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715
한자 文鏞祺
영어공식명칭 Moon Yongki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8년 5월 19일연표보기 - 문용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 - 문용기 이리 장날 만세 시위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19년 4월 4일연표보기 - 문용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48년 - 순국열사 문용기 3·1운동 기념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문용기 건국포장 수훈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문용기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출생지 오산리 -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오산리 -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 지도보기
활동지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문용기(文鏞祺)[1878~1919]의 호는 관제이며, 아버지는 문윤재이다.

[활동 사항]

문용기는 1878년 5월 19일 지금의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 관음마을에서 태어났다. 1901년 군산의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하였고, 1907년 전라남도 목포에 있는 왓킨스학교에 교사 겸 학생으로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911년 왓킨스학교를 마치고 함경도 갑산의 금광에서 미국인 통역으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급하게 짐을 꾸려 고향 익산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익산군 오산면[현 익산시 오산면]에서도 큰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오산면은 3월 26일에 펼쳐졌던 만세 시위로 인해서 일본군 제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며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용기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서정만(徐廷萬)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만나 4월 4일 이리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 무렵 이리장터에는 기독교인과 학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이 모였고, 일행은 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시장에 나와 있던 군중들이 합세하여 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당황한 일본 헌병대가 행렬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시위 군중의 만세 소리는 더욱 커졌다. 일본군은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대지주인 오하시[大橋]의 농장 일본인 농장원 등을 동원하여 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문용기는 당시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연설하고 있는 문용기의 오른팔을 내리치자 문용기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은 왼팔마저 잘라 버렸다. 두 팔을 모두 잃은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달려가며 계속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온몸을 난자당하여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문용기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48년 3월 1일 익산 지역 유지들이 순국 현장인 이리 구시장에 순국열사 문용기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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