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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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薯童-善花公主- |
영어공식명칭 | The Love of Seodong and Princess Seonhwa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
시대 | 고대/삼국시대/백제,현대/현대 |
집필자 | 박세인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1년 -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익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익산시사』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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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연동마을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
관련 지명 | 미륵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서동|선화공주 |
모티프 유형 | 어리석은 남성과 지혜로운 여성의 사랑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전하여 내려오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과 미륵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
[개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삼국유사(三國遺事)』[1281] 「기이(紀異)」편 무왕(武王)조의 기록과 거의 동일한 이야기이다. 서동(薯童)은 백제 무왕(武王)[?~641]의 어렸을 적 이름이고, 선화공주(善花公主)는 신라 진평왕(眞平王)[?~632]의 셋째 딸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크게 서동과 선화공주의 혼인, 서동의 왕위 등극, 미륵사(彌勒寺) 창건 등 세 가지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서동과 선화공주가 혼인에 이르게 된 이야기 속에 「서동요(薯童謠)」로 알려진 향가가 함께 전한다. 미륵사를 창건한 장소로 언급된 용화산(龍華山) 아래는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일대를 말한다. 이와 같이 미륵사와 익산시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인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익산 지역에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2001년에 익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익산시사』에 수록되어 있다. 『익산시사』에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과 유사한 서사 구조를 갖추고 동일한 모티프를 활용한 「마동이와 오금산」, 「마동이와 선화공주」 등의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다.
[내용]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과부였던 어머니가 집 근처 연못에 살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고 전한다. 마를 팔아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장을 ‘서동[마동]’이라 불렀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하여 신라 경주로 들어갔다. 서동은 경주에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고 친하여진 다음, 선화공주와 친밀한 관계를 암시하는 노래를 가르쳐 주고 불러서 퍼뜨리게 하였다. 서동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던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얼러두고 맛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아이들이 부른 노래가 온 나라 안에 퍼지고 신라 왕실에까지 알려지자, 많은 관료들이 선화공주를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다. 선화공주가 귀양지로 향하는 도중에 서동을 만나 관계를 하였는데, 정을 통한 후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아이들이 부른 「서동요」의 영험함을 믿게 되었다. 서동과 함께 백제로 온 선화공주가 생계를 위하여 대궐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 놓자, 서동은 마를 캐던 산에 쌓아 놓은 황금을 선화공주에게 보여 준다. 서동과 선화공주는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 지명법사(知命法師)의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의 궁중으로 금을 옮겨 놓는다. 이 일로 서동은 진평왕의 신뢰와 인심을 얻었고, 후일 백제의 왕이 된다. 왕이 된 서동과 왕비가 된 선화공주와 어느 날 사자사로 가던 도중에 용화산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과 만났다. 왕비가 연못 자리에 큰 절을 세우기를 원하자, 왕이 허락하여 다시 지명법사의 도움을 받아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신라 진평왕이 기술자들을 보내 미륵사 창건을 도왔는데, 미륵사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익산시사』에 실린 서동과 선화공주의 또 다른 이야기인 「마동이와 오금산」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과 서사 구조는 유사하다. 다른 점은 서동 대신 ‘마동(麻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이한 출생담을 가진 서동과 달리 마동의 출생담에 대하여서는 특별히 기술된 내용이 없다. 또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와 익산 지역을 강하게 연결시킨 요소였던 미륵사 창건 설화가 빠져 있다. 대신에 금마[지금의 익산시]의 서쪽에 있는 오금산(五金山)을 서사의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홀어머니를 위하여 오금산에 오금사(五金寺)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마동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부각되고 있다.
『익산시사』에 「마동이와 오금산」에 이어 수록된 「마동이와 선화공주」는 앞의 두 이야기에 비하여 서사 구조가 상대적으로 간결하다. 가난하고 미천한 마동이 선화공주와 혼인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고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는 단순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모티프 분석]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의 주요 모티프는 ‘어리석은 남성과 지혜로운 여성의 사랑’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국경과 신분을 초월하여 사랑을 쟁취한 ‘ ’사랑 성공담’이자, 현명한 여성의 도움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는 ‘입신출세담’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모티프를 활용한 이야기로는 고구려 설화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이 대표적이다. 서동은 인간과 용의 결합이라는 신이한 출생담을 가졌으나, 왕 혹은 영웅이 되기에는 과부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마를 팔아 생계를 꾸려야 하는 경제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선화공주라는 여인을 만남으로써 서동의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된다. 선화공주는 신라 왕의 딸로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혼인은 서동이 가진 신분적 결핍을 해소시켜 준다. 또한 서동은 황금을 쌓아 두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알지 못 하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남자였다. 그러나 선화공주에 의하여 황금의 가치를 깨달음으로써 경제적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 백제의 왕으로 등극하여 최고의 신분으로 상승한 것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고 현대에도 사랑을 받는 이유는 사랑과 성공이라는 대중들의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를 갖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