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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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棨 |
이칭/별칭 | 신백(信伯),신곡(薪谷),충간(忠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왕무 |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화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신백(信伯), 호는 신곡(薪谷),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증조는 지중추부사 윤우신(尹又新), 조부는 교리 윤섬(尹暹), 부친은 현감 윤형갑(尹衡甲)이다. 모친은 창원 황씨(昌原黃氏)로, 관찰사 황치경(黃致敬)의 딸이다. 동생이 삼학사(三學士)의 윤집(尹集)이다.
[활동 사항]
윤계(尹棨)[1603~1636]은 1603년에 태어나, 1624년(인조 2) 21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1627년 정시 문과의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거쳐 전적·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1629년 이조좌랑, 1632년 부교리, 1635년 경상도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고, 1636년(인조 14) 남양부사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조익(趙翼) 등과 함께 경기도 중군의 병사 1천여 명을 인솔하여 남한산성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청군의 급습을 받고 34세에 순국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에는 윤계가 청군(淸軍)에게 잡히자, 꾸짖으면서 욕설을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포저집(浦渚集)』에는 남양부에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청군의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강한집(江漢集)』에는 남양이 무너지자, 윤계가 관아의 뜰 가운데로 나아가 두 기(旗)를 마주세우고 대청 위에 앉아 팔짱을 끼고 움직이지 않았으며, 청병(淸兵)이 그를 잡아 무릎 꿇으라고 핍박하자 꾸짖으며 말하기를,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은 꿇을 수 없다.” 하였다. 또한 윤계를 포박하려고 하자, “내가 비록 죽을지언정 맹세코 너를 따르지 않으리라.” 하니, 청병이 화를 내어 창으로 찔렀고, 윤계가 계속 꾸짖자 그의 혀를 자르고 죽였다고 하였다. 당시 남양의 아전 김택(金澤)·홍언인(洪彥仁)·관노 명길(命吉)·집의 종 봉이(鳳伊)가 모두 윤계를 따라서 죽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효종 대 충간(忠簡)의 시호를 내리고 이조참판으로 추증하였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1392-1번지에는 1668년(현종 9)에 세운 윤계선생순절비가 있다. 1979년 9월 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