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5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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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儀禮服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진명숙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주민들이 의례를 거행할 때 입는 옷.
[개설]
의례복은 특별한 날, 예를 들면 관혼상제(冠婚喪祭)나 출생 및 돌 등에 입는 옷을 말한다. 조선 시대까지 의례복을 입는 것은 궁중과 양반층에 매우 중요한 풍습의 하나였으며 의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개화기를 거치며 생활이 근대화되고 서구화되면서 전통적인 의례복 문화는 많은 변화를 겪었고 간소화되었다. 또한 기독교 등의 영향으로 의례복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진안군에서의 의례복도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의례복 변화의 추이를 따르고 있다.
[관례복]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었음을 알리는 관례는 관혼상제의 첫 번째 의식이다. 조선 시대 때 남자 아이는 15세와 20세 사이에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리고 복건, 초립, 사모, 탕건을 씌워 주는 의식이었다. 관례는 원래 양반 계층을 중심으로 시행되었으며, 천민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천민들이 혼인을 하고도 탕건, 망건, 갓을 쓰지 못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15세가 넘으면 길일을 택해서 일가친척과 하객을 초청하여 일정한 절차와 의식을 올렸다. 남자는 상투, 망건, 초립, 도포를 입었다. 여자는 머리에 쪽을 지고 그 위에 족두리를 얹고 용잠을 꽂았다. 관례는 전해 오는 동안 지역과 가문에 따라 조금씩 변모되었다.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개화사상이 퍼지면서 그 의미가 줄어들다가, 1895년(고종 32) 단발령을 계기로 관례 의식이 사라졌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전통 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고, 전통 성년식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깨우쳐 줄 목적으로 1999년부터 표준 성년식 모델을 개발하였다. 여기에서는 전통 관례 복장을 갖추고 의식을 주관하는 어른인 ‘큰 손님’을 모셔놓고 상견례(相見禮), 삼가례(三加禮), 초례(醮禮)를 거쳐 성년 선언으로 이어지는 의식을 한다. 1973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인 대통령령 제6615호’에 따라 4월 20일을 성년의 날로 정했으나 1975년에는 5월 6일로 변경하였다. 그 뒤 1985년부터 5월 셋째 월요일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국가에서 행하는 공식적인 의식을 제외하고는 가정에서 특별한 의례 없이 성년이 된 자녀에게 축하 인사나 선물을 하는 정도이다. 오히려 친구들끼리 성년식 행사를 갖는데, 장미 스무 송이를 선물하거나 평소 갖고 싶었던 물건들을 선물로 주고받는다. 최근에는 디지털 카메라, 향수, 속옷 같은 것이 인기 선물 품목으로 꼽힌다.
[혼례복]
혼례는 관혼상제 의례 중 가장 경사스러운 날로 왕, 양반, 평민 구분 없이 최고의 호사 치레를 할 수 있는 때였다. 그 만큼 혼례복은 남녀에게 있어 가장 호화로운 옷이라 할 수 있다. 신랑은 자색이나 남색 관복에 각띠를 띠고 흉배를 달았는데 이 흉배는 당상관과 같은 쌍학의 흉배를 달았다. 그 속에 청색의 도포를 입었다. 띠는 1품과 같은 서대를 매었으며, 목화라는 신을 신었다.
신부는 활옷과 원삼을 입었다. 활옷은 다홍색 비단 바탕에 장수와 길복을 의미하는 연꽃, 목단, 십장생 등이 수놓아져 있다. 활옷 속에 다홍색 치마와 노란색 삼회장저고리를 입었는데 이는 ‘모든 것이 흙에서 성장한다.’는 원리인 생(生)과 성(成)에 바탕을 둔 것이다. 원삼은 고려 시대부터 대례복으로 내명부와 신부의 상복(上服)으로 입어 왔다. 왕실의 공주와 옹주가 대례복으로 입었던 초록 원삼은 서민층의 혼례식에도 허용되었다. 소매에는 다홍과 노랑 양색의 색동이 달려 있다. 그리고 대대를 띠고 머리에는 잠(簪)을 꽂고 뒷 댕기를 드리웠으며 칠보화관을 썼다. 오늘날에는 대개 서양식의 웨딩드레스와 턱시도 등의 양복을 입는 결혼식이 일반화되었다.
