이 있어도 기쁜 줄을 모르고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이 한숨을 짓곤 하였다. 때로는 상산에 올라 북쪽을 향하여 기도하고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환갑이 가까워 오던 어느 해 남편이 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용인 사는 큰아들은 장성하여 재산도 모으고 결혼도 한 뒤였다. 그러면서 늘 ‘나도 한 번 남과 같이 어머니 모시고 환갑잔치도 해 봤으면 좋겠구나.’ 하곤 어머니를 그리워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해 “내 기어코 어머니를 찾아서 뫼시고 살리라” 하고 결심한 뒤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어머니가 계신 곳을 알게 된 큰아들은, 어머니도 뵙고 이복동생도 처음 만나는 자리라 빈 몸을 가기도 뭐해서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어머니를 찾았다.
어느 날 진천 사는 어머니는 갑자기 밖에서 누가 “이리 오너라!”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하고 문틈으로 내다보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왼쪽 눈썹 위에 콩알만 한 사마귀가 붙은 남정네가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문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용인 사는 아들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새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온 남정네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어머니, 제가 용남이올시다. 절 받으십시오.” 하고 공손히 절부터 했다. 허씨 부인은 잠시 말을 잊고 물끄러미 쳐다보다 그만 큰아들을 부둥켜안았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아들은 한없이 울기만 했다. 기쁨과 슬픔으로 뒤엉킨 눈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를 찾은 큰아들은 평소의 소원을 말하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이 모시고 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진천의 작은아들 역시 어머니를 모시겠다며 한 치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허씨 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 아들의 효심에 그저 흐뭇해만 하였다.
혼자 용인 집으로 돌아온 큰아들은,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을까 여러 날 궁리를 하였다. 그러나 이렇다 할 좋은 방안이 생기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관가에 소장을 냈다.
소장을 받은 고을 원님은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좋을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하고 있는데, 평소 영특해서 귀여워하는 손자가 쪼르르 달려와 “할아버지 무슨 근심을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원님 할아버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슬그머니 손자에게 귀띔을 하며, 네 의견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손자가, “할아버지, 무얼 그런 걸 가지고 걱정이세요. 생거진천 사거용인인데.” 하는 것이었다.
원님 할아버지는 무릎을 탁 쳤다. 그리하여 용인 아들과 진천 아들을 불러 놓고는, “너희들이 어머니를 모시려는 지극한 효심은 귀감이 되도다. 맏아들은 용인에 있고 작은아들은 진천에 있으니, 어머니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진천에서 살도록 하고, 죽은 뒤에는 용인에 모시도록 하여라.” 하고 판결을 내렸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하여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뒤에는 용인으로 간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에 덧대어 또 한 가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긴 하다. 진천 지역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며, 한재나 수재가 별로 없어서 농사짓기가 편리하고 순조로워 인심이 좋았다. 그리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라 하여 ‘생거진천’이라 하였다. 그러나 용인 지역은 산과 물의 경치가 눈부시게 좋으며, 산세가 순후하여 가문과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산소가 많기에 ‘사거용인’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만큼 ‘생거진천 사거용인’에 대한 다양하고 풍요로운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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