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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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집필자 | 김재현 |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홍수 방지와 농경지 확보를 위해 하천의 가장자리에 흙으로 쌓아 올린 둑.
[개설]
경상남도 함안의 제 하천에 조성된 제방은 338㎞로 전국 최장이다. 함안은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하천의 역류(逆流)가 심한 곳이다. 현재의 함안은 이러한 지형적 취약점을 극복하며 성장한 결과이다. 그리고 지형적 문제 극복의 중심에는 바로 제방의 조성이 있었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함안의 제방 조성은 삼국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본격적인 제방 조성이 시작된 시기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이다. 광복 후에도 제방의 조성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제방의 조성은 함안을 비옥한 곡창 지대와 철도, 도로 등 교통의 요지로 변모시켰다. 현재는 경상남도 함안의 역사를 담고 있는 제방들의 관광지화를 통해 새롭게 변화되고 있다.
[함안에서 제방이 중요한 이유-함안의 지형적 특성]
경상남도 함안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형적 특성과 남강(南江)과 낙동강(洛東江)의 합류(合流)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물이 역류하는 특이한 지역이다. 즉 남에는 여항산(艅航山), 서에는 방어산(防禦山), 동에는 작대산(爵大山)이 솟아 있어 함안천(咸安川), 서천(西川), 남강이 정북(正北)으로 흐르다가 낙동강과 합류하여 북동으로 흘러간다.
조선 중기의 함안군 읍지인 『함주지(咸州誌)』에는 이러한 함안의 지형적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로부터 도읍(都邑) 거의가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아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하여 형성되어 왔다. 유독 함안만은 동남이 높고 서북이 낮아 고산 계곡이 동남에 이루어져 물이 북으로 흐른다. 서북은 고산준령(高山峻嶺)이 없어 광활한 평야를 이루는데, 홍수 때마다 강이 범람하여 물바다가 된다. 이리하여 군(群)은 애초부터 서북의 리명(里名)에 마땅히 산(山)이 있어야 할 자리하고 하여 '산'자를 넣어 불렀으니 산팔(山八), 죽산(竹山), 남산(南山), 대산(代山) 등이 그것이다. 동남 산악 지대 마을은 말이 능히 수레를 끌고 굴러 가겠다고 하여 마륜리(馬輪里)로 지었다 한다. 또한 동남의 대부분 마을에 곡(谷)자를 넣어 병곡(竝谷), 비리곡(比吏谷), 대곡(大谷)이라 했다.”
우리나라는 대개가 높고 낮은 산맥과 그 사이를 하천이 굽이굽이 돌아 완만히 흐르기 때문에 홍수가 지면 사람들이 터를 이루고 사는 곳은 큰 피해를 입기 마련이었다. 그 중에서도 함안은 특히 그 피해가 더 큰 곳이었다. 이로 인하여 예로부터 생존을 위해 자연을 극복하려는 함안 지역 사람들의 노력과 투쟁은 계속되어 왔고 그 중심에는 제방이 있었다.
[홍수 극복을 위해 제방을 쌓다-삼국 시대]
경상남도 함안 사람들이 언제부터 제방을 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까지의 자료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삼국 시대 유적이다. 이는 흔히 ‘가야리 제방’으로 불리는 유적으로, 가야리 제방 유적은 행정 구역상으로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가야동 233-1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아라가야(阿羅伽耶)의 왕궁지 추정 지역 중 한 곳인데, 토축(土築)이 남아 있어 왕궁지로 전하는 곳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알려져 왔다. 2008년 이 제방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제방의 전체 길이는 약 285m로 추정되며 제방의 서편에 위치한 곡저 평야 혹은 여기에 시설된 무엇인가를 보호하기 위해 곡저 평야의 곡 입구를 막아 쌓은 제방 시설로 확인되었다.
제방의 입지, 평·단면 형태 및 제방의 안쪽·바깥쪽의 층 양상 등으로 보아 이 제방은 저수지 제방이 방조제 제방으로 보기 어렵고, 하천 제방으로 판단되었다. 더욱이 하천 제방 가운데서도 하천 유로를 유도·고정하는 하천 제방이 아니라 산·구릉과 산·구릉을 서로 연결해 홍수 범람 등으로부터 제방의 안쪽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제방이 위치한 곳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인근으로 현재 남강의 유로(流路)와는 5㎞ 이상 떨어져 있다. 이 제방을 통해 볼 때 삼국 시대 사람들의 주요 생활 무대가 현재의 가야읍 일원이었고, 그 시대의 토지 이용은 가야읍 일원에 머물러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전역에서 이 시대의 제방은 김제 벽골제(金堤碧骨堤)[사적 제111호], 상주 공검지(尙州恭儉池)[경상북도 기념물 제121호], 울산 약사동 제방(蔚山藥泗洞堤防)[사적 제528호] 등 일부 지역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당시의 가장 최첨단 토목 공사인 제방의 조성을 함안에서 실시하였다는 것은 함안 지역에서의 제방 조성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이야기 해줌과 동시에 함안 지역 토지 이용에 제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농경지 확보를 위해 제방을 쌓다-고려, 조선 시대]
삼국 시대부터 확인되는 함안의 제방 조성은 고려·조선 시대에도 계속해서 실시되며 토지 이용의 확장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함안의 고려 시대 제방 조성에 대한 기록이나 흔적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많은 기록과 자료들이 확인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나 『비변사등록(備邊司勝錄)』에 수리 시설에 대한 기록과 영조(英祖)·정조(正祖) 재임 시 낙동강과 남강의 치수 사업에 관한 것도 보인다.
