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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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粹 |
이칭/별칭 | 연재(連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경택 |
출생 시기/일시 | 1542년 - 김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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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김수 창의, 웅치 전투 참전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김수 사망 |
출생지 | 김수 출생지 - 전라북도 진안군 |
활동지 | 김수 활동지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사천(泗川) |
[정의]
조선 후기 진안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사천(泗川). 고조할아버지는 오매당(寤寐堂) 병조 판서 김만서(金晩緖)이고 의병 활동에 동참하여 순절한 죽곡(竹谷) 김정(金精)이 동생이며, 아들로는 김원룡(金元龍), 김형룡(金亨龍), 김이룡(金利龍) 등이 있다.
[활동 사항]
김수(金粹)[1542~1592]는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은 그의 학문이 뛰어남을 인정하여 먼 친척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4월 왜적이 부산에 상륙한 이래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전라도 역시 6월 중순 경 왜적에 의해 무주와 금산이 함락 당한 데 이어 진안이 점령 당하면서 호남의 지휘부인 전주부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개된 싸움이 바로 웅치(熊峙) 전투였다. 당시 김수는 동생인 김정을 비롯하여 가솔들을 이끌고 관군인 김제 군수 정담(鄭湛) 등과 함께 웅치에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휘하의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 특히 왜적과 6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7월 8일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왜적과의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진안지』에 전하는 노사훈(盧士訓)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김수와 아우 김정이 서로 돕다가 순절하였고 삼남인 김이룡과 김정의 아들 김인용·김의룡, 동생 김서의 아들 김익룡, 종제 김당의 아들 김경룡 등 11명이 당일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장자인 김원룡과 조카인 김을룡이 겨우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냈다고 한다. 비록 김수는 웅치 전투에서 순절했지만 이 전투로 인해 호남의 수읍인 전주성이 보존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병 활동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