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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378
한자 獨立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혜린

[정의]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일제의 탄압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개한 민족 해방 운동.

[개설]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는 한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응하기 위해 의병 활동이 일어났다. 1896년 김하락(金河洛)이 일으킨 이천의병에 수원·남양 지역 출신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1907년에는 농민군을 기본으로 하여 경기도 서남 지역의 동학농민운동 잔존 세력, 남양만 일대의 활빈당 세력, 해산 군인 세력 등이 연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국권 회복의 일환으로 근대 교육 운동이 전개되었다. 한말 화성 지역 교육 기관들은 주로 지방 관료, 기독교인, 교사, 지역 유지들에 의해 설립·운영되었다. 대부분 초등 교육 기관이었으며, 전문적 지식보다 문맹 퇴치에 중점을 둔 문해 교육이 시행되었다. 또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여성 교육이 병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1907년에는 대한자강회 남양군지회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월 말과 4월 초, 송산·장안·우정·향남·팔탄 지역에서 공세적 형태의 만세 시위가 일어나 3·1운동사에 중요한 한 축을 그었고, 제암리·고주리 사건은 일제의 만행을 국제 사회에 알린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1920년대 화성 지역에는 다양한 청년 단체가 조직되는 등 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이어졌고, 1927년 민족협동전선으로 결성된 신간회 수원지회는 대중 운동을 지원하거나, 야학 등 민중을 계몽하는 활동을 하였다.

한편,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 간의 농업 소득 불평등은 더욱 심해졌고, 토지 소유의 양극화도 심화되었다. 이에 화성 지역에서도 1920년대부터 소작 쟁의가 일어나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소작 쟁의의 내용은 소작료 인상을 거부하거나 소작권 이동에 항의하는 것이었다. 1929년에 결성된 수진농민조합은 쟁의부를 두고 소작 쟁의에 적극 개입하고 지원하였다.

[개항기 화성 지역 국권 회복 운동]

1894년 10월 수원, 안성, 음죽 등지에서 모인 5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수원 관아를 점령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지도자들이 체포·처형되면서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더욱이 1896년 고종의 「효유조칙」으로 동학농민군은 해산되었고, 잔여 세력이 남양만 일대 도서 지역으로 피신하여 활빈당(活貧黨)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들의 무력 투쟁이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은 위정척사 사상의 성격이 강하였다. 경기도에서는 1896년에 처음으로 경상북도 의성 출신의 김하락이 이천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천의병에는 수원과 남양 지역 일대 출신들도 참여하였다.

1907년 일제의 강요에 의한 고종 양위, 정미조약 체결, 군대 해산 등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다시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수원, 화성, 오산, 평택 등 경기도 서남부 지역에서는 1907년 7월 말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문이 돌았다. 군대 해산 이전부터 의병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성 지역 의병은 농민군을 기본으로 동학농민운동의 잔존 세력, 남양만 일대 활빈당 세력, 해산 군인 세력 등이 연합하여 활약하였다. 화성 지역 의병들은 인근 지역 의병과 연합 작전을 펼쳤으며, 해상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을 이끈 대표적 인물로는 정주원(鄭周源), 안춘경(安春敬), 홍일초(洪一初) 등이 있다. 일제는 남양과 수원 접경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남양수비대와 수원수비대를 수시로 파견하여 의병과 접전을 벌였다. 일본군의 압박과 포위망이 좁혀오는 상황에서 1908년 7월 17일 안성, 수원, 용인 등의 지역에서 활약하던 의병장 정주원과 소대장 이상덕이 체포되었다. 정주원과 이상덕의 체포를 계기로 일본군은 대대적인 의병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고, 화성 인근 지역 의병 투쟁은 점차 약화되었다.