조선 중기 함안 지역 자료의 보고인 『함주지』에서도 인공 구조물인 제방을 설치하여 치수를 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제언조(堤堰條)에 지동 제언(池洞堤堰), 하천택(河泉澤), 요도지(蓼島池), 내천지(內泉池), 벌현 제언(筏峴堤堰), 백사 제언(白沙堤堰) 등이 수록되어 있고, 관개조(灌槪條)에서는 용연 방축(龍淵防築), 굴목 방축(屈木防築), 후방축(後防築), 금천 방축(琴川防築), 이목 방축(梨木防築), 신방축(新防築), 대평 방축(大坪防築), 비사곡 관개(比史谷灌漑), 산족 관개(山足灌漑), 석택 방축(石澤防築), 미산 방축(眉山防築), 과모 방축(寡母防築), 부연 방축(桴蓮防築), 광실 방축(廣實防築)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함주지』의 기록 외에도 유동제(柳洞堤)[칠원읍], 상당제(上塘堤), 검단제(檢丹堤)[칠북면] 등이 『칠원 읍지(漆原邑誌)』 등에서 더 확인된다.
이러한 수리 시설의 기록은 당시 타 군·현보다 많은 수가 확인되는 것으로 함안 지역의 제방 조성이 얼마나 활발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일 것이다. 이렇게 많은 수의 수리 시설과 제방들은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는 조성 특성상 동시에 조성되었다기 보다는 그 조성 작업이 삼국 시대 이래 긴 시간 동안 지속적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후방축', '신방축' 등의 명칭을 통해서 이 시기에도 새로운 제방이 계속해서 조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본격적인 제방의 축조는 구한말부터 시작되는데 1900년경 왕명으로 쌓은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의 안기제(安基堤)가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함안의 모습이 만들어지다-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 본격적인 제방의 조성은 사실 일제 강점기부터이다. 일제 강점기는 남강, 낙동강을 비롯한 전국적인 제방 조성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그 이유는 1926년 「조선 하천령」을 공표함으로 하천 개수 사업과 함께 그 이전 시기 하천 인근 부지의 토지 소유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토지 약탈을 본격화 한 것과 관련된다. 함안 지역 역시 이와 맞물려 대규모의 제방 조성과 유로의 변경이 이루어진다.
『조선의 홍수(朝鮮の洪水)』에는 1925년에 일어났던 남강 및 낙동강의 홍수 범람의 현황을 표시한 도면이 있다. 이 도면을 통해 보면 현재의 해발 고도 12.5~13m까지의 범위에 범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이는 가야읍과 함안 말이산 고분군(咸安末伊山古墳群)[사적 제515호] 구릉의 남쪽 끝까지 범람의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함안의 치소(治所)가 가야읍이 아니라 더 안쪽인 함안면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상기시켜 본다면 당시까지 현재의 가야읍 일원과 남강까지의 넓은 들판은 안정적인 토지 이용이 불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1925~1935년 사이의 신문 기사에서는 가야 시장 및 인근의 가옥 그리고 철도 시설 등이 범람의 피해를 입었음이 기록 되어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35년 일제(日帝)는 낙동강과 남강에 대해 대대적인 개수 공사를 통해 강변의 제방을 쌓는다. 이 시기 함안 부근의 공사 평면도를 살펴보면 우선 남강 변에 함안군 법수면 윤외리 일대에서 함안천이 남강에 합류되는 지점까지 긴 제방을 쌓았음이 확인된다. 이와 동시에 함안천과 신음천(新音川) 양안(兩岸)에도 긴 제방이 확인된다.
현재의 신음천은 함안 말이산 고분군 서쪽 함안 남문외 고분군(咸安南門外古墳群)[경상남도 기념물 제226호] 능선의 아래쪽에서 광정천(廣井川)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함안 남문외 고분군 능선의 말단부에서부터 함안 고등학교와 충의 공원이 위치한 능선까지 제방으로 연결되어 가야 읍내 외각을 따라 흘러 내인리 인근에서 함안천과 합류되고 있다.
