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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 지역에서 혼례 전날 친족들이 잔칫집에 모여서 음식을 준비한 후 나누어 먹는 음식. 혼례 전날 친족들이 잔칫집에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일을 돕고 나서 주연(酒宴)을 벌이는 가문잔치는 제주도 특유의 혼속(婚俗)이다. 부계친(父系親)과 모계친(母系親)이 가문 잔치에 참여함으로써 친척 사이의 유대는 더욱 끈끈해진다. 가문 잔칫날에는 친척뿐 아니라, 가까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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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에서 결혼 전날 신랑·신부집에서 친지들이 모여 치르는 잔치. 예전부터 제주도는 잔치 기간이 3일이었다. 결혼식 하루 전날을 ‘가문잔치’라 하고, 결혼식 다음날을 ‘사돈잔치’라 했다. 신랑 신부 각자의 집에 가문(家門)인 친척만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잔치하는 것을 이른다. 결혼식 이틀 전 날은 돗(돼지)을 잡는다. 제주도에서는 결혼피로연에 반드시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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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11월 29일(양력) 김태준의 5남매 중 큰딸로 태어남 - 1940년 서부유치원 졸업 - 1941년 제주북초등학교 입학 - 1945년 제주북초등학교 재학 때 광복을 맞이함 - 1947년 제주여자중학교 입학 - 1950년 한국전쟁으로 대학진학이 좌절됨. 교원양성소 진학 - 1951년 초등학교 교편생활 - 1954년 은행원이 됨 - 1955년 3월 김홍식과 약혼식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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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심의 부친 김태준은 법원 서기로 출발해서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한 후 제주도로 내려와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변호사로 일생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법원 사무원이었고 광복 후에 사법제도가 바뀌면서 법관이 부족하니까 임시 법관 후보 시험이 있었다. 그 시험에 합격해서 판사가 되었다. 서울법원에 시보로 있다가 4·3사건 때는 서울에서 근무했고 그 후 제주도로 내려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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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심은 1941년에 제주북소학교에 입학해서 5학년 때 광복되었다. 제주북소학교는 남녀반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남자는 2학급, 여자는 1학급이었는데 광복 후에 일본에서 고향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학생수가 많아졌다. 1, 2반은 정상적인 취학생들이고, 3반은 나이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한 학급은 남녀혼성반이었다고 한다. 김금심은 김홍식처럼 제주북국민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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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관아를 ‘영’이라 불렀고,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 사이에 있는 골목 일대를 ‘영뒷골’(영의 뒤쪽에 있는 골목이라는 뜻임)이라 한다. 처음에는 ‘영뒷골’에 살다가 태평양전쟁이 한참일 때 집을 지어서 이사했다. 김금심은 4·3 때 여중생이었고 북교 후문 전신전화국 사택 근처에 살았다. 그 당시 이 근처는 주택가가 아니었다. 묵은성에도 농사짓는 밭들이 있었다. 주로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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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심은 1955년에 약혼식을 했는데 신랑집에서 한복 한 벌, 금반지(쌍가락지)와 시계를 받았다. 시아버지와 친척 몇 분을 신부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했으며, 이것이 약혼식이었다. 이날 사주단자도 갖고 온다. 그 해 가을로 결혼날짜를 잡았는데 영장이 나와서 한 2년 미뤄졌고 은행원이어서 직장생활을 했다. 김금심이 결혼할 때 시댁친척들한테는 버선 한 켤레가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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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심은 제주여중 4학년(중고등학교 통합 학제임) 때 교원양성소에 들어갔다. 교원양성소는 지금 제주교육대학교 전신이다(교원양성소→사범학교→교육대학). 당시 교사는 동광양에 있는 기와공장에서 운지당(동문시장 골목을 올라가면 있음)으로 옮겼다. 교원양성소에서 한 6개월 교육을 받으면 준교사자격증을 주었고 교생실습도 했다. 김금심은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후 도두국민학교 교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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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5월 11일(양) 제주시 아라동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남 - 1935년 제주시 일도동으로 이사함 - 1938년 제주북초등학교에 입학함 - 1944년 광주서중학교에 입학함 - 1950년 5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함 - 1954년 10월 제주신성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함 - 1955년 약혼식을 하고, 군에 입대함 - 1957년 3월에 결혼식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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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은 삼도2동에 살았지만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적으로 마을의 자생적인 단체나 조직에 들어갈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로터리클럽 회원으로 가입해서 한 20년 가까이 활동하다가 나이도 들고 젊은 사람들의 활동에 맞추기도 어려우니까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만둘 시기도 되어서 5년 전에 그만두었다. 