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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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蘇行震 |
영어공식명칭 | So Haeng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범 |
[정의]
조선 후기 익산 출신의 의병장.
[가계]
소행진(蘇行震)[?~1592]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소세득(蘇世得), 아버지는 소종선(蘇宗善)이다. 아들은 소계(蘇繼)와 소동(蘇同)이다.
[활동 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행진은 같은 금마면 출신인 이보(李寶)와 함께 의병 400여 명을 모집하고 가산(家資)을 정리하여 군량과 병기를 마련한 후 금산(錦山)에 주둔한 왜진(倭陣)으로 향하였다. 당시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여 군량미를 조달하려고 금산을 거쳐 이치(梨峙)[배티재]로 향하고 있었다. 코바야카와[小早川秀秋]가 이끄는 왜군 제6군 1만 6000여 명이 이치를 넘으려 할 때, 이에 맞서 광주목사 권율(權慄) 등이 이끄는 1,500여 명의 전라도 군사들과 소행진의 부대를 비롯한 농민 의병군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소행진과 이보는 4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온종일 수적으로 우세한 왜병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당시 소행진은 아버지의 상(喪)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상복을 입고 전투에 출전하였다고 한다. 소행진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인 소계와 소동 또한 금산전투에 참가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시 친정인 강화에 머물고 있던 소동의 아내 여흥민씨(麗興閔氏)도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조정으로부터 열녀 정려가 내렸다.
[상훈과 추모]
1783년(정조 7) 소행진은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되고 정려(旌閭)를 하사받았으며, 1843년(헌종 9)에는 현 익산시 은기동에 있는 은천사(隱泉祠)에 이보와 함께 배향되었다. 금마면 서고도리 서계마을에 소행진충신각(蘇行震忠臣閣)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