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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춘화는 동김녕에서 태어났다. 당시 동·서김녕이 따로 있었는데, 바다도 동, 서김녕으로 나뉘어져 있다. 비석거리는 서김녕에 있었다. 그 곳에 사람들이 많이 다녔는데, 해녀들이 물질하는 곳과 고깃배, 여객선이 들어오는 포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녕에는 소주를 담아 파는 술도가가 있었다. 제일 오래된 수퍼로는 예전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 중간에 위치한 ‘퐁낭수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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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김녕리 장터에서 4일, 9일장이 있었다. 위치는 김녕 해녀 탈의장이 있는 넓은 앞마당이었다. 그때는 그 곳에서 물건을 많이 구입했는데, 4·3사건 이후 김녕장은 없어졌고, 그 이후에는 세화장에 가서 장을 봤다. 이 마을에는 해녀가 많다. 주로 5월 이전에는 소라를 하고, 5~6월은 우뭇가사리를 하고, 5월 말부터 10월 1일까지는 금어 기간이다. 동김녕 해녀가 현재는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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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음식은 송편, 시루떡, 빙떡, 돼지고기, 상어고기, 소고기를 쓰고, 과일은 사과, 배, 귤, 여름에는 참외, 수박, 물고기는 우럭을 쪄서 올렸다. 옥돔도 올렸다. 우럭은 제사가 많은 집은 잡아서 말려서 보리 항아리에 보관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1년 내내 보관이 가능했다. 지금은 냉장고에 보관을 한다. 설날은 메밀국수로 애들 먹이고 이걸 국수명절이라고 했다. 지금은 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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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에 처음 들어와서 살림살이를 시작할 때는 밥 먹을 그릇도 없어서 집주인에게서 빌려서 먹었다. 물질을 잘 하기 위해서 밥을 꼭 먹고 나갔다. 반찬은 주로 된장을 먹고, 밑반찬은 자리젓갈을 먹었는데 지금도 담아서 먹는다. 자리젓은 소금을 가지고 간을 잘 맞춰야 맛있다. 자리 1마리에 소금 한 되 기준으로 담았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면 힘이 많이 들어서 인삼을 많이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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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추(남편)와는 거제도 장생포에 다녀와서 26살 때 만났다. 고춘화는 일본에서 오래 살아 한국어를 몰랐는데 여기 와서 한국어, 산수를 배웠다. 처음에는 한국어로는 자신의 이름도 못썼다. 한국어를 배우러 가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이 선생님이었고 실제 결혼하기 전에는 중매를 섰다. 중매쟁이가 와서 좋은 말로 설득해서 이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결정을 하고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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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공원은 마을 주민들이 재해를 막고 마을 경관을 미화하자는 의견을 모아 조림 계획을 수립하여 체계적으로 나무를 심은 인공림이다. 따라서 이곳 금산 공원에서는 방목·벌목 등을 절대 금지해 왔다. 이곳의 명칭은 원래 나무를 보호한다는 의지를 담아 금산(禁山)이라 하였는데, 수백 년 동안 철저히 보호 관리한 결과 난대림을 비롯하여 다양한 종의 수목이 자라났다. 그 결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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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4.11(양) 제주도 북제주군 동김녕리 1234번지 출생 1940 김녕국민학교 입학 1944 한영중학원 졸업 1944~1952 제주도 어업조합 서기 1952~1960 김녕중학교 서무주임 1962~1965 제주어업협동조합 구좌지소장 1966~1980 천연기념물 제98호 김녕굴 및 만장굴 관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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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당시 태몽이나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별로 없다. 이름은 선친이 지어주셨다. 보통 이름에 하늘천(天) 자를 잘 쓰지 않고 보통 일천 천(千) 자를 쓰는데, 선친이 이름을 지을 때 하늘 천 자로 써주었다. 선친께서 나의 이름을 높게 지어 주었고 이름 덕분인지 살아오면서 해온 일들이 잘되고 덕분에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주변에서 다 내 이름이 좋다고 이야기 한다. 부모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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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0월 초, 김녕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그 사람들 가운데 지휘봉을 잡고 사람들의 동선을 가리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군천이다. 이상은 『한라일보』의 기사에 실린 그의 모습을 묘사한 기사 내용이다. 그는 사굴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김녕 마을에 예로부터 내려오던 “멸치 후리는 노래”를 연출하여 제1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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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 당시인 1968년에는 사굴 주변이 모래밭이었다. 