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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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蘭坡 |
이칭/별칭 | 홍영후(洪永厚),나소운(羅素雲),Y·H생(生),도례미(都禮美),도레미생(生),ㄷㄹㅁ,솔·파 생(生),ㅎㅇㅎ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철웅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3월 9일 - 홍난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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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0년 9월 - 홍난파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중학과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2년 4월 - 홍난파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3년 4월 - 홍난파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8년 4월 - 홍난파 관립 도쿄음악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26년 3월 - 홍난파 도쿄고등음악학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31년 9월 - 홍난파 미국 시카고셔우드음악학교 연구과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1월 - 홍난파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2월 - 홍난파 예술 잡지 『삼광』 창간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9월 - 홍난파 음악연구기관 연악회(硏樂會) 창설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12월 - 홍난파 미주 흥사단(興士團)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6월 - 홍난파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 때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검거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10월 - 홍난파 기소유예 처분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6월 - 홍난파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 가입 |
몰년 시기/일시 | 1941년 8월 30일 - 홍난파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5년 10월 - 홍난파 문화훈장 추서 |
출생지 |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 |
성격 | 음악가 |
성별 | 남 |
본관 | 남양(南陽) |
[정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 출신의 서양음악가.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대한제국 말기 주사(主事)를 지낸 홍준(洪埻)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홍난파(洪蘭坡)[1898~1941]는 1898년 수원군 남양면 활초리 28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명 홍영후(洪永厚), 이명으로 나소운(羅素雲), Y·H생(生), 도례미(都禮美), 도레미생(生), ㄷㄹㅁ, 솔·파 생(生), ㅎㅇㅎ 등을 사용하였다. 홍난파는 1899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였다. 1910년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중학과 재학 중 1912년 4월 조선정악전습소 성악과에 입학하며 서양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13년에는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에 입학하였으며, 1914년 3월에 중앙기독교청년회 중학과와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 4월 일본 유학을 떠나 관립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9년 3월 수료하였다. 1919년 2월 예술잡지 『삼광』을 창간하였고, 10월과 12월에는 경성악우회(京城樂友會) 음악연주회를 개최하였다. 1922년에 음악연구기관 연악회를 창설하여 음악교육, 음악회 개최, 악보집 발간, 기관지 『음악계(音樂界)』발행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6년 3월 도쿄고등음악학원에 입학하였으며, 1929년 3월 졸업하였다. 재학 중 도쿄신교향악단(東京新交響樂團)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미국 유학에 나서 미국 시카고셔우드음악학교 연구과에 입학하였으며, 유학 중 미주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1932년 6월 시카고셔우드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였고, 1933년 홍성유(洪盛裕)·이영세(李永世)와 함께 한국 최초의 실내악단 '난파트리오'를 조직하였다. 1933년 6월 14일 명치제과점 3층 홀에서 난파트리오의 첫 시연회가 있었는데, 경성의 음악인을 비롯한 사회 유명인사 70여 명이 초대되었다. 1934년 일본 빅터 축음기회사 경성지점 주임을 맡아 신민요·영화 음악·유행가 등을 작곡하였다.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근무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앞두고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을 일으켰다. 홍난파는 미국 유학시절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6월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37년 10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같은해 11월 홍난파는 자필로「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여 제출하였고, 1938년 6월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하며 '전향 성명'을 발표하였다. 수양동우회사건 전후로 지원병·징병 선전 및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노래를 작곡하고 지휘하였다. 1941년 1월 '음악의 건전한 발달과 음악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여 신체제 문화의 발달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하였다. 1941년 8월 30일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얻은 고문후유증으로 경성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작곡한 작품으로 「애수」·「봉선화」·「장안사」·「고향의 봄」·「봄처녀」·「아리랑」·「금강에 살어리랏다」·「낮에 나온 반달」등이 있으며, 저서로 『세계의 음악』·『조선 가요백곡집』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5년 10월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홍난파의 이름을 딴 난파음악상, 난파음악제, 난파콩쿨 등이 매년 난파기념사업회에서 진행하고 있다.
1937년 이후 대동민우회 가입, 전향 성명 발표, 지원병·징병 선전 활동 등을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이유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