화성 지역에서는 국권 회복의 일환으로 근대 교육 운동도 전개되었다. 화성 지역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은 1892년 천주교 신부 알릭스가 세운 왕림본당이라는 한문 서당으로, 1893년 삼덕학교[후일 신명의숙으로 개칭]로 이름을 고쳐 근대 교육을 실시하였다. 화성 지역 유지가 설립한 최초의 사립학교는 1899년 홍승한이 설립한 무관학교였인데, 구체적 교육 내용이 파악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화성 지역 근대 교육을 대표하는 교육 기관은 보흥학교였다. 1901년 선교사 존스의 의연금을 바탕으로 지방관과 김관현, 이창회, 박관용, 강형근 등 지방 유지가 주도하여 설립하였다. 이 외에도 9개교 순회 주관 학교와 여성 교육 기관인 제하여학교 등도 설립되었다.

사립 학교 설립에 의한 근대 교육은 을사늑약 이후 크게 발흥하였다. 서면[지금의 서신면] 당외동 정태환(鄭台煥)은 신흥의숙을 설립하여 초보적인 한문 교육과 산술, 체조 등을 가르쳤다. 음덕리면[지금의 남양읍] 상동에서는 황종원(黃宗源)을 비롯한 주민들이 ‘의무학교’ 설립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06년 군수 방한덕과 지역 유지들은 양성학교를 세웠으며, 심상과, 고등과, 일어과로 교육 과정을 구분하였다. 서여제면[지금의 서신면] 전곡에 거주하는 홍대필(洪大必), 홍대임(洪大臨), 홍대진(洪大晋) 등 남양 홍씨 문중 인사들은 전곡사숙을 설립하였다. 개교 초기부터 지원자가 쇄도할 정도로 향학열이 대단하였으며, 주요 교과목은 한문, 작문, 국문, 산술 등 보통과 과정이었다. 또 지금의 남양읍 활초리에 거주하는 남양 홍씨 문중 인사 홍준, 홍철후, 홍병유 등의 주도로 배양학교(培養學校)도 설립되었다. 이러한 문중 학교는 향촌 사회 문중 사이에 경쟁심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말 화성 지역 교육 기관들은 주로 지방 관료, 기독교인, 교사, 지역 유지들에 의해 설립·운영되었다. 대부분 초등 교육 기관이었으며, 전문적 지식보다 문맹 퇴치에 중점을 둔 문해 교육이 우선이었다. 또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여성 교육이 병행되었다는 특징이 있으며, 보흥여학교, 양정의숙, 유년여학교 등은 대한제국 시기 화성 지역을 대표하는 여성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개항 이래 일제는 적극적으로 친일 세력을 육성하고 경제 침략에 박차를 가하였다. 1904년 대한제국의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는 1906년까지 4차례에 걸쳐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고 화폐 개혁을 구실로 제일은행권 유통과 보급에 앞장섰다. 1906년 이후 통감부가 시정 개선을 이유로 도입한 차관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될 무렵 1,300만 원에 달하였다. 대구와 경북의 인사들로부터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등의 보도를 통해 국내외 한인 사회에 알려졌다. 화성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3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대한자강회 남양군지회가 국채보상운동의 소식을 알리고 모금 계획을 세웠다. 화성 지역 각 면의 주민들은 경쟁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교직원과 학생들도 부응하여 보흥소학교, 남양공립보통학교, 보흥여학교 등에서 십시일반으로 의연금을 모았다. 개신교계 여성들은 의성회를 중심으로 모금 활동을 하였고, 모금 활동은 마을이나 문중 단위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화성 지역 3·1운동과 제암리·고주리 사건]

화성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공세적인 만세 시위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1919년 3월 말부터 4월 초에 송산, 장안, 우정, 향남, 팔탄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고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를 파괴하는 양상을 보였다. 화성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만세 시위는 송산 지역에서 발생한 시위로, 1919년 3월 26일에서 28일까지 전개되었다. 홍면옥, 홍효선, 이규선 등이 주도하였으며, 3월 26일에는 송산면사무소 부근에서, 3월 27일에는 송산면 서쪽 육일리 방면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8일에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송산면사무소 뒷산에 모여 만세 시위를 하였고, 시위대를 탄압하기 위해 출동한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순사부장은 홍면옥의 어깨에 총상을 입힌 것이 발단이 되어 처단되었다.