그때 방 한 칸짜리 초가집을 짓고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굴을 개발하고 주변에 변변한 먹거리가 없었던 1974년도에 “사굴옛집”이라는 제주도 고유의 음식점을 개점하였다. 여기에서는 빙떡, 오메기떡, 새미떡, 인절미, 침떡과 같은 떡 종류와, 갯나물, 두릅, 고사리와 같은 채소류, 미역채, 톳채 등 해조류, 그리고 깨죽, 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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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에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집에 보관되어 있는 오래된 물건들(해녀 잠수옷, 해녀 물질할 때 필요한 도구 등의 자료)이 있으면 가지고 오라고 해서 역사관이 시작되었다. 초창기에는 이러한 물건을 학교 측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역사관이 만들어지고 나서 제대로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현 교장 선생님이신 김경식 선생님의 노력으로 이 역사관은 빛을 발하게 되었다. 역사관을 방문한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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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은 해안가에 있는 마을이다. 제주시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30㎞를 달려가면 김녕마을을 만나게 된다. 기온은 연평균 약 11.8C, 평균 강수량은 1,444㎜로 제주특별자치도의 평균 기온 및 강수량에 조금 못 미치고 있다. 이는 차가운 바닷바람과 강한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제주도에서 보기 드물게 하천이 없어 마을에 다리가 없는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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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읍의 지명에 대한 설화는 인장묘발지지(寅葬卯發之地), 당릉(唐陵), 열희을 등에 관한 것이 전해진다. 주로 인재가 많이 나오는 곳이라는 점, 당나라의 태자가 이곳에 와서 불로초를 구했다는 전설, 그리고 여우의 여자되기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 마을 주민들은 이에 대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세히 알고 있는 분이 없다. 마을의 내력을 자세히 알기 위해 『납읍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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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읍리의 행정구역상 명칭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이다. 제주시에서 남서쪽으로 지방도 1136번 도로를 따라 약 30㎞ 떨어진 곳으로, 동경 126°19′53″, 북위 33°26′9″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제주도의 일반적인 마을 입지는 해변마을, 중산간마을, 도시마을로 나뉜다. 그 중에서 중산간마을이란 한라산이 만들어낸 오름 분지 근처에 형성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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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가정별로 울타리 안에 모셔지는 신에 대한 신앙을 가정 신앙 또는 가신 신앙이라 한다. 집안에 모셔지는 신들은 성주·문전·조왕·토지신 등이 있다. 납읍에서 주로 지내오던 가정 신앙으로는 집을 신축했을 때 행해지는 성주풀이, 제사를 지낼 때 문전신을 위한 문전제, 집안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토신제 등이 있었다. 납읍리사무소에서 동서쪽에 사는 유태병(1936년생) 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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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읍에는 4·3사건과 6·25의 잔재로써 놀이 문화로 어린이들이 즐겨하던 놀이가 바로 탄피놀이다. 4·3사건 때 폭도를 토벌하기 위해서 쓰여 졌던 탄피와 6·25 전쟁 때의 탄피가 납읍 마을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아이들이 이것으로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고 양의철(1947년생) 씨는 이야기한다. 그는 국민학교 4~5학년 정도에 많이 했던 놀이였다고 하며 양의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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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는 신령을 모신 곳을 본향당이라고 부르며, 줄여서 '당'이라 하기도 한다. 이곳 할망당의 신은 소길 장전의 정씨 부인으로, 가지 갈라온 송씨 할망이라 한다. 집안의 아이들이 아플 때, 혹은 집안이나 마을 공동의 소원이 있을 때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신목인 팽나무가 부러진 밑둥에 고인 물을 어린이들의 종기(허물), 피부병에 발랐더니 약효가 있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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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읍리의 유교는 종교라기보다 일상생활의 규범과 예절로서 내려오고 있다. 가까운 집안끼리는 물론이요 이웃이나 향인 중에 관혼상제나 기타 큰일이 닥치면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여 위문과 경축을 주고 받으며 서로 협조하였다. 