한편, 1968년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 상서 마을의 황계주와 박명자의 결혼사진이나 백운면 동창리 화산 마을에서 치러진 결혼식의 사진을 보면 1960~1970년대까지 전통 혼례 풍습이 잔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례복]
상례복은 혼례복에 비해 변화의 속도가 늦은 편이다. 조선 시대까지 상복을 다섯 가지로 차등을 두는 오복 제도(五服制度)가 존중되었다. 상을 당한 사람이 죽은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따라서 상복의 경중을 나타내고, 상례 기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오복인 참최·자최·대공·소공·시마 중에서 대공 이상은 친(親), 소공과 시마는 소(疎)가 된다. 친소에 따라서 오복을 입는 기간이 각기 다르며, 상복의 재료도 다르다. 남자의 상복은 최의(衰衣)·최상(衰裳)·중의(中衣)·상관(喪冠)·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상장(喪杖)·구(屨)·행전(行纏)을 갖추어 입는 것이다. 여자의 상복은 대수장군(大袖長裙)·개두(蓋頭)·포총(布總)·계(筓)·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상장(喪杖)·구(屨)를 갖추어 입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 상·장례는 일제 강점기, 1969년 ‘가정의례 준칙’ 등을 거치면서 장례 의식과 장례복을 입는 기간이 짧아졌다. 서구의 영향으로 남자의 경우 검정색 양복과 검정색 넥타이에 베로 만든 건(巾) 또는 완장·행전을 하며, 때로는 완장 하나로 상제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자는 검정색 치마와 저고리를 입거나 검정색 양장을 하며, 머리에는 흰 리본을 단다.
[제례복]
제례복은 명절이나 기제사 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입는 옷을 말한다. 조선 시대 예서(禮書)나 출토 복식에 나타난 제례복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이후 사대부들 사이에서 흔히 입었던 제례복은 도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민가에도 두루 퍼졌다. 제례복이 도포로 바뀜에 따라 머리에도 복건 대신 흑립(黑笠)이나 유건(儒巾)을 주로 착용하였다. 그러나 기제사 때만은 조선 시대 말엽까지도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시대 여성들은 제사에 소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 특별히 제례복으로 정해진 옷은 없었다. 양반 부녀는 가문에 따라 염의를 갖추어 입거나, 올이 성기고 얇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소의(宵衣)를 만들어 입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민 여성들은 평상복인 흰색이나 옥색 치마, 저고리를 깨끗이 빨아 다듬어 갖추어 입었다.
유교에서 연유된 제례에는 남자들은 도포나 두루마기, 여자는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는 것이 원칙으로 알려지나 오늘날에는 거의 평상복으로 대신하고 있다. 검은 양복이나 깨끗한 평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은 추모식으로 대신하기 때문에 제례의 중요성은 과거에 비해 줄어들고 있다.
[출생 의례복]
출생 의례복은 출생 직후부터 삼칠일, 백일, 돌까지 의례를 거칠 때 입는 의복이다. 삼칠일 옷은 출생 후 3일부터 21일 동안 입히는 옷으로 주로 백일 될 때까지 입는다. 백일 옷은 백색 옷감에 백줄을 넣어 만든 누비옷인데 이렇게 하면 아이가 100살까지 산다고 믿는다.
돌복은 아이가 태어난 지 1년째 되는 돌날에 입는 옷을 말한다. 남자 아이는 연보라 풍차바지에 옥색 또는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남색 돌띠를 맨다. 개화기 이후에는 그 위에 남색 조끼와 연두색 길에 색동 소매를 단 마고자를 덧입었다. 형편에 따라 오방색으로 지은 까치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전복을 입기도 했다. 머리에는 검은 색 복건을 썼는데, 성인용과 같으나 금박을 하여 귀여움을 더해 주었다.
전복은 답호 또는 쾌자라고도 하는데 등솔이 길게 트이고 소매가 없는 옷으로 깃이나 섶 등에 ‘수복강녕(壽福康寧)’같은 글자나 꽃무늬[花紋]를 금박하였다. 또한 붉은 바탕에 십장생을 수놓은 남색 돌띠를 매었다. 이 돌띠의 등 부분에는 12개월을 상징하는 12개의 작은 염낭에 여러 종류의 곡식을 담아 매달아 주어 부귀영화를 염원하기도 하였다.
여자 아이는 분홍색 풍차바지에 노란색 속치마를 입고 다홍치마를 입었다. 저고리는 색동 소매를 단 노랑이나 연두색 길의 저고리였다. 여기에 당의를 입고 머리에 굴레를 쓰며 길상 문양의 패물로 만든 아기 노리개를 달았다. 신발은 남자 아이는 태사혜(太史鞋), 여자 아이는 꽃신 또는 비단신을 신었다. 요즈음 돌잔치는 대부분 연회장이나 음식점에서 치러지며 그곳에서 비치된 다양한 돌 한복이나 전문 한복점에서 빌려 입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