3월 31일 향남면 발안장에서도 약 1,0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향남면 시위대는 일본인 거주지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시위는 다음 날까지 이어져서 발안장 주변 산에서 봉화가 일어나고, ‘일본인은 나가라’는 요구가 있었다. 4월 3일에는 장안·우정 지역에서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장안·우정 지역 시위에서는 각 마을 구장들이 조직적으로 주민을 모았고, 장안면사무소·우정면사무소·화수리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하고 방화하는 등 공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군중들은 주재소에서 도망치는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를 쫓아 척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경백(李敬伯)이 순국하기도 하였다. 향남·팔탄 지역 주민들은 4월 5일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시위 당일, 발안 장터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고, 인근 제암리고주리의 주민들도 주재소로 몰려와 투석하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일제는 화성 지역의 만세 시위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특별검거반을 편성하여 시위 주모자와 참여자를 검거하였다. 일본군 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병력도 파견되어 검거에 박차를 가하였다. 1919년 4월 15일 아리타는 11명의 보병 및 경관과 함께 지금의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의 기독교회당에 마을 주민들을 소집한 후, 교회당 밖에서 총을 쏘고 불을 질러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로 인해 제암리 주민 30여 명이 사망하고 가옥 28채가 전소하였다. 이어 팔탄면 고주리로 가서 김흥렬과 일가족 6명을 포박하고 불을 놓아 학살하였다. 제암리·고주리 사건에서 저지른 일제의 만행은 기독교 선교사들과 미국·영국 총영사관의 조사로 국제 사회에 알려졌다. 그러나 학살 주모자인 아리타는 군법 회의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화성 지역 청년 운동과 신간회 수원지회 활동]

1919년 3·1운동 이후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민족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화성 지역에서도 1920년을 전후하여 남양청년회, 수원청년구락부, 수원진명구락부, 천주교청년회, 팔탄청년회 등이 창립되었다. 대개 지역 유지들이 운동을 주도하였고, 실력 양성을 표방하였다. 1920년 12월 조직된 조선청년회연합회가 표방하던 문화운동론을 수용하여 야학과 강습소 운영, 강연회 개최를 통한 계몽 활동을 하였다. 화성 지역 단체의 활동은 강연회와 스포츠 활동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야학이 주된 활동이었던 다른 지역과 차별성이 있었다.

1923~1924년 무렵 화성 지역 청년 단체의 혁신이 이루어졌는데, 조직을 집단 지도 체제인 위원제 또는 간사제로 변경하여 신진 청년층이 단체의 주도권을 잡았다. 새로운 지도층은 회원의 연령을 제한하여 지역 유지와 청년층 사이의 대립을 해소해 나갔다. 그리고 기존 강령을 변경하여 사회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단체로 탈바꿈하였다. 이 시기에 조직된 단체로는 1923년 조직된 팔탄청년회, 1924년 조직된 갑자단, 정남청년회, 혁화청년회, 1926년 조직된 혁성단 등이 있다.

1926~1930년 무렵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나 인물들이 청년 단체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지역 사회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표적 단체와 인물로는 양감면의 반도청년회, 성호면의 사-ㄹ청년동맹, 북진청년회, 발안청년회 등과 박승극(朴勝極), 장주문(張柱文) 등이 있다. 1929년에는 수원청년동맹이 출범하여 야학을 운영하거나 국제청년데이, 메이데이 기념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사회주의 세력이 좌경화하는 과정에서 신간회와 청년동맹 해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수원청년동맹은 수진농민조합 청년부로 해소되었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설립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신간회 지회가 조직되었다. 1927년 10월 17일 화성 지역에서도 신간회 수원지회가 조직되었다. 신간회 수원지회는 성공회· 감리교·천도교 등의 종교 세력과 화성학원 및 삼일학교 관련 민족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이 광범위하게 합작하여 조직된 단체였다. 1928~1929년에는 세력이 확대되어 양감반, 오산반, 세교반, 장안반, 발안반, 마도반, 성호반, 남양반 등 반 조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한 분회를 설치하여 서구분회, 남양분회, 오산분회, 성호분회 등이 조직되었다.

