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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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역사.
[상고 시대]
고대로 올라갈수록 진안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문헌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상고 시대와 고대 그리고 중세를 잇는 교량인 후삼국 시대 진안의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다만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토대로 몇 가지 시사점을 갖는 차원에서 진안의 시작을 언급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진안의 역사와 관련된 지표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묘제(墓制)인 고인돌이다. 현재 마령·백운·부귀·안천·용담·정천 등지에 널리 분포하는데, 학계에서는 청동기 시대를 대체적으로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로 보고 있으므로 이를 따르면 늦어도 기원전 4세기, 즉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부터 진안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용담댐 수몰지의 유적 발굴에서 간돌칼 등이 발굴된 점으로 보아 선사 시대부터 취락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삼한 시대에는 마한의 영역 안에서 지역 정치체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고려 시대]
고대와 관련하여 진안 지역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지명 연원에 불과하다. 진안과 관련된 고대와 중세 시기의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지명에 대한 것이고, 여기에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본래 진안은 백제에 속하는 난진아현(難珍阿縣) 또는 월량현(月良縣)[지금의 진안읍·부귀면·상전면 지역]·마돌현(馬突縣)[지금의 마령면·백운면·성수면 지역]·물거현(勿居縣)[지금의 용담면·동향면·안천면·정천면·주천면 지역]에서 기원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복한 이후 경덕왕(景德王) 시기에 난진아현을 진안현(鎭安縣)이라고 바꿔 벽계군(壁谿郡)[지금의 장계면] 소속으로 두었고, 마돌현은 마령현(馬靈縣)으로 바꾸어 임실군(任實郡) 소속으로 두었으며, 물거현은 청거현(淸渠縣)으로 바꿔 진례군(進禮郡)[지금의 금산군] 소속으로 각기 분할하였다.
고려 초에는 진안현과 마령현을 모두 전주 소속으로 옮기고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1391년(공양왕 3)에는 진안 감무가 마령의 감무까지 겸임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한편 용담 지역에는 1313년(충선왕 5)에 용담현(龍潭縣)을 두었고, 1391년(공양왕 3)에는 현령 최자비(崔自卑)가 용담 향교를 건립하였다.
[조선 시대]
조선 개국 후 1413년(태종 13)에 지방 제도를 개편할 때 마령현이 통합되어 진안현으로 개칭되면서 현감이 두어졌고, 이듬해에 진안 향교가 창건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진안현의 호구 수는 169호 772인이었고, 용담현은 86호 274인이었다.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鄭汝立)이 역모에 걸려 죽도(竹島)로 도주하다가 부귀면 오룡리 다복동에서 자결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일본군에게 현이 함락되었으며, 전주 만호 황박(黃璞)과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및 김제 군수 정담(鄭湛) 등의 관군과 김수(金粹)·김정(金精) 형제 등을 주축으로 한 진안 지방 의병의 연합군이 웅치에서 용담·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략하려던 일본군과 대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정담을 비롯한 김수·김정 등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원 전사하였다. 비록 패했지만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일본군이 호남 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한 중요한 전투였다.
1646년(인조 24)에는 10년 동안 진안현을 폐지하여 장수현에 속하도록 했고, 1655년(효종 6) 1월에야 다시 진안현으로 승격되었다. 용담현도 1646년(인조 24)에 현령이 현감으로 격하되었다가 1656년(효종 7)에 이르러서야 현령으로 회복되었다.
조선 말에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진안 지방으로 피난한 천주교 신자들이 어은동을 비롯한 곳곳에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진안과 용담 지역은 1894년(고종 31)에 발생한 동학 농민 혁명에 휘말려 전장이 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이 23부(府)로 개편되면서 진안현은 진안군으로, 용담현은 용담군으로 개칭되어 남원부에 속하게 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13도로 개편되자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 행정 구역 대개편에 따라 용담군이 진안군에 병합되어 11개 면을 관할하는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현대]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기간에는 공공 기관과 학교 및 주택 등이 일부 파괴되었으나 다른 지역에 비하면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군경이 퇴각할 때 진안 경찰서에 수감 중이던 보도 연맹 검속자 등 30여 명을 백운면 신암리에서 처형한 사건이 있었고, 9·28 수복 당시에는 공산군이 진안 보안서[경찰서]에 수감 중이던 우익 인사 30여 명을 진안읍 군하리 강정골재에서 처형한 사건이 있었다. 또 후퇴하던 공산군이 부귀면 궁항리에서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진안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면 공산군 치하에서 많은 살육이 일어나지는 않은 편이었다. 산간 지대라 지주 계급이 크게 형성되지 않아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입산하거나 잠복한 우익 청년들을 중심으로 ‘대한 비밀 결사대’가 조직되어 공산군과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전과를 거두었고, 특히 9·28 수복 이후에는 군경과 연합하여 잔존 공산군 소탕에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주천면에서 공비들의 준동이 격화되자 지방 청년들이 ‘의용 전투대’를 조직하여 이들과 대항하던 중 33명이 전사하였다. 그 때 전사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대한의백비(大韓義魄碑)’가 세워졌다.
1979년 5월 1일 진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2월 15일 마령면 연장리가 진안읍에, 정천면 구룡리가 상전면에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 상전면 운산리가 진안읍에, 정천면 용평리가 상전면에 편입되었다. 1994년 12월 26일에는 동향면의 신송리 백암 마을이 장수군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