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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동마다 청년회 및 바르게 살기운동협의회, 마을 운영회 등이 있지만 예전에는 그런 모임이나 조직들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김성원은 몇 개의 조직과 친목에 참여하고 있는데, 바르게 살기운동협의회와 서사라 마을회를 비롯해 갑장 친목, 이웃 동네 친목 등에 참여하고 있다. 이 중 서사라 마을회는 모여서 마을 청소도 하고 방범도 선다고 한다. 그 외 서문시장 상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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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집을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장 건물 2층에 자리한 상인회 사무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김성원 상인회 회장을 만났다. 시장 상인들을 만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상인들이 ‘그렇게 서문시장에 대해서 듣고 싶으면 상인회 회장을 만나보라’고 권유를 했다. 마침 그때 지역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작가도 서문시장에 대한 이야기라면 김성원을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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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이 어렸을 때 사람들이 노동복으로 즐겨 입던 옷은 ‘갈중이’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노동복도 다양해졌지만, 예전에 제주 사람들은 입는 것에 그리 녹록치 않았다고 한다. 이 ‘갈중이’는 아직 익지 않은 감을 따서 빚은 다음 즙을 짜서 광목천에 들여 옷을 만든 것으로 파란 감물은 말릴수록 어두운 갈색으로 변하는데, 감이 갖고 있는 성분 때문인지, 땀을 자주 식혀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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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이 27살 때(1967년) 누이동생이 인근 편물점에 편물 기술자로 있는 현재의 부인(당시 22살)을 소개시켜 주어 혼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인은 당시 용담동 인근의 편물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김성원이 혼인할 당시 남자 나이 스물일곱은 혼례 치르기에 다소 늦은 나이였다. 친구들은 거의 장가를 간 때였다고 한다. 스물다섯만 되면 부모들이 장가를 보내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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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은 오현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일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제주 시내에는 신통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육지로 일자리를 찾아 출도했다고 한다. 작은 형도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1960년대에는 제주에서 취업하기 어려운 경우, 육지로 취업하기 위해 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제주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학교를 중퇴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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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음력 4월 28일 한림에서 7남매중 3남으로 태어남. 1954년경 제주 오현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제주시 용담1동 누나의 집으로 이사 옴 1958년경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취업하기 위해 상경함. 1967년 27세 때 부인 대정읍 모슬포 출신 양애향(1946년 음력 6월 15일생)과 혼인을 함. 1969년 장녀 김영희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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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에 있는 대한성공회 소속의 교회. 대한성공회(大韓聖公會, Anglican Church of Korea)는 고요한 주교(The Rt. Rev. Charles John Corfe)가 1889년 11월 1일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대한성공회는 1890년 선교된 이래 한국 문화의 토양에 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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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도두1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의 교회. 1951년 한국 전쟁 중 이북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목회자들이 전형적인 농어촌 마을인 제주시 도두 지역에 크리스트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고 노충섭 목사가 제주 시내에 거주하면서 도두 지역 선교를 담당하였다. 이 때 조순필 장로 등과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도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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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2동에 있는 한국기독교 장로회 소속의 교회. 동부교회는 1939년 전도 사업을 확장하기 위하여 본 교회를 동서로 나누어 복음 전파에 나서게 되었다. 1942년 10월부터 제주도 성내 서문통교회를 제주서부교회로 개칭하고 시내 동부 지역에 신축된 교회당을 동부교회라고 호칭하기로 당회에서 결의하였다. 이후 주간 예배는 동부교회당에서 야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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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천주교 단체. 레지오 마리에는 가톨릭 교회가 공인한 신심 활동 단체로서 성모님을 사령관으로 모시고 교회를 돕기 위해 창설된 마리아의 영적 군대이다. 이 단체의 창설자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 프랭크 더프(Frank M. Duff, 1889~1980)이다. 프랭크 더프는 1913년에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가입하여 극빈자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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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 우측의 큰 길을 건너오면 제주향교 지경에 도달하게 되는데, 제주향교에는 재미있는 풍수지리가 전한다. 용담동 노인회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예전에는 향교 터가 좋아야 출세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향교 자리는 어느 자리보다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제주향교도 향교 터를 여러 번 옮기면서 선비를 출세시키려 했었다는 것이다. 특히 향교 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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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에는 다른 마을에는 있는 산이나 오름이 없이 대개 평탄한 지형을 이루면서도 드물게 병문천과 한천이라는 두 개의 큰 하천을 끼고 있어 물과 관련된 지명이나 이야기가 많다. 