신간회 수원지회는 대중 운동을 지원하고, 강연회나 야학 등 민중을 계몽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간회 수원지회의 활동은 일제의 탄압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였다. 일제는 1927년 정기대회에서 시간을 조금만 배정해주었으며, 1928년 송년회 때에는 발언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김재덕, 김학봉을 취조하였다. 1929년에는 집회를 금지시켜 신간회 수원지회 설립기념대회를 개최하지 못하게 하였고, 박승극 서기장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31년 신간회 해소 당시 수원지회는 해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이후 번복하고 해소를 결의하였다. 수원지회 내에는 천도교 계열 민족주의 세력이 세가 강하여 해소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박승극과 공석정 등에 의해 번복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세력은 신간회를 해소하고 계급적 성격이 강한 노동조합과 농민 조합 청년부로 귀속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화성 지역 소작 쟁의와 수진농민조합]

일본인 지주들은 일제의 정책적 배려와 토지 겸병을 통해 지배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 간의 농업 소득 불평등은 더욱 심해졌고, 토지 소유의 양극화도 심화되었다. 화성 지역에서도 지주제가 강화되어 소작농의 영세 상황이 19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인 대지주와 조선인 소작농 간의 민족적 대립,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계급적 대립은 더 이상 피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화성 지역에서는 1920년대 초부터 소작농들의 저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22년 향남면 하길리에서 동척 소작농들의 쟁의가 일어났다. 동척 농감 김상철과 부농감 임종식이 도조(賭租) 징수를 남발하고 횡령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동척농장 소작농 19명은 연서하여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국에 김상철과 임종식을 고소하였다. 1930년 11월에는 안용면 배양리의 50여 농가가 동척에 저항하였다. 동척에서 전년에 비해 소작료를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풍작이 되자 다시 2배의 소작료를 내라고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배양리의 소작농들은 소작 쟁의를 일으키며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1932년 3월 비봉면 유포리에서는 소작인 87명이 소작권 이동에 항의하여 소작 쟁의를 일으켰다. 지주들 사이에 토지 매매 계약이 이루어져 기존 소작인과 새로운 소작인 사이에 소작권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당국이 조정하여 공동 경작을 하라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공동 경작은 소작지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생활 개선이 고려되지 않은 결과였다. 1936년 4월에는 태장면 상권선리에서 소작 쟁의가 일어났다. 지주가 전보다 3배에 달하는 고율의 소작료를 요구하였는데, 소작료 인상에 불응하면 소작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소작인들은 수원군소작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하는 등 일치단결하여 소작 쟁의에 돌입하였다.

한편, 소작 쟁의와 관련하여 수진농민조합의 활동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진농민조합은 황구지천을 경계로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와 진위군[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서탄면 황구지리를 묶어 창립되었는데, 농민 조합 중 유일하게 2개 군에 걸쳐 창립된 단체였다. 1929년 3월 심인택(沈仁澤), 김영상(金榮相), 남상환(南相煥) 등이 적색농민조합으로 창립하였고, 박승극, 이원섭(李元燮), 장주문 등이 가담하면서 수진농민조합이 완성되었다. 수진농민조합은 산하에 쟁의부를 두고 소작 쟁의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쟁의부는 소작 쟁의에 개입하여 지주를 면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소작 쟁의에 돌입한 소작농들을 결속하여 지도하고, 소작인들의 생계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사실 조사 및 대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31년 11월 진위군 서탄면 금각리 황구지에서 일어난 소작 쟁의에서 수진농민조합에 가입된 농조원 4명이 체포되고 집행위원장 남상환이 검거되었다. 이후에도 수진농민조합은 지속적으로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결국 적색농조사건으로 간부들이 검거되자 와해되고 말았다. 1934년 각 사회단체 해산계가 제출되던 때 박승극에 의해 수진농민조합도 해산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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