로터리클럽에 가입하게 된 동기는 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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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金洪植)[1929. 5. 11.(양)~, 78세]은 1929년에 제주시 아라동에서 태어났지만 북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이도동으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1957년에 결혼하면서 지금까지 묵은성에서 살고 있다. 슬하에 3남매(2남1녀)가 있으며 1957년부터 1995년까지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2005년에 『삼도2동마을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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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제주농업학교는 일본사람은 무조건 합격하고, 한국사람은 시험을 보는데 각 처에서 왔다고 한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완도, 진도, 영안 등지에서 입학하러 왔었다. 그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에 중등교육기관이 없었고 제주도에 을종(나중에는 5년제 갑종으로 승격했음)인 농업학교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모집 정원도 농과·축산과 해서 120명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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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시대에는 농가에서 음력 8월 1일부터 8월 15일 추석 전까지 대부분 벌초를 했던 풍습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추석이 8월 15일이니까 벌초는 원칙적으로 8월 1일부터 시작했다. 너무 일찍 벌초를 해도(여름철이어서) 풀이 많이 자라거니와 농경시대에는 이 시기가 농한기에 해당하니까 모여서 벌초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몇 대조 할아버지 자손들이 모두 모이면 수십 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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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제주시의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고 한다. 즉 제주시에서 돌아다닐 만한 곳이 많지 않아서 칠성통(제주중앙우체국 동북쪽에서 동문로터리 서북쪽 일대 상가를 가리킴)에 있는 음식점(그 당시 유명한 음식점은 동해식당;송대장 손자가 경영했음)에 가서 음식을 먹거나 빵집을 이용하기도 하고 탑동(지금은 매립되어서 바닷가를 거닐 수 없음)이 제주시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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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은 1954년에 대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고향인 제주시에 왔다. 1954년 10월쯤에 신성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10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1955년에 입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1957년 10월에 제대하고 제주대학교 시간강사를 하면서 다시 신성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몇 달 겸직했다고 한다. 1957년 제주대학에 시간강사로 1년 정도 근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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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혼례와 상례 때 모든 의식을 총괄하는 감독관. 현재는 돼지고기를 관장하는 사람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 도감을 했던 장인들은 거의 사망했고, 1960년대부터는 장인 도감이 아니라 품앗이 도감으로 변형되었다. 도감은 원래 남자만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여자도 하고 있다. 의례 음식 중 돼지고기를 관장하는 장인으로 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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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 지역에서 해녀들이 물질을 하면서 옷을 갈아입거나 쉬던 장소. 불턱은 일종의 탈의실인데 해녀들이 물질을 하면서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쬐며 쉬는 곳으로 공동체의식을 나누는 공간이다. ‘화톳불’과 그 의미가 유사한데, ‘불[火]’은 글자 그대로 불씨를 뜻하며 ‘덕’은 ‘불자리’를 뜻한다.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때기에 알맞도록 남의 눈에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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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노처녀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속담. 옛 사람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혼인을 하고 후손을 낳아 대를 이어야만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으면 덜 떨어진 사람 취급을 했다. 특히,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을 안 하거나 못하고 있으면 집 안 어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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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중매 결혼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속담. 제주 지역 역시 육지와 마찬가지로 혼담이 어느 정도 성사되면 여자의 사주사주를 남자 쪽 집으로 보낸다. 궁합을 보고 혼인날을 정하는 것은 모두 남자 쪽 집 안에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 여자 쪽 사주를 중매인이 가져오는 것을 “주를 빌어 온다(사주를 빌려 온다).”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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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은 제주도에는 설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설이라는 말 대신 멩질(명절)이라고 하는데, 과거에 행정당국에서 양력설을 강요하면서 양력설을 많이 지내고 음력설을 의도적으로 하지 못하게 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오히려 설이란 음력 정월초하루로 인식하고 양력으로 1월 1일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김금심은 설음식을 특별히 준비했다. 