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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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節- 咸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집필자 | 김재현 |
[정의]
저항의 혼이 흐르는 역수의 땅 함안에서 불의에 굽히지 않고 절의를 지키며 살아온 함안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
[개설]
함안은 예로부터 충성스럽고 절개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고장이다. 조선 왕조를 부정했던 조순(趙純), 학자 모은(茅隱)이오(李午)가 있으며,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했던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1420∼1489]도 함안 사람이다. 박한주(朴漢柱)[1459∼1504]와 윤석보(尹碩輔)[?∼1505]는 연산군에 직간했던 충직한 관료이기도 했다. 이처럼 함안은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던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서의 3·1 운동은 어느 지역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어 일제의 무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民族解放運動)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6·25 전쟁 시기에도 함안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여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충(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이다.
[역수의 땅 함안]
북서로 낙동강과 남강이 흘러 강변에는 양반들이 풍류를 즐겼음직한 아름다운 정자들이 있고, 동남으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 용이했던 천혜의 요새 그 가운데로 자그마한 하천들이 분지를 이루어 예부터 인간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곳이 함안이다. 「울고 왔다 울고 가는 고을 원님」 이야기는 함안 지역의 풍요로움과 빼어난 자연환경을 전해 주는 설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가 댁의 한 선비가 벼슬길에 올라 몇 해만에 함안의 원님으로 부임길에 올랐다. 함안의 몇십 리 밖에 이르렀지만 가도가도 첩첩산중이라 한심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임지에 도착한 선비는 부지런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백성들, 높은 산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 탁 트인 넓은 들의 풍성한 오곡백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함안을 떠날 때는 인정이 넘치고 풍요로운 이 고을을 못내 아쉬워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는 설화이다.
함안은 특이한 땅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으로 예부터 물이 거꾸로 흐르는 역수(逆水)의 땅이었다. "이것이 풍수상 반역의 고을로 취급되어 많은 설움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이 고장 사람들이 전하는 말이다. 여항산(艅航山)이라는 이름이 배가 다닐 수 있는 낮고 좋은 곳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서도 이를 만회하기 위한 지역민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전근대의 함안 사람들]
함안, 그 '역수의 땅'이 '반역의 땅'으로 등식화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반역의 땅이란 의미는 충절을 지키고자 했던 함안 지역 사람의 의로운 삶의 형태가 권력을 움켜쥐었던 세력에게 오히려 저항의 의미로 비쳐진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건국에 참여한 사람은 없었고, 절의를 지킨 함안 사람이 많았다.
고려 말 장군 조순은 이성계(李成桂)[1335∼1408]와 함께 요동을 공격할 때 참여했던 장군이었다. 위화도에 이르러 회군에 대한 논의가 있자, "국명을 받지 않고 임의로 회군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말하고 그 길로 낙향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여러 번 불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지조를 지키니, 특명으로 그의 집 앞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예를 표했다고 전한다.
고려 말 이오는 정몽주(鄭夢週)[1337∼1392]와 이색(李穡)[1328∼1396]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당시의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유학자였다. 이오는 고려가 망한 뒤 함안에 내려와서 은거하였다. 이오는 자신이 끝까지 고려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은거지의 주위에 담을 쌓고 이 담 밖은 조선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동(高麗洞)'임을 명시했다. 후에 태조가 여러 번 출사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의 유언에 따라 묘비에 글 한 자 없는 '백비(白碑)'를 세웠다 한다. 지금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담안 마을 입구에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란 비석이 서 있다. 이오는 아들에게도 조선 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신의 신주(神主)를 딴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王位簒奪)에 저항했던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도 있었다. 단종(端宗) 때 성균관 진사가 되어 사람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으나 1455년(세조 1)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함안으로 낙향하여 서산(西山) 아래에 살았는데, 사람들이 백이산(伯夷山)이라 하였다. 벼슬을 하지 않고 시냇가에서 낚시로 여생을 보내어 스스로 어계(漁溪)라 했다. 1698년(숙종 24)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복되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1703년(숙종 29)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億齡) 등이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건의하여 1706년(숙종 32))에 시행되었다. 이에 서산 서원(西山書院)에 김시습(金時習)[1435∼1493], 이맹전(李孟專)[1392~1480], 원호(元昊), 남효온(南孝溫)[1454∼1492], 성담수(成聃壽) 등이 조려와 함께 제향되어 있다.