병문천은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아라1동, 도남동 서쪽, 오라1동과 2동, 이도2동, 그리고 삼도1동과 용담1동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바다와 만나는 건천이다. 『증보탐라지』에는 ‘제주읍 용담리에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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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 인근 사람들에게 용담1동에서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을 물어보면 향교와 용연 그리고 서문시장을 꼽았다. 이 곳 중에서 사람냄새 나는 서문시장은 어떨까 싶어 발길을 돌렸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현대화’라는 명목 아래 시장은 일목요연한 형태로 정리가 되어있었고, 새롭게 지어진 시장 건물과 기존 상가들이 어우러져 판을 벌이고 있었다. 새롭게 지어진 시장 건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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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음력 10월 11일 제주시 용담1동 비룡로 동네에서 부친 신창준과 모친 김한선 사이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남. 1932년 10살 어머니와 함께 큰 오빠가 살고 있는 일본으로 도일함. 1932-42년 재일 제주인들과 함께 우산 공장에서 일함. 1941년 19살 제주시 래물 출신 남편 고순언과 일본에서 중매로 혼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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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의 마을 변화는 급격히 일어나, 도시환경의 변화 못지않게 이동 인구도 많아져 이곳에서 용담1동 토박이를 찾아 옛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들이 대체로 30년 안팎이었다. 고작해야 1970년대 이후 이야기나 듣게 되는 셈인데, 대부분 책자를 통해 습득한 용연 이야기나 제주향교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용담1동에 전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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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의 집을 들어서면 안채와 바깥채가 마주보고 서 있고, 마당은 텃밭으로 일궈지고 있었다. 집의 기본 골격을 보자니 꽤 오래 전에 지어진 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옥년의 말에 따르니 1백년이 넘은 집이라고 한다. 듣기로는 조부 때부터 살다가 조부 사망 후 부친에게 상속된 집이라고 한다. 부친은 목수여서 곧잘 문살이라든가 좋은 재료로 집을 보수했었는데, 지금은 신옥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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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은 10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13년을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혼인을 했다. 시댁은 래물이라 불리는 제주시의 사수동 지역이었지만 시댁 식구들이 일본에 살고 있던 같은 교포였다. 큰오빠의 올케가 래물 출신으로 시댁은 올케의 집과 앞, 뒷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댁 쪽에서 올케에게 신옥년이 ‘얌전해 보인다’고 중매를 부탁해서 열아홉에 혼인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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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이 일본으로 처음 간 것은 열 살 때였다. 그리고 13년을 살다 귀국했다. 부모와 작은오빠는 모두 용담1동에 살고 있었지만 큰오빠와 고모네, 작은아버지 딸과 아들네가 일본에 살고 있어서 모친이 ‘석달 증명’(30일용 비자로 이해됨)을 하여 어머니와 일본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제주와 일본을 왕래하던 배는 군대환, 복목환, 경성환, 신길환 등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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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이 해방 후 귀국한 지 얼마 안돼서 4·3을 맞았다. 1947년 3·1절 행사로 시작된 4·3을 그는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차 대전 때에 미국이 일본을 습격할 때도 폭탄으로 습격했기 때문에 직접 사람을 죽이는 모습보다는 판자집들이 불타는 영상이 오히려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4·3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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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과의 이야기는 용담동 옛 지경들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신옥년의 기억을 빌리자면 해방 후까지 용담동에는 집들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간간히 한천까지 이어지는 길가에 상점들만이 있었다고 한다. 현 서문시장 인근에도 집이 거의 없었고, 서문시장 위로는 거의 소나무밭이었는데, 시신을 묻는 묘지들이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한두기 근처나 부러리 근처 서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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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공항에서 20여 분을 승용차로 달려 제주시의 시내 중심가로 진입하려는 길목에 용담동이 있다. 용담동은 현재 전체 세 개의 동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주국제공항에서 제주 시내로 가는 동안 용담3동, 용담2동, 용담1동을 거치게 된다. 제주 시내 중심가라 일컬어지는 ‘중앙로’와 가장 가까이 인접한 곳이 용담1동이다. 용담1동은 다른 동과 달리 오름이나 산이 없이 평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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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나 전설들이 어느 정도 서사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도채비와 관련된 이야기는 민중적인 금기 사항을 드러낸다. 용담에도 그런 전설들이 남아 있었는데, 『용담동지(용담동지편찬위원회, 2001)』에 보니 도채비와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었다. ‘어느 날 밤 한 시경, 서문다리(병문교) 위쪽에 사는 한 사람이 술에 얼큰히 취해 집으로 가던 도중 집 앞 고목나무 아래 내(하천) 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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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 395번지 용화사 절에는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1971년 8월 26일 지정)인 복신미륵상이 있다. 제작 연대는 확실치 않았으나 마을 사람들은 고려시대로 추정했으며, 이곳에서는 자복, 자복신, 자복미륵, 미륵불, 서미륵, 서자복, 미륵부처, 큰 어른, 석불 등으로 부르고 있었다. 