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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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鎭安高原-先史時代以來-持續-文化上漸移地帶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선사/선사,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곽장근 |
[개설]
선사 시대 이래로 줄곧 교통의 중심지를 이룬 곳이 진안고원이다. 금강을 중심으로 만경강과 동진강, 섬진강, 남강, 황강 유역을 하나로 묶는 내륙 교통로의 교량 역할을 담당했다. 진안고원 일대에 그물 조직처럼 잘 갖춰진 내륙 교통로를 이용하여 사람의 왕래나 물자의 교역이 왕성하게 이루어진 ‘문화 교류의 허브’였다. 우리나라 남부 지방의 중앙부에 자리한 진안군은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선사 시대부터 줄곧 점이 지대를 이루었다.
진안군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가를 추정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진안군 용담댐 수몰 지구인 정천면 진그늘 마을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어, 후기 구석기 시대로 상한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정천면 갈머리를 비롯한 신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영남의 내륙 지역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였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서도 진안군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천면 여의곡을 중심으로 용담댐 수몰 지구에서 조사된 200여 기의 고인돌은 외곽에 묘역을 구획한 다음, 중앙부에 지하식 혹은 지상식의 매장 주체부를 갖추어 놓았다. 진안군은 선사 시대 때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주변 지역과 긴밀한 교류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거점 지역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 시대 때 진안고원은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했던 곳이다. 백제는 금강과 섬진강 유역을 곧장 연결해 주던 간선 교통로를 일찍 장악함으로써 섬진강 유역을 백제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이를 위해 진안고원을 종단하던 간선 교통로를 관할할 목적으로 교통의 중심지에 토성과 산성을 많이 쌓았다. 반면에 백두대간의 육십령을 장악했던 장수 가야는 교통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가야계 왕국으로 발전했다. 그러다가 백제의 웅진 천도와 그에 따른 백제의 정치적인 혼란기를 틈타 용담댐 일대로 진출하여 한동안 백제의 간선 교통로를 차단했다. 6세기 전반기에는 신라가 백두대간의 덕산령을 넘어 전라북도 무주군과 금산군 등 진안고원의 동북부를 신라의 수중으로 포함시켰다.
[석기 시대 문화와 문물 교류의 허브]
언제부터 진안군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가를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용담댐 수몰 지구인 금강 본류와 정자천 유역, 진안천 유역에서 격지·몸돌·긁개 등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수습되었고, 그 상한이 후기 구석기 시대까지 올라갈 개연성을 암시해 주었다. 진그늘 유적은 전라북도에서 최초로 정식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성격이 밝혀진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이다. 모두 20여 개소의 석기 제작소와 화덕 자리, 여러 가지 석기와 함께 몸돌과 격지·돌날·좀돌날·부스러기·조각돌 등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슴베찌르개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점을 근거로 특정 철마다 찾아와서 주로 사냥용 연장을 만들고, 잡은 짐승을 처리하던 사냥 캠프로 추정되었다.
신석기 시대는 1만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처음에는 본격적인 농경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채집 경제에서 생산 경제로 탈바꿈하면서 정착 생활을 영위하는 생활 유적이 등장하고 토기의 발명, 마제 석기의 출현 등으로 상징된다. 금강의 본류와 지류를 따라 양쪽에 형성된 충적지에 신석기 시대 유적이 자리한다.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승금 유적·안자동 유적, 상전면 용평리 운암 유적, 정천면 갈용리 갈머리 유적·농산 유적, 모정리 진그늘 유적·여의곡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갈머리는 금강과 섬진강 유역을 종단하는 간선 교통로가 통과하는 길목으로 정자천 북쪽 충적지에 자리한다. 그리고 섬진강 유역에 속한 성수면 좌포리에서도 빗살무늬 토기편과 석기류가 수습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대체로 하천변의 들판과 구릉지에 입지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농경에 유리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생계양식을 통한 안정된 정착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빗살무늬 토기편이 절대량을 차지하는 유물은 정주형의 주거지보다 화덕 자리 혹은 집석 유구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 유구의 속성은 금강과 섬진강, 영남 지방 서부 내륙 지역 출토품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 주었다. 진안군과 주변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대체로 금강과 섬진강 양쪽에 넓게 펼쳐진 들판에 입지를 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앞으로 이 시기의 유적이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요망된다.