남편(김홍식)이 대학교수여서 세배꾼(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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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입춘과 관련하여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는 금기 속담. ‘샛절’은 입춘의 제주방언이다. 지역에 따라 ‘새철’이라고 하는 입춘은 새로운 절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요즘은 ‘샛절 드는 시간’만 피하면 된다면서 많이 관대해졌지만, 대체로 이 날 제주 지역 여자들은 하루 종일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샛절 드는 날 여자가 놈의 집에 가지 말라”는 속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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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쇠똥 꿈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속담. “쉐똥 꿈 꾸민 소망인다”는 꿈에 쇠똥이 보이면 재수가 좋다는 의미의 속담이다. 주로 물질을 하는 해녀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속담으로, 쇠똥의 생김새가 전복과 비슷해서 쇠똥이 꿈에 보이면 전복을 많이 캘 수 있는 길몽으로 여긴다. 사람은 보통 현재 자신의 처지나 희망 사항, 직업과 관련한 꿈을 많이 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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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제사 음식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속담. “시리떡 칠 때”는 주로 제사 음식을 만들 때 많이 쓰는 속담으로, 시리떡을 만드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서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예부터 지역을 막론하고 시리떡(시루떡)은 제사상에 꼭 올리는 음식이어서 정성을 다해 만들어야 했다. 시루떡을 찌려면 먼저 솥에 시루를 얹은 뒤 솥 안의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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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사용하는 아기 요람. 애기구덕은 제주도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아기를 그 속에 눕히고 흔들어 잠재우는 요람이다. 주로 3살 전후까지 사용한다. 주로 대를 쪼개 만드는 애기구덕은 장방형으로 높이가 50~60㎝, 폭 30~40㎝, 길이 1m 정도로 중간에 끈으로 엮어 통풍이 쉽게 되도록 하고 오줌을 싸도 아래로 흐르게 하였다. 내부는 높이 중간 정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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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여성의 외모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속담. “얼굴 곤 거 속 궂나”는 주로 신부 감을 구할 때 쓰이던 속담으로, 얼굴이 고운 사람은 마음 씀이 좋지 않다는 의미이다. 남자들은 신부 감을 고를 때 가장 먼저 외모를 본다. 얼굴이 예쁘면 마음도 예쁠 것 같지만, 문제는 외모와 마음가짐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쁘면 우쭐대고 자만하여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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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여성의 행동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속담. “여자 놉뜨지 말라”는 여자는 날뛰지 말라는 뜻으로, 지금도 제주 전역에서 쓰이는 속담이다. 여성스러움을 미덕으로 강조하는 “여자 놉뜨지 말라”와 같은 속담은 여성의 사회 활동을 경계하거나 억제하려는 일종의 경고로서, 속담이 단절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것은 속담의 내용을 전승자 집단이 동의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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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여성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속담. 원래 옷이란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말려야 깨끗하게 소독이 된다. 특히 속옷은 예나 지금이나 햇볕에 바짝 말려서 입어야 건강에 좋다. 그런데 “여자 속옷 울담에 널지 말라”는 속담에는 여자들의 속옷을 햇볕이 잘 드는 울타리가 아닌, 남들(남자)이 보지 못하는 은밀한 곳에서 널어 말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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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새해 맞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속담. 요즘에는 집집마다 상수도 시설이 설치되어 있어서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예전에는 아침저녁으로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오는 것은 나이를 불문하고 여성들의 몫이었다. 제주 지역에서는 물을 긷는 데 사용하는 물동이를 ‘허벅’이라고 부른다. 옛 사람들은 새해맞이를 위해 섣달그믐(12월 31일)까지는 집 안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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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2동은 제주시의 중심지로서 제주목 관아가 있는 곳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정치·문화 일번지라 할 수 있다. 삼도2동에는 우체국, 시청청사, 법원, 중앙의원 등 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제주도의 주요한 관공서가 있었던 곳이며, 상권이 번창했었다. 그러나 제주시의 시가지 개발에 맞물려서 1980년대 중반부터 인구이동이 나타나면서 상권이 쇠락해졌다고 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