원래는 해륜사지라는 절터에 있었는데, 숙종 때 불교 타파 정책으로 절이 없어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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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연과 기우제에 관한 설화 외에 김성원에게서 비룡못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김성원이 어릴 적 이 ‘비룡못’에서 여름이면 목욕도 하고 물놀이를 하던 아련한 기억이 깃든 까닭에 전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비룡못과 관련해서는 여러 전설이 있다고는 하는데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하나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용담동지편찬위원회가 2001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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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끼고 있는 만큼 용담1동의 어업 활동도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용담동 사람들은 한두기 포구와 다끄내 포구를 이용해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했다고 한다. 김성원에 의하면 한두기 어부들은 제주의 다른 지역과 달리 농사와 뱃일을 겸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녀들도 있었는데, 용두암 근처에서 물질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물질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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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원은 용담동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용담1동, 2동 구분을 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동에 살던지 2동에 살던지 간에 모두 용담동 사람들이라는 한묶음으로 그들을 엮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인 즉 오히려 행정적 구분을 짓고 인구수를 동별로 추정하는 것은 일련의 식자층들이란다. 실제로 제주시 주민들은 모두 용담을 하나같이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용담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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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의 김성원과 신옥년의 말에 의하면 1950년대까지 용담동의 생업은 주로 농업과 어업이었다고 한다. 서사라 근방이 전부 밭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 곳 사람들은 조, 보리, 콩, 팥, 농사를 많이 지었다고 한다. 이 중에 조, 보리가 대중이었고, ‘지슬’이라 불리는 감자 농사도 조금 지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경작은 식량을 위한 것이어서 상품 작물인 유채농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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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에서 가장 유명한 설화 중의 하나가 기우제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기우제와 관련된 설화만도 여러 개의 버전이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가뭄이 들 때 용연에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물이 많은 동네인 만큼 물에 관련된 설화도 많고, 그 버전도 많았다. 다행히 노인회 사람들의 소개로 몇 권의 책을 통해 문자로 정리되어 있는 설화를 접할 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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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의 끝자락, 바다와 만나는 곳에서 용연을 만난다. 용연은 용두암에서는 약 200m 떨어진 한천 하류에 있는 맑은 못이다. 예부터 용궁의 사자들이 백록담으로 통하는 길이었다는 이 용연은 한라산 정상 백록담 북쪽에서 발원하여 오등동, 오라동을 거쳐 용담동의 동서한두기 사이의 바다와 이어지는 한천 하류로 전형적인 건천이지만, 사철 용천수가 풍부하고 만조시에는 해수가 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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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 이기풍 목사는 1865년 12월 23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한국 최초의 목사이자 제주도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로 1908년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부터 1917년까지 많은 복음의 씨를 뿌렸다. 제주도 성안교회를 비롯하여, 금성, 삼양, 성읍, 조춘, 모슬포, 한림, 용수, 세화 등의 교회를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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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연동에 있는 제주 지역 농민들의 권익 보호와 농업의 건강한 발전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 전국농민회총연맹 제주도연맹은 1991년 4월 30일 창립되었다. 대정읍 농민회·안덕면 농민회 등을 포함한 읍·면 단위의 제주 지역 6개 농민회가 주축이 되어, 임경재를 상임의장으로 하여 결성하였다. 전농의 산하 기관으로서, 크게는 농민의 농지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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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에 있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제주 지역 노동 단체. 19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 잡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계승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 중앙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93년 6월 모체인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가 결성되었으며, 1994년 11월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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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과 제주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용담동의 자연마을은 일제시대에 접어들어서는 급격한 변화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용담동은 1940년대까지는 자연마을인 용두동, 새광양, 정평동, 수근동 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제주목의 성외(城外)에 있는 다소 격리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군용비행장 건설로 현 제주국제공항 부근에 ‘정뜨르(당시 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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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에서 발행되는 격주간 종교 신문. 『제주기독신문』은 신앙 간증, 수필 및 설교와 신학 논단 등을 게재하고 기독교 복음 선교를 통한 국민정서 순화에 기여하기 위해 1992년 정영택 목사 등이 창간하였다. 신문은 격주간지로 정치 및 시사 관련 사항을 제외한 기독교계 소식 및 지방 소식을 안내하고 있다. 2007년 8월 25일까지 총352호가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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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1동에 있는 제주 최초의 개신교 교회. 1907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창립하는 자리에서 신학교 첫 졸업생 7인을 한국 최초의 목사로 안수하였다. 그 중 이기풍 목사를 제주 선교를 위해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에 도착하여 전도 활동을 하였다. 