제주도에서도 유교적인 특성이 가장 강한 지역이어서 납읍리에서 매년 거행되는 마을 포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잘 보존되고 있다. 납읍마을에는 일상생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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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납읍리 김태범 이장으로부터 마을 내 조직과 경제활동에 대한 설명들을 들을 수 있었다. 2007년 현재 마을에는 노인회, 청년회, 부인회, 목장조합, 감귤조합 등의 마을 단체가 존재한다. 2007년 9월 현재 실질적인 마을의 살림살이는 리장(제주도에서는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과 리사장이 이끌어가고 있다. 특히 마을에 거주하는 노인의 비율이 인구 대비 40%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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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름의 연원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유래가 있으나, 역사적인 근거를 다 찾을 수는 없다. 예를 들면 곽남이라는 다른 지명이 있는데, 이는 곽지남동(郭支南洞) 또는 곽악(郭岳) 남쪽에 위치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으로 해석된다. 곽남이라는 다른 이름이 오랜 세월 구전되면서 점차 와음(訛音)이 되어 과납(科納)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광해군 원년(1609)에 판관 김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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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읍의 마을 주변 지세가 지닌 풍수적 관점을 무엇일까? 사실 주민들 중에서는 이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하지만 『납읍 향토지』에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나온다. 즉 마을의 지세로 보아 고내봉은 마을을 향하여 서 있으니 신관을 맞이하는 형이요, 곽지봉은 북쪽을 향하여 돌아서 있기에 무관을 배웅하는 형국이며, 곽지봉의 형국이 마을로 이어져 어사화를 꽂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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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읍 향토지』에 수록된 납읍 향사 기록에 따르면, 애월읍 납읍리에 사람들이 정착해서 마을을 형성한 시기는 고려 충렬왕 26년(1300)경, 지금으로부터 약 7백 년 전으로 추정된다. 조선 태종 16년(1416) 안무사 오식의 계청에 의하여 산북을 제주목으로 하고 목사를 두게 되었는데 납읍은 제주목 산하의 곽남이 되었다. 이 곽남이라는 마을명이 와음이 되어 과납으로 통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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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오름 한가운데 위치한 무덤이다. 당나라 태자 일행이 이곳에 왔다가 태자가 죽으니 거기에 장사지낸 것으로 전해지는 곳인데, 이 마을에서 제일 오래된 무덤이라 한다. 당의 태자가 이 마을에 온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설에는 그들이 불로초를 캐러 왔었는데, 그 당시 그들이 이 마을에 올 때 가지고 왔던 물건들을 탐낸 마을 사람들이 죽여 버렸다고도 한다. 객지에서 죽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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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마을 사람들의 노력은 “학교살리기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또 다른 또다른 노력의 결과로 『납읍 향토지』가 발간되었다. 『납읍 향토지』의 발간은 18명의 편집위원회가 주무를 맡았는데, 집필에만 4년이 걸렸고, 납읍 주민들과 편집위원들이 10개월 이상 교열 및 교정 작업을 하여, 장장 5년만에 결실을 맺었다. 이 책에는 납읍마을의 역사와 삶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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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읍에서 열리는 유교식 의례인 마을 포제는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을 받았다. 이 때문에 납읍은 유교적 전통이 살아 있는 마을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한편 포제가 열리는 장소는 납읍의 자랑인 금산공원인데, 이곳의 난대림은 1993년 8월 19일 천연기념물 제 375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금산공원은 납읍초등학교의 현장학습을 위한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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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물은 납읍 마을 북쪽 1796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납읍에서 어음으로 넘어가는 국도변인데, 크기가 약 380평에 달한다. 사장물이라는 호칭은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는 ‘사장(射場)’에서 비롯되었다. ‘사장(射場)’은 옛 선조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활터를 가리킨다. 사장물은 제주에서 제일 크고 깊은 봉천식수대지(奉天食水大地)로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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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희을’은 바리매 오름 뒤쪽에 위치해 있는데, 밤마다 사슴이 와서 질퍽질퍽한 흙에 성기를 꽂았다고 한다. 