[청동기 시대 거점 지역으로 발돋움]
우리나라에서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중국 동북 지방을 비롯하여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농경 생활의 시작, 마제 석기의 본격적 사용, 사회 복합도의 증가가 한층 강해진다. 그리고 토기의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무문 토기가 주종을 이루어 그 시기를 달리 ‘무문 토기 시대’라고도 불린다. 매장 풍습도 이전 시기와 확연히 다른 매장 방법과 시기상 선후 관계를 달리하는 다양한 묘제가 새롭게 등장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청동기 시대의 매장 풍습으로는 고안돌과 돌널무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독널무덤과 움무덤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청동기 시대의 상징적인 매장 풍습인 고인돌은 함경북도를 제외한 우리나라의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면서 호남 지방에서 한층 조밀하게 밀집되어 있다. 고인돌은 하나만 있는 경우도 간혹 확인되고 있지만 대부분은 수기 내지 수십 기씩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고인돌의 상석은 정연하게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면서 주변의 하천 혹은 산줄기의 방향과 평행하게 장축 방향을 두고 있는 점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 우리나라에 밀집 분포된 고인돌은 지상에 드러난 상석의 외형을 기준으로 크게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나뉜다.
우선 북방식 고인돌은 지상에 4매의 판자 모양 돌로 시신을 안치하는 석관 모양의 매장 시설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판자 모양의 상석을 올려 놓은 것을 말한다. 고인돌의 외형이 마치 탁자와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어 달리 ‘탁자식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전라북도에서는 고창군 도산리와 장수군 삼봉리에 1기씩의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이 조사되었다. 특히 진안군과 인접된 장수군 삼봉리는 장계천을 따라 펼쳐진 들판에 많은 수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부터 시작된 농지 정리 사업을 추진하면서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 1기의 북방식 고인돌만 보존되어 있다.
다음으로 남방식 고인돌은 지하에 시신과 유물을 안치하는 돌널이나 돌덧널 등의 매장 시설을 만들고 그 위에 큰 상석을 올려 놓아 축조된 형식을 말한다. 그리고 상석을 어떻게 올려 놓았는가에 따라 다시 두 가지 형식으로 세분된다. 이를테면 상석이 몇 개의 작은 받침돌로 고여 있는 것은 ‘기반식 고인돌’이라 부르고, 특별한 시설이 없이 상석이 직접 땅위에 얹혀 있는 것은 ‘개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두 가지 형식의 고인돌이 우리나라의 북쪽보다는 주로 남쪽 지방에 많이 분포된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를 모두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이제까지의 지표 조사에서 밝혀진 결과에 의하면, 진안군의 60여 개소에 고인돌이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고인돌은 진안읍 14개소와 부귀면 16개소, 백운면 10개소, 안천면 7개소 등 대부분 하천을 따라 들판이 펼쳐져 있거나 내륙 교통로가 통과하는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금강 상류 지역인 부귀천·진안천·정자천·안자천 등을 따라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정천면 모정리와 안천면 삼락리 일대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 섬진강 유역에서는 교통의 중심지인 마령면 일대에 30여 기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아직까지 진안군에서는 북방식 고인돌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은 기반식과 개석식이 반절씩 섞여 있다. 이들 고인돌의 외형적인 속성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상석의 형태나 크기에서 이곳의 강한 지역성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금강과 섬진강을 따라 넓게 펼쳐진 들판·구릉지·고갯마루·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그 입지에서도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용담댐 수몰 지구와 마령면 평지리 고인돌을 대상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축조 시기나 성격이 심층적으로 파악되었다.