박한주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연산군 때 간관이 되어 왕의 실정을 직간하고 권신 임사홍(任士洪) 등의 사악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연산군의 횡포가 심해지자 외직으로 나갔으나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도(門徒)로 분류되어 유배되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또 연루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또한 윤석보(尹碩輔)[?∼1505]도 청렴한 관리였다. 칠원 사람으로서 임사홍이 유자광(柳子光)[1439~1512] 등과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부렸음에도 극형에 처하지 않고 유배로 그치자 이를 비판하였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등 실정을 거듭하는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다가 유배되어 죽었다.
[일제 강점기 민족 해방 운동과 함안 사람들]
일제 식민지 시기에도 식민 통치에 항거하다 옥사한 안지호(安智鎬)[1857∼1921] 등 함안의 인맥들은 불의에 굽히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서 죽음을 불사했던 꼿꼿한 선비 정신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또한 함안 지역은 역사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도 의로움을 잃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의 과정에서 일어난 함안 지역의 3∙1 운동 등 함안 사람들의 독립 의지는 강렬했다. 칠북면 연개 장날 의거[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 대산면 평림 장날 의거[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칠서면 이룡리 의거[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함안읍 의거[함안읍 만세 운동], 군북 장날 의거[군북 시장 만세 운동], 칠원 장날 의거[칠원읍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등 6차례에 걸친 의거가 일어났는데, 전국 어느 지역보다도 투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3∙1 운동은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 통치로부터 벗어나려는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이었다.
3월 19일 일어났던 함안읍 의거는 '독립운동 사실 증명서' 발급을 일본 경찰에게 요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독립운동 사실 증명서를 교부받아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 평화 회의에 제출하여 독립을 청원하고 일제의 강제 병합을 규탄하려는 목적이었다. 마산 경찰서장 기타무라[北村]와 오하야시[大林] 순사 부장에게 오늘 3천여 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 증명서를 교부하라고 위협했던 것이다. 물론 증명서 발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중들은 경찰서 유치장을 파괴하고 구속된 안지호 등을 탈출시켰다. 당시의 치열한 의거 상황을 오하야시 순사 부장은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증언했다. "서장을 주재소 안에서 뒤뜰까지 끌어내어 폭언과 구타를 하면서 모자를 벗겼으며, 본인은 태평루 앞과 주재소 안에서 7회 정도 구타당하였다. 또 폭도들은 서장과 본인에 대하여 오늘 조선인이 독립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 증명서를 쓰라고 강요했다."고 진술했다. 함안 군수 민인호의 증언에서도 "박노일(朴魯一)과 안지호는 마산 경찰서장과 함안 경찰관 주재소 순사 부장에게 독립운동 사실 증명서를 강요한 자이다."라고 했다.
3월 20일 전개된 군북 장날 의거는 전국에서도 가장 피해가 많았던 항쟁이었다. 군북장[군북 전통 시장]에 5천여 명이 운집했다. 군중들이 "구속된 애국지사를 석방하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진해 경중 포병 대대 군인과 경찰은 공포(空砲)를 발사하였다. 하지만 군중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정조준해서 발포했다. 3월 29일 조선군 1군 사령관 우모미야타로[宇理官太郞]가 일본의 육군 대신에게 제출한 특별 보고서에는 의거 상황을 "3월 20일 군북면 덕대리 남단 동촌리신창 사숙에 약 3천 명의 폭민(暴民)이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므로 군북 경찰관 주재소에 파견한 진해만 경주 포병대 특무 조장 이하 16명을 경찰의 요구에 의해 출동케 하여 해산시켰다."라 했다. 그 결과 조선인은 사망자 21명[남 20, 여 1]과 부상자 18명이었고, 일본 군대 측은 비교적 가벼운 부상자 12명 뿐이었다. 이러한 피해 상황은 군북 시장 의거에서 함안 군민들이 얼마나 일제에 처절하게 저항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5천 명에 가까운 군중들이 궐기했으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농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서 일제로부터 벗어나려는 피의 절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함안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치열한 항쟁을 전개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3·1 운동 당시 마산 형무소 관할 시·군별 형을 언도받은 사람의 수가 마산 42명, 창원 41명, 통영 23명, 창녕 23명 등이었지만 함안 사람은 136명이었다. 언도받은 형량의 누계도 창원은 33년, 통영은 19년 등이었지만 함안은 136년이었다. 이렇게 마산 형무소는 함안의 독립지사들이 독차지했다. 이에 '마산 형무소는 함안 사람의 재실'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3·1 만세 운동 이후에도 항일 운동은 계속되었다. 1932년 2월 29일 군북 장날에 군북 공립 보통학교 4·5·6학년 학생 약 280여 명은 요구 조건이 적힌 전단을 뿌리며 만세 시위 행진을 했다. 요구 사항은 '조선어 시간을 주 6시간으로 환원하라, 조선 역사 시간을 배정하라, 식민지 교육과 노역을 금지하라, 학교 생활에 자치권을 달라, 나카미츠[中滿] 교장과 이점용 훈도는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농민들도 항일에 나섰다. 군북 농민 조합 사건이 그것인데, 1932년 12월 지세 납부 반대와 소작권 이동 반대 운동을 펼쳤다. 경제적 수탈에 저항했던 것이다.
