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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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文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선아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 소재하고 있거나 생산된 문서류.
[개설]
고문서는 개인과 개인 사이, 개인과 국가 기관, 국가 기관끼리 주고받았던 각종 문서류로서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문서는 문헌과 구별된다. 즉 편집, 편찬된 서적류, 일기류, 비방기, 등록류, 장부류 등과 구별할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조선 시대~근현대 기간 동안 생산된 기록물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안 지역의 고문서에는 보물 제746호로 지정된 「성석린 고신 왕지」를 비롯하여 「효자 이희식 교지」, 「장기건 임명 교지」, 통문류로는 노촌리 신용권 소장 고문서, 평장리 양재호 소장 고문서 등이 있다. 서화류로는 운교리 전송훈 소장 고문서, 호적류로는 「용담현 남원 양씨 고문서」, 평장리 정상렴 소장 고문서, 간찰류로는 정상렴 소장 정재 이석용 간찰, 전주 이씨 이부영 소장 간찰 등을 말할 수 있다. 또한 진안 역사 박물관 소장 「중평 계안」, 「흥학 계안」 등과 각종 고문헌 등을 들 수 있다.
[진안 소재 고문서류의 특징]
진안 지역 소재 고문서는 상서류, 계안, 교지, 호적류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전주 이씨 이부용 소장의 간찰류는 수당 이덕응이 한일합방 이후 황단(皇壇) 건립 과정에서 주고받은 간찰류로서 황실이 무너진 후 민간 차원에서 대응한 추숭(追崇)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문서류이다.
평장리 정상렴 소장 고문서는 호적류, 간찰류, 서화류, 고한적 등 다양한 자료들이다. 정상렴은 내산사에 배향되어 있는 독립 유공자 정종엽의 후손으로 진안 향교 전교를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정종엽은 간재 전우와 교유하였고, 정재 이석용의 항일 의병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군하리 양재술 소장 고문서, 노촌리 신용권 소장 고문서, 송림리 양재호 소장 고문서 등은 모두 진안 지역에 흩어져 있는 정려 혹은 사우를 세우기 위하여 향교에서 각 지역의 유림들에게 보냈던 통문류 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진안 지역 주요 고문서]
1. 「성석린 고신 왕지」
교지(敎旨)는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시호(諡號), 자격(資格), 토지 및 노비 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진안에는 1402년(태종 2)에 발급한 ‘성석린 고신 왕지’를 비롯하여 이희식 증직 교지, 장기건 임명 교지 등이 있다.
성석린 고신 왕지는 1402년에 발급한 것으로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功勞)로 익대좌명 삼등 공신(翊戴佐明三等功臣)에 포상(褒賞)하는 내용이다.
2. 전주 이씨 이부영 소장 고문서
전주 이씨 이부영 소장의 간찰류는 수당 이덕응이 한일합방 이후 황단(皇壇) 건립 과정에서 주고받은 간찰류로서 황실이 무너진 후 민간 차원에서 전개한 추숭 과정을 알려 주는 문서류이다.
3. 정상렴 소장 고문서
평장리 정상렴 소장 고문서는 호적류, 간찰류, 서화류, 고한적 등 다양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정상렴은 내산사(來山祠)에 배향되어 있는 독립 유공자 정종엽(鄭鐘燁)의 후손으로 진안 향교 전교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정종엽은 간재 전우와 교유하였고, 정재 이석용의 항일 의병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4. 양재호 소장 고문서
양재호 소장 고문서는 백운면 평장리 송림 마을 어귀에 있는 비석 ‘효자 양원하 정려(孝子學生梁源河之閭)’, ‘효자 양종윤 정려(孝子學生梁鍾潤之閭)’, ‘열녀 양명수 처 의성 정씨 정려(烈女梁命洙妻義城丁氏之閭)’를 세우기 위하여 1878년에 올린 상서이다. 그후 양원하 정려는 1892년 건립되었는데 높이 110㎝, 폭 48㎝이다. 1878년 양원하 정려를 세우도록 요청한 상서 외에 양재호 소장 고문서는 호구 단자 5매, 혼배서 2매 등이다.
5. 신용권 소장 고문서
노촌리 신용권 소장 고문서는 원노촌의 거창 신씨 미계 신의련의 사당 건립을 추천하는 상서류이다. 백운면 평장리 원노촌에 거주하는 신용권은 거창 신씨로 미계 신의련의 후손이다.
신의련(愼義連)[1546~1606]은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의 병구완을 위해 한 겨울에 꿩과 잉어를 구하여 간호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신의련의 효행은 일본인 왜장을 감동시켰다. 이에 왜장은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라고 마을 입구에 써서 이곳에서 노략질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원노촌 마을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모두 무사하였다고 하는 오만동 전설까지 등장했다.
임진왜란 이후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미계 신의련에 대한 포장이 이루어졌으나, 사당이 마련되지 못하였다. 신용권 소장 고문서는 충효사 건립을 위한 상소이며, 인장으로 마패가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이양규 외 89명이 서명하는 등 남원 향교, 임실 17명, 전주 16명, 용담 11명, 운동 7명, 장수 10명, 진안 13명 등 총 115명의 연명 상소로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