종래에 고인돌에 대한 발굴 조사는 용담댐 수몰 지구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안천면 삼락리 구곡·안자동·수좌동·승금·풍암, 정천면 모정리 모곡·여의곡·망덕에서 200여 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섬진강 유역에 속한 마령면 평지리에서도 고인돌이 조사되었다. 특히 정천면 모정리 여의곡 유적과 모실 유적에서는 고인돌과 돌덧널무덤이 함께 조사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이들 고인돌은 외곽에 타원형·장방형·방형의 묘역을 구획한 다음, 중앙부에 지하식 혹은 지상식의 매장 주체부를 갖추어 놓았다. 종래에 이것과 유사한 형태의 고인돌이 백두대간 산줄기 동쪽인 경상남도 거창군과 합천군 등 황강 유역에서 조사되었다.
그 밖에도 안천면 삼락리 수좌동 유적, 정천면 갈용리 농산 유적과 모정리 여의곡 유적에서 청동기 시대의 생활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의 주거지가 처음으로 조사된 수좌동 유적에서는 유구가 심하게 훼손되어, 그 성격이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리고 농산 유적에서는 평면 형태가 원형 혹은 장방형을 띠는 주거지와 수혈 유구, 여의곡 유적에서도 송국리형 주거지와 함께 밭 유적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마령면 동촌리에서는 송국리형 토기가 수습된 장방형 주거지가 지표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고인돌처럼 유구의 속성이 황강 혹은 남강 유역에서 조사된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 주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무엇보다 정천면 여의곡 유적에서 조사된 밭은 당시 생산 경제 체제를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백제의 진출과 와정토성 축성]
백제는 수도를 공주로 옮긴 이후 한동안 귀족의 천권·왕의 피살·귀족의 반란, 그리고 한성의 상실·권신의 발호·왕권의 실추 등으로 인해 일련의 정치적 혼미 내지 정정불안에 빠진다. 이처럼 백제가 정치적인 혼란에 빠지면서 대내외적인 영향력을 갑자기 상실하게 되자 이를 틈타 장수군 일대에 2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을 조영한 장수 가야가 진안고원의 진안군과 충청남도 금산군 일대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무렵 용담댐과 금산군 일대에서 가야계 구덩식 돌덧널무덤의 등장과 함께 대규모 축성 및 봉수망이 구축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와정토성은 백제 중앙과 가야를 연결해 주는 여러 갈래의 내륙 교통로가 하나로 합쳐지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백제의 중앙과 영남 내륙 지역의 가야계 소국을 이어주던 백두대간의 육십령로와 경남 서부 지역을 잇는 백두대간의 치재로가 이곳에서 만난다. 그리하여 와정토성 일대가 진안고원에서 최대의 교통 중심지를 이루었다. 용담댐에서 위쪽으로 500m가량 떨어진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와정 마을 서남쪽에 진안 와정토성이 있다. 금강과 바로 인접된 산 정상부에 반월형의 토성이 입지를 두었는데, 이곳에 토성이 자리한다는 사실은 1994년 밝혀졌다.
1994년 설문 조사 때 “이 산에 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아직까지 성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와정 마을 주민들이 제보해 주었다. 당시 주민들의 제보와 몇 점의 토기편, 그리고 ‘와정(臥停)’이라는 지명을 근거로 두 차례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산의 외곽에는 판축법으로 성벽을 쌓아올리고 목책을 한 바퀴 두른 백제 토성과 내부에서 대형 저장공과 구덩식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이 토성의 정상부에서 조사된 저장공은 풍화 암반층을 파내어 마련됐는데, 규모는 입구 직경 225㎝, 바닥 직경 185㎝, 깊이 272㎝이다.
와정토성의 서쪽 구역에서 7기의 백제계 구덩식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이들 주거지의 북벽 혹은 서북벽에는 겨울철에 추위를 피하기 위한 구들시설을 갖춰 놓았다. 구들시설은 ‘―’자형·‘L’자형·다곬형 등 모든 유형이 망라되어, 백제계 구덩식 주거지가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암시해 주었다. 그리고 백제의 중앙 세력과 관련된 광구 직구호·삼족 토기·시루 등 백제 토기가 토기류의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경부에 밀집 파상문이 시문된 소량의 가야 토기도 포함되어 있다. 토기류의 조합 상에 의하면, 진안 와정토성을 경유하는 내륙 교통로를 이용하여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계 소국들이 당시 백제와의 교류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주었다.