함안군 법수면 사람들은 항일 운동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 법수 공립 보통학교를 법수면 경찰관 주재소 옆으로 이전하려는 일제의 계획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였다. 1939년 4월 28일 면사무소에 모여 면장을 납치하고 의령군 의령읍으로 행진했다. 이때 시위를 주동한 29명이 붙잡혔다. 이 사건은 1939년 5월 3일 『동아 일보』에 사회면 톱기사로 취급되었다. '수백 주민 봉군 작당(數百住民蜂群作黨)', '면장 메어다 월강 이배(越江移配)', '법수면 학교 이전 문제(法守面學校移轉問題)' 등의 표제를 달고 보도되었다. 시위에 참여했던 하고봉(河高鳳) 등 17명은 소요, 공무 집행 방해, 상해 등의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6·25 전쟁과 함안 사람들]
6·25 전쟁 시기 함안 지역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었다. 1950년 8월 18일 정부 기관이 부산에 자리 잡으면서 함안 지역은 전쟁의 중심부에 놓이게 되었다. 소위 낙동강이 최후 보루로 남게 되면서 함안 지역은 낙동강 돌출부에 해당되어 북한군이 부산 공격을 위한 교두보로 확보하기 위한 요충지였다. 이 중 여항산 남쪽의 서북산(西北山)은 6·25 전쟁 중 낙동강 방어 전투가 치열했던 미 제25사단 예하 제5연대 전투단이 북한군을 격퇴하여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던 격전지였다. 1950년 8월에 일어난 서북산 전투는 무려 19회나 뺏고 뺏기는 백병전(白兵戰)이 반복되어 미군 병사들이 '전투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혹은 저주받은 산이라는 뜻으로 '갓댐(God damn)산'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낙동강 방어선은 경상북도 왜관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영덕, 서쪽은 낙동강 본류를 따라 창녕 남지에서 함안, 창원 진동을 거쳐 바다에 이르는 동서 80㎞, 남북 160 ㎞에 이르는 방어선을 말한다. 함안도낙동강 방어선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전쟁터였다.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치열한 격전지였고, 피아간(彼我間)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주택은 거의 파괴되었고, 그 외 물질적 피해도 너무나 컸다. 함안 사람들은 낙동강 방어선 안에 해당하는 김해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전쟁이 끝난 뒤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이재민이었고, 부족한 식량으로 인하여 기아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전쟁터였기 때문에 전쟁의 과정에서 그 공로로 인해 훈장을 수여받은 사람도 다수 있다. 대한민국 무공 수훈자회 함안군 지회에 따르면 을지장 2명, 충무장 6명, 화랑장 37명, 인헌장 6명, 광복장 2명으로 수훈자는 총 53명에 이른다.
전쟁은 또 다른 죽음을 불러왔다. 많은 민간인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2009년 11월 27일 국민 보도 연맹 사건에 의해 함안군의 민간인이 학살되었음을 밝혔다. 또한 전쟁 기간 중에 미 공군의 오폭(誤爆)으로 함안군의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