김재원, 홍순흥, 김행권을 만나 향교골에서 기도회를 시작하였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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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우편 업무를 관할하는 공공 기관. 1902년 8월 15일에 세워진 제주우체국은 몇 번의 명칭 변경과 승격을 거친 뒤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 제주 지역의 우편과 소포 물류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21개의 제주시 내 우체국과 10개 곳의 우편 취급국을 지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 통신은 1884년 홍영식에 의해서 한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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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천주교 교회. 제주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알려진 것은 1801년 정난주(마리아, 아명 정명련)가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되면서부터이다. 1845년에는 김대건(안드레아) 성인이 제주 앞바다에 표착하였다. 1858년에는 함덕 출신의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이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전교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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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에 있는 개신교 사회 단체. YMCA는 범세계적인 시민운동단체로 1844년 영국 런던에서 조지윌리암스와 그의 동지 12명이 모여 산업혁명 직후의 사회 부조리와 근로청소년의 정신적, 영적 상태의 개선을 위해 일으킨 청년운동에서 출발했다. 현재 120여 개 나라에 1만여 개의 조직과 3천만 명이 넘는 회원 및 66만 명의 지도자와 2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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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연동에 있는 개신교 사회 단체. 제주YWCA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자기 삶에 실천함으로써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전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건설함을 목적으로 1954년 설립되었다. 제주YWCA는 1954년 1월 21일 윤현숙, 이순실 등에 의해 창설되었다. 1970년에는 클럽YWCA로 연합회에 가입하였다. 1980년 5월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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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부터 1948년까지 제주시에서 활동했던 우익 단체. 광복군 출신 이범석이 광복 후 한국 사회의 사상적 갈등 타개와 청년 수련을 위해 1946년 10월 9일 설립한 우익 계열의 단체가 조선 민족 청년단이다. 1946년 11월 미군정 당국의 재정적인 지원에 힘입어 수원에 훈련소를 개설하고 훈련생을 선발, 훈련시킨 후 출신 혹은 거주 지역으로 파견하여 하부 조직을 결성, 강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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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천주교 제주교구. 맨 처음 제주에 복음이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1592~1598) 때 일본에 갔다가 유럽 사신들을 따라 제주로 돌아온 김복수가 천주교 교리서 및 기도문을 가지고 와서 복음을 소개하면서부터이다. 또한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이 항해 도중 제주에 표착하였고, 후일 귀국하여 유럽 12개어로 번역 발표한 『표류기』속에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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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천주교 단체. 제주 시내에는 제주교구청이 있는데, 제주교구 아래로는 본당을 비롯한 수도회, 교구기관 및 신자들의 단체들이 조직되어 있다. 제주교구청 내 제주 시내에 있는 본당은 제주 중앙 본당을 비롯하여 광양 본당, 서문 본당, 동광 본당, 노형 본당, 신제주 본당, 화북 본당, 동문 본당 등이 있다. 제주 중앙 본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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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이후 지속적인 도로 확장과 병문천, 한천의 복개 공사로 용담1동의 지리적 변화는 급격했지만, 최근에는 일도 지구나, 연동 지구에 새로운 시가지들이 형성되면서 용담1동은 50년대에서 80년대 누렸던 호황은 가라앉고 한적한 분위기 속에 도심의 관문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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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해방 후 해외 동포들의 귀국과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유입되고, 4·3(1947년 3월 1일~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으로 일어난 대규모 주민 학살) 의한 소개민의 이입 등 급격한 인구 증가로 새로운 도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때부터 용담동에서 먹돌새기 동네가 형성되고 촌락이 비대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제주시 승격 이후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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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향교와 서문시장, 용담1동 노인회, 용담1동사무소, 인근 식당가 등을 들르면서 필자는 용담1동이 용담2동, 용담3동과 함께 용담동으로 묶여 있었다는 이야기를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원래 1950년대까지는 지금처럼 용담1동에서부터 용담3동까지 나누어진 동이 아니었다고 한다. 때문에 용담1동의 설촌과 지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전체 용담동의 설촌 이야기부터 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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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에 사는 김성원은 물이 귀한 제주에서 용담동은 제주시에서 유일하게 한천과 병문천이라는 두 개의 큰 하천을 끼고 있는 마을인 만큼 좋은 용천수를 많이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성원이 어렸을 적에는 용천수가 솟는 곳에는 반드시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을 물지게로 떠다가 집 안의 독에 채워 넣고는 그것을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용담동 물 하면 ‘한두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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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2동에 있는 사회 단체. 신민회와 청년 학우회가 일제로부터 소위 105인 사건 조작으로 해산을 당하고, 미국 망명길에 오른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 이미 조직되어 있던 대한인 국민회의 중앙 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흥사단은 안창호 선생이 민족 독립을 위한 핵심적인 일꾼을 양성할 새로운 민족 운동 단체로 구상하여 창립한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