와정토성은 백제에 의해 축성된 이후 줄곧 관리 운영되다가 백제의 한성 상실로 갑자기 정치적인 혼란에 빠지면서 대내외적인 영향력을 상실하자, 이 기회를 틈타 장수 가야의 진출로 진안 와정토성이 폐성된 것으로 점쳐진다. 진안고원의 장수군 일대에서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한 장수가야가 백제의 정치적인 혼란기를 틈타 본래 백제가 장악하고 있었던 이곳으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결과 와정토성 일대 내륙 교통로의 관할권이 백제에서 장수가야로 넘어간 것이다. 와정토성과 인접된 황산리에서 그 가능성을 방증해 준다.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 공존]
장수 가야의 진출로 폐성된 와정토성에서 서쪽으로 350m가량 떨어진 곳에 진안 황산리 고분군이 있다. 금강의 본류와 주자천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500m가량 떨어진 곳으로 행정 구역상으로는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에 속한다. 여기서 조사된 17기의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지구별로 토기류의 조합 상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즉 ‘나’ 지구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17호에서 대가야 양식 등 가야 토기가 일색을 이루다가 점차 동쪽으로 가면서 백제 토기가 새롭게 등장하여 ‘가’ 지구에서는 가야 토기와 백제 토기, 신라 토기가 공존한다.
그런데 황산리에서 남쪽으로 2㎞가량 떨어진 곳에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산성이 있다. 월계리 산성은 산정식으로 고남치에서 남동쪽으로 금강 변까지 띠처럼 뻗은 산줄기의 끝자락에 있는데, 여기서 삼국 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상당량 수습되었다. 동시에 진안고원의 전라북도 무주군과 장수군으로 향하는 백두대간의 덕산령로·육십령로가 시작되는 분기점으로 금강의 폭이 200m 이상으로 워낙 넓어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고 한다. 동시에 진안고원의 장수군과 무주군 일대에서 금남정맥을 넘어 논산 방면으로 가기 위한 사람들도 대부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금강 상류지역인 진안고원으로 백제가 다시 진출하는 과정은 문헌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백제는 일련의 정치적인 불안을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시켜 왕권의 전제화를 모색한 다음, 487년(백제 동성왕 9)에는 임나의 대산성을 공략함으로써 동쪽, 즉 가야 지역으로 진출을 본격화한다. 문헌의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대산성은 ‘백제가 아닌 임나가 쌓았으며, 백제에서 동쪽으로 통하는 길목과 나루를 이용해서 건너야 할 정도로 큰 하천변에 입지를 두고 있으며, 그 너머에는 백제군이 주둔해 있다.’는 내용과 부합되는 곳에 자리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대산성의 위치 비정을 두고 많은 주장이 발표됐는데, 대산성은 최소한 가야 문화유산의 존재와 함께 내륙 교통로의 길목이자 나루를 통해 강을 건널 정도로 큰 강변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문헌의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곳은, 백제의 고산성(古山城)으로 알려진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산성이다. 월계리 산성은 ‘대산(帶山)’이라는 산의 이름처럼 금강을 따라 마치 띠 모양으로 뻗은 산줄기의 끝자락에 있다. 백제는 장수가야의 서쪽 진출로 한동안 빼앗긴 교통 상 중심지를 5세기 말엽 늦은 시기에 다시 회복함으로써 가야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교두보를 확보한다.
용담댐 구제 발굴에서도 신라 토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황산리 고분군에서 가야·백제 토기와 공반된 상태로 출토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진안군 안천면과 금산군 추부면에서 신라계 유물이 신라 고분에서 상당량 출토됐는데, 시기는 대체로 6세기 중엽 경으로 비정됐다. 진안고원 일대에서 6세기 전반기 이른 시기부터 등장하는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신라의 진출을 암시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백제의 웅진기 이후 백제와 신라의 간선 교통로는 나제 통문과 백두대간 덕산령을 넘어 경주까지 이어졌다. 삼국 시대 때 진안고원을 차지하려고 삼국이 치열하게 각축전을 펼쳐 백제와 가야,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