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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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市場 |
영어공식명칭 | Market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승현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재화와 용역이 거래되는 장소.
[개설]
시장은 상품이 거래되는 오일장, 상설 시장, 백화점 등을 지칭한다. 시장은 상설 시장과 정기 시장으로 구분된다. 상설 시장이란 특정한 건물 안에서 항상 상품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시장이다. 정기 시장이란 특정 구역 안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이다. 이처럼 상품교환의 발생 빈도에 따라 정기 시장과 상설 시장으로 구분된다.
[역사]
익산시의 시장은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한 때부터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장은 주로 사람이 많이 모여 살던 취락이나 철도, 하천, 수로(水路) 등 교통과 운송 수단이 용이한 지역에 발달하였다. 과거에는 나루터와 포구를 중심으로 취락이 발달하였고,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다. 1910년대 우리나라 상공업은 가내수공업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고을에 정기 시장이 서고 보부상의 활동도 활발하였지만 농수산물이나 생필품 거래가 고작이었다. 1900년대 초에도 이리[현 익산]는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었다. 자연스럽게 김제, 옥구 등 이리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 각종 물품들을 거래하고 농기구를 판매하는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렸다. 익산시에 이러한 시장이 언제부터 열렸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된 후인 1927년에는 야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야시장은 평소에는 1,000여 명이, 정월과 대목에는 1만여 명이 모이는 규모를 자랑하였다.
농번기의 솜리[이리] 우시장은 인근 지역에서도 이름 있는 시장이었다. 또한 익산시 목천포에도 시장이 있었는데, 목천포는 1920년대 목천교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만경강의 주요 나루터였으며 음력 1일과 5일에 수산시장(水産市場)이 정기적으로 열렸다. 당시 목천포에는 만경강에서 서해 어선들이 활발히 드나들었으며, 수로를 이용하여 농수산물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제수문(制水門)이 설치되고 토사가 쌓여 과거 목천포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익산시는 일제 강점기 때 호남 수탈의 핵심지역이 되면서 철도가 생기고 현 중앙동 지역에 교통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상업도 발전하였다. 구시장[남부시장]과 영정통에는 많은 상점이 들어섰다. 현재도 익산의 시장은 전라북도 내에서 규모가 큰 시장으로 통한다.
교통이 발달한 취락 외에도 특정한 목적이나 기능을 가진 취락이 있다. ‘종교촌’, ‘향교촌’, ‘군사촌’, ‘아파트촌’ 등이다.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서촌마을, 익산시 황등면 황등리 시남마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옥동마을, 익산시 함열읍 와리 하시상마을, 이리 구시장과 북부시장 주변의 취락은 시장이 열리는 시장촌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익산군 내 시장 현황[1927년]을 살펴보면 당시 익산군에는 이리시장, 목천시장, 황등시장, 함열시장, 금마시장, 광산시장, 웅포시장이 있었다. 해당 통계에 따르면 이리시장의 1년 동안의 거래액은 총 55만 3354원이었다. 해방 당시 1만 원이 현재 10억 원의 가치에 달한다는 계산도 있으니, 당시 이리시장의 거래 규모는 현재의 기준으로 봐도 매우 큰 것이었다. 반면 이리역 주변의 땅은 한적한 벌판이었고 일본인은 이를 헐값에 사들여 신시가지를 만들었다. 일본인들은 총독부의 힘을 빌려 이 신시가지에 각종 기관들을 이전시켰다. 그리고 전기와 수도시설을 집중시켜 혜택을 누리는 반면 조선인의 접근은 막았다. 철도를 부설하고 전기와 수도공사를 하였던 비용은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차입한 돈이었다.
각종 기관들이 이전하며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에 따라 각종 상점들이 들어섰다. 일본인들의 상점에는 화려한 일본 상품들이 판매되었다. 조선의 재래시장에서는 포목, 한지, 유기 등 국산품이나 농수산물이 거래되고 있었으니, 일본 상가에 비하면 발전의 여지가 부족하였다. 더구나 불경기로 일본 본토에 쌓인 재고 상품을 군산항을 통하여 호남 지역으로 들여와 비싼 값에 팔았으니 재래시장은 수탈의 대상으로 역이용당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재래시장이 정상적인 시장 조직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면 일본의 상업자본과 고리대금업에 의한 수탈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재래시장을 무질서하게 만들 속셈으로 우리나라의 재래시장을 확대하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조선의 재래시장은 1911년 1,084개에서 1938년 1,458개로 증가하였다.
한편 일제 강점기 익산의 시장은 만세 시위의 핵심지역이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대한민국의 온 겨레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익산에서도 3월 3일 만세 시위를 하였으나 큰 규모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후 1919년 4월 4일 남부시장에서는 만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은 전개하는 측과 진압하려는 측 모두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4월 4일의 만세 운동은 당시 전라북도에서 성공한 첫 번째 만세 운동으로 기록되었다.
[현황]
익산시에는 10개의 시장이 있다. 남부시장, 중앙시장, 북부시장, 동부시장, 신동시장, 신중앙시장, 황등시장, 여산시장, 금마시장, 함열시장이다. 황등시장, 여산시장, 금마시장, 함열시장은 5일장이 열리는 정기 시장이다. 중앙시장이 점포 수 174개로 가장 많으며, 여산시장이 점포 수 6개로 가장 적다. 금마시장은 점포 수 29개로, 여산시장 다음으로 적다. 함열시장은 개설 연도가 1902년으로 익산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다. 그러나 행정 절차에 의해 등록된 연도이며, 실제로는 1914년부터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 외에도 행정 절차상 등록 연도와 실제 형성 시기가 다른 시장이 존재한다.
최근 대형마트 등 주거지역 근처의 상점이 많기 때문에 전통시장이 쇠퇴하고 있다. 지속적으로 손님이 감소하고 상인도 감소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익산시청은 청년 상인 유입을 위해 창업 지원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나아가 중앙시장, 매일시장, 서동시장이 함께 ‘야시시·으시시·배시시’’라는 이름으로 야시장을 개장하는 등 시장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