소길 사람 박 씨는 그 말을 듣고 사슴을 잡으려고 활을 준비하여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 동쪽에서 우는 아기를 업은 여자가 가까이 오더니 “이놈의 아들 여기 왔구나. 집이 불타고 세간이 없어져 못 살게 되었는데도 한가히 여기 와서 사냥만 하고 있느냐”하고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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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병 노인회장은 1936년생이고 고향은 납읍리이다. 출생 당시 부모님께서 꾼 별다른 태몽은 없었고, 본인 또한 특별하게 출생과 관련된 기억은 없다. 유태병의 어머니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납읍리 안에 계시던 작명하는 분이 지었다. 그는 어린 시절 별다른 일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다만 그의 아버지가 치료를 위해 약을 먹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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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조, 콩, 보리, 고구마를 재배했다. 납읍은 제주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 토질이 좋아서 그나마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이 먹는 일상식으로는 쌀밥은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살림이 어려워서 “시집가는 처녀가 결혼 전까지 쌀 한말을 못 먹고 시집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살림살이다. 납읍은 중산간 마을이지만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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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으로 환금작물을 재배했고, 국가에서 이것들을 전량 매수해 줘서 살림살이가 많이 좋아졌다. 유태병이 36세 때 집을 지었다. 결혼 후 15년 정도 지난 때로 1970년대 초반이었다. 30~40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읍사무소에서 설계를 제출하라고 했고, 30평 이하는 표준설계에 맞추어서 집을 지었다. 유태병의 집은 전체가 20평 정도 된다. 마루, 부엌, 방 3칸이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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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흥덕은 납읍에서 두 번째로 등과한 사람으로 벼슬이 옥당에까지 이르렀다. 그 때에 육지에서 온 진거사라는 사람이 변흥덕을 뵈러 왔다가 꿩장이동산 뒤에 있는 인장묘발지지(寅葬卯發之地. 원래는 인장묘발복지지:인시[寅時]에 장[葬]하면 卯時[묘시]에 발복[發福]하는 좋은 산터)를 변흥덕의 신묘지지로 봐주었다. 그런데 변흥덕의 집에는 강 씨 성을 가진 머슴이 어미와 함께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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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북제주군 장전리 출생 -1950년 4·3사건으로 용흥으로 이주 -1956년 구엄초등학교 -1961년 서울에서 직장 생활 -1965년 부산에서 직장 생활 -1970년 납읍에서 결혼 -1971년 납읍에서 축산업과 농업으로 정착 -1972년 첫째(현진) 출생 -1974년 둘째(은지) 출생 -2001년 북제주군 민요 기능 보유자 심사 -2004년~05년 납읍리 부녀회장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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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7호 진사대 소리 전문가) 진선희는 1945년 3월 23일생이다. 출생지는 애월읍 장전리이다. 1948년 4·3사건 이후 용흥에서 자랐고 구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라서 진선희가 어릴 때는 여자들은 학교에 잘 안 보냈다. 진선희는 스스로 한글을 터득했고, 책읽기를 너무 좋아해서 밤새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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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로서의 의무로 진선희는 소리를 전수해야 한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교육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사무실이 없다. 진사대 소리는 쉬운 노래가 아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있는데 전수자로 들어오기 어렵다고들 한다. 진선희는 제주도의 동, 서쪽 소리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즉 문화적으로도 서쪽 사람들은 아주 순수하고 뭐를 하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살아가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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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앙 부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측에 크게 큰못과 새못이라고 부르는 못이 있었다. 예전에는 지금과 같이 기저에 수도가 가설되지 않아 주민들이 여름에 공동으로 이용할 목욕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큰못에는 공동 노천 여자 목욕탕을, 새못에는 공동 노천 남자 목욕탕을 설치하여 활용하였다. 이 못은 마을 주민들이 직접 땅을 파서 조성한 못이다. 주민들이 먹는 물로 사용하였던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