하지만 1916년에 제작된 1:50,000 지형도에서는 신음천과 광정천이 현재와 같은 지점에서 합류되기는 하지만 함안 남문외 고분군 능선의 끝자락에서 현재의 방향과는 달리 북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신음천의 유로가 현재와 같이 바뀌게 되는 것은 일제 강점기임을 알 수 있으며, 신음천 원래 유로의 흔적은 현재 함안 종합 스포츠 타운이 조성된 지역에 대한 발굴[시굴] 조사에서 확인된 바 있다. 두 구릉의 사이에는 현재 하천 및 도로의 조성과 시가지의 조성으로 인해 서로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갑총(馬甲塚)으로 유명한 해동 아파트에서 가야 초등학교 그리고 함안 고등학교로 연결되는 하나의 구릉이었으며, 구릉 끝자락의 볼록 솟아 오른 지형에는 현재 충의 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의 남강 변 그리고 함안천, 신음천을 따라 길게 조성된 제방은 함안의 모습을 현재와 비슷하게 바꾸는 주요 원인이었다.
[휴식과 관광지로의 변화-현대]
현재 경상남도 함안의 중심지인 가야읍은 1914년 산외면[현재의 말산리, 검암리, 광정리, 도항리 동부 일대]과 우곡면[현재의 혈곡리, 춘곡리, 신음리, 도항리 서부 일대], 백사면[현재의 사내리, 가야리, 묘사리]의 3개 면을 통합하여 아라가야의 옛 도읍지라 하여 가야면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대산면 산서리 4개 마을을 편입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의 발전은 일제 강점기에 경전선이 설치되며,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1954년 원래 함안면에 있던 군청(郡廳)이 역전(驛前) 취락으로 성장한 현재의 가야 읍내로 옮겨오며 가야는 함안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가야읍의 역사 볼 때 가야읍은 과거부터 함안 지역의 중심지가 아니라 근·현대 들어 교통의 요지가 되며 새롭게 부상한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가야읍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농경지가 비옥하며 수원이 풍부하여 벼농사가 발달하였으며, 근래에는 수박, 참외, 멜론 등의 시설 원예 농업으로 경제 작물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북쪽으로는 남강과 접하는 곳까지 길이 약 5.3㎞에 달하는 넓은 충적 대지가 펼쳐져 있다. 이 충적 대지는 대부분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경작지들은 남강을 따라 조성된 제방과 가야 읍내를 관통하는 함안천과 신음천의 양안을 따라 조성된 제방으로 인해 조성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외에 군북면, 대산면, 칠원읍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제방을 쌓아 물을 막으면서부터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칠원이라는 지명은 거의 상고 시대까지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삼한 시대에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이 있었는데 우리 기록에서는 이를 칠포국(漆浦國)으로 기록하고 있고 나중에 신라에 편입되면서 칠토현(漆吐縣)으로 적고 있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칠제현(漆堤縣)이라 했는데 접도의 도(塗), 칠토의 토(吐)는 칠제에서 보듯 ‘둑’, 제방의 뜻을 가진다고 본다. 이처럼 칠원 지역 제방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함안군 군북과 대산 역시 1960년대 지형도에서는 상습 침수 지역으로 거의 대부분 갈대로 뒤덮여진 습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지도를 통해 볼 때 남강 본류의 자연 제방이 일부 논으로 이용되는 것을 제외하고 석교천(石橋川)과 대산천 일대가 자연 늪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77~1985년 사이에 대부분 개간되어 농경지화 되었다. 이러한 습지의 농경지화는 남강 변에 제방을 조성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광복 후에도 51 개소 146㎞를 축조하여 둘안, 개간지 같은 새로운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현재 함안에는 국가 하천 3개소 57㎞와 지방 하천 29개소 170㎞ 등 총 227㎞의 하천이 10개 읍면 중 7개 읍면에 흐르고 있으며, 국가·지방 하천의 제방은 전국 최장인 338㎞이다.
현재 경상남도 함안의 이러한 제방은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다. 남강 변의 악양 제방과 양포 제방에는 둑방 꽃길을 조성하였으며, 가야읍과 함안면을 아우르고 있는 8㎞의 함안천 제방에는 산책로를 조성하여 지역민의 휴식처로 활용하고 있다. 이와 함께 칠원읍광려천(匡廬川)과 칠원천 11㎞가 생태 하천으로, 칠서면 이룡리함안보 부근 하천 둔치에 1.65㎢ 규모의 수변 생태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이는 하천 제방을 활용한 강과 사람이 어우러진 레저 문화 시설 개발 등의 지역 관광 인프라 구축의 사례이다. 또한 남강댐의 건설과 지속적인 수리 시설의 구축으로 인해 본연의 기능이 사라진 폐 제방에 대해서도 산책로, 체육공원, 주민 생활 공간 등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제방 조성은 함안의 지형을 바꾸고 중심지의 이동 등 많은 변화를 수반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최근 함안군이 국가 하천과 지방 하천을 제방과 함께 관광 자원으로 개발하였으며 지역민과 외지인들의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이는 함안의 역사와 함께 했던 제방이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탄생하며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