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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 의원 선거. 1948년 5월 10일의 제헌 의회 선거는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치러졌다. 그러나 남로당을 비롯한 좌파 세력은 물론 김구 등의 우파 세력까지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선거의 참여를 거부했다. 이 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활발했으며, 제주도에서는 ‘4·3 무장 봉기’라는 적극적인 저지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제주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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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제주 4·3 당시 초토화되어 터만 남아 있는 마을. 곤을동은 화북천이 바다를 향해 흐르다 별도봉 동쪽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 곳에 하천 안쪽에 있던 안곤을, 하천과 하천 사이에 있던 가운데곤을, 그리고 밧곤을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밧곤을과 가운데곤을 주민들은 ‘덕수물’ 이란 용천수를, 안곤을 주민들은 ‘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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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제주도에서 결성된 정치 단체. 공산주의 이념을 제주에 전파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서울에서는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 3당이 합당 형식으로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였는데, 제주 지역은 1945년 12월 9일 결성된 조선공산당 제주도 위원회가 서울의 좌익 정당 통폐합 흐름에 따라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 위원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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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제주에서 결성된 우익 청년 단체. 8·15 광복 이후 혼란한 사회에 봉사하고 청년 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동단결을 이루기 위해 결성되었다. 해방 후 제주도의 우익 청년 단체가 등장한 시점은 정국이 신탁 통치 찬성과 신탁 통치 반대 논란에 휩싸여 전국적으로 우익 조직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1946년 3월 대한 독립 촉성 청년 연맹 제주도 지부[위원장 김충희]가 발족되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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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7월 발족한 민족주의 정당들이 조직한 정치 단체인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의 제주 지역 단체.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는 1946년 2월 8일 기존의 반탁 운동 기관인 이승만(李承晩) 중심의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와 김구(金九) 중심의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중앙 위원회 등 민족주의 정당들이 통합하여 발족한 정치 단체이다. 줄여서 독촉 국민회라고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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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제주도에서 결성된 좌익 세력의 통합 조직. 남한의 모든 좌익 정당 및 사회 단체를 총집결하여 과도 정부 수립에 참여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민주주의 민족 전선[민전] 제주도 위원회 결성 대회는 1947년 2월 23일 제주도 읍·면 대의원과 사회 단체 대표 315명, 방청객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읍 조일 구락부에서 열렸다. 결성 대회에서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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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제주에서 결성된 우익 청년 단체. 조국의 완전 자주 독립 전취, 균등 사회의 건설, 세계 평화의 건설이란 강령을 세웠지만, 조선의 국제 문제를 방해하는 음모자들을 제거한다는 행동 지침을 세워 좌익에 대한 척결 의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서북 청년회는 대한 혁신 청년회(1945년 10월 30일 결성)·함북 청년회·북선 청년회(北鮮靑年會)·황해도회 청년부·양호단(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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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당시 신분을 증명하는 증서. 제주 4·3 사건 당시 도피자 및 도피자 가족, 피난 입산자, 요시찰인을 제외한 일반 도민에게 발급해 준 증명서이다. 이 증명서가 없으면 통행할 수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도 없었고 좌익이나 통비분자로 의심받았다. 유격대와 이른바 통비분자, 좌익 세력 및 그 가족들을 고립시켜 다른 주민들과 구분하여 처리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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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 연미 마을에서 우익 청년단원에 의해 발생한 방화 사건. 1948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4·3 사건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무장대와 국방 경비대가 즉각적인 전투 중지를 합의하지만 5월 1일 우익 청년단원들이 제주읍 오라리 연미 마을에 불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두 진영 사이의 합의가 깨지고 만다. 1948년 4월 3일 제주 지역에서 무장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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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공원. 제주 4·3 평화 공원은 4·3 사건 발발 이후 50여 년간 해원되지 못한 4·3 사건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고 4·3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희생자의 명예 회복 및 평화와 인권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조성되었다. 제주 4·3 사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재현하여 4·3 정신과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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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제주도 의회가 제주 4·3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조직한 한시적 단체. 제주도 시·군의회와 제주 4·3 관련 단체 및 유족은 1998년 제주 4·3 50주년을 맞았지만 제주 4·3 문제 해결의 주체인 정부와 국회의 의지가 불투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99년 내에 가시적인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촉구하기 위해 제주4·3알리기 국토순례단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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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동에 있는 민간 연구 단체.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는 순수 민간 연구 단체로, 제주 4·3을 전문적으로 조사 연구하여 40여 년간 은폐되고 왜곡됐던 4·3의 역사적 진실을 밝혀 희생자의 넋을 위무하고 제주도민의 명예 회복에 기여하고자 창립하였다. 제주 공동체를 완전히 폐허로 만든 4·3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운동의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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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에 설치되었던 군 부대. 제주 4·3 사건 때 군대와 경찰에 적대 조직이었던 유격대 및 그 지원 세력을 무력으로 평정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경비대 총사령부는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도록 하고 사령관에 광주 주둔 제5여단장 김상겸(金相謙) 대령을, 부사령관에는 제주 주둔 제9연대장인 송요찬(宋堯讚) 소령을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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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제주도에 결성되었던 정치 조직. 제주도민의 역량을 민족의 자주 통일 독립과 완전한 해방을 위해 결집하여 민족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제주도 인민 위원회는 제주도 건국 준비 위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면 단위의 조직이 먼저 결성되어, 8월 말 서귀면, 9월 8일 제주읍, 9월 6일~7일 대정면 등에서 조직을 완료하였다. 9월 10일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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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 위원회의 군사 조직. 1947년 3·1 사건으로 제주도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벌어지자 정부는 응원대를 제주도에 급파하여 진압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 청년단 등에 의해 무자비한 대량 검거·구타·고문이 자행되고 남로당원이 대거 검거되는 사태가 이어지자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 위원회는 조직 자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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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설치되었던 대한민국 육군의 전투 부대. 4·3 무장봉기에 의해 무산된 1948년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는 몇 번의 연기를 거쳐 1949년 5월 10일 실시하기로 방침이 정해졌다. 이미 1949년 2월 이후 무장대 활동이 급격히 쇠퇴했지만 여전히 무장대는 존재하고 있었고, 한라산에는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 있었다. 이에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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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제주읍에 결성되었던 정치 단체. 해방 후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제주읍 지역 단위에서의 과도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1945년 8월 15일에 여운형의 주도하에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서울 풍문 여자 고등학교에서 결성되었다. 이에 해방된 조국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조바심 속에 고민하던 각 지방의 활동가들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중앙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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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에서 발생한 4·3 사건을 진압하면서 토벌대가 취한 작전. 제주 지역 4·3 사건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도의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지역을 적성 지역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 범위에 포함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소개(疏開)시키는 초토화 작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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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7일에 제주읍내에서 조직되어 활동하던 청년 단체. 한라단은 민족 반역 행위를 한 친일파들을 응징하여 우리 스스로가 질서를 세우기 위해 결성되었다. 한라단은 일본 군대 등에서 귀환한 제주 읍내 청년들을 중심으로 1945년 9월 7일에 결성되었다. 김태륜(金台崙), 김기오(金基五), 김희석(金喜錫), 고정옥(高正玉)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