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3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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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南 萬世 運動의 始作, 咸安 3·1 獨立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함안면|군북면|칠서면 이룡리|대산면 평림리|칠원읍 구성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3월 9일 -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 만세 운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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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3월 12일 -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시작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시작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일 - 함안읍 만세 운동 시작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3월 20일 -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시작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3월 23일 - 칠원면 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시작 |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 만세 운동 -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 |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 |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이룡리 | |
함안읍 만세 운동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 |
군북 시장 만세 운동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 |
칠원면 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 |
[정의]
1919년 3~4월에 걸쳐 경상남도 함안군 지역에서 일제의 지배에 항거해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지역에서 발생한 최초의 독립 만세 운동인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함안 지역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인근 지역까지 만세 운동이 전파되었으며 평화 시위에서 차츰 공세적인 시위운동으로 변해갔다. 시위운동에 참가한 인적 구성은 기독교와 경명 학교(儆明學校) 등 근대 학교를 통해서 개명(開明)되고 기독교 인맥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지리적 특성과 일제의 수탈이 부른 경상남도 최초의 독립 만세 운동]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는 일본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일찍부터 일본 침략의 교두보가 되었다. 1910년대 말 경상남도 지역에는 일본인 약 6만여 명이 거주하였다. 이는 경기도 다음으로 많은 일본인 인구수였다. 일본은 부산과 마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대거 진출하여 토지, 어장 및 상업 전반에 걸친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본격화하기 위해 부산에 부청(府廳)과 지방 법원, 헌병 분대, 수비대 등과 같은 각종 통치 기구와 더불어 은행과 회사, 정미, 양조장 등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경상남도의 농업과 어업 수탈 또한 그 피해가 심각하였다. 경상남도에는 99만㎡ 이상의 일본인 농장이 10여 곳이나 있었다. 예를 들면, 창원의 무라이[村井] 농장, 사사키[佐々木] 농장, 밀양의 마츠시타[松下] 농장, 동래의 타카세[高瀬] 합명 회사, 함안의 남해(南海) 척식 회사 등이 설립되어 있었다. 또한 영도와 방어진·동래·창원·통영·사천·남해 등지에는 약 5000여 명의 일본 어민들이 상주하면서 조선의 어장을 침탈하였다. 이와 같이 경상남도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한 데에다가 일제의 수탈이 어느 지역보다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 민중들의 일제에 대한 반감은 고양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회적 특징과 함께 연개 장터는 가물 때도 강물이 마르지 않아 낙동강멸포 나루를 이용한 해상 교통의 중심지라서 육지의 농산물과 마산·부산 등지의 해산물이 집결되었으며 행상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장소였다. 이러한 여건은 이 지역을 빨리 개명시켰다. 1887년 이령 교회가 설립되었고 1904년 경명 학교가 개교하였던 점은 지리적·인문적으로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에서 경상남도의 3·1 독립 만세 운동이 제일 먼저 일어난 배경이 되었다. 육지 산물과 해산물이 교역되던 연개 장은 의거 군중을 동원하기 쉬웠고 경찰관 주재소와 거리가 있어 비밀의 유지가 용이하고 의거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지리적·지역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서는 고종(高宗) 황제의 장례와 서울 지역의 3·1 운동을 참관하기 위해 14명의 지역 인사가 서울에 올라갔으며 개명한 유림들과 기독 세력의 실천력이 조화를 이루어 경상남도에서 제일 먼저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에서 3·1 독립 만세 운동의 기치를 올렸다.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에서 경상남도 독립 만세 운동 시작되다]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각 도별로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장소와 시위 횟수와 사상자를 살펴보면 경상남도 지역의 시위 횟수는 경기도와 황해도 다음으로 많은 101회였고 사상자는 평안남도·평안북도·경기도 다음으로 많은 186명으로 확인된다. 이와 같은 수치는 조사 주체가 조선 총독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경상남도 지역 시위의 격렬함을 짐작할 수 있다.
경상남도 지역의 3·1 독립 만세 운동의 시발점은 1919년 3월 3일 부산과 마산에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고 서울의 시위 소식이 전해진 때부터였다. 일반적으로 경상남도 지역 최초의 3·1 독립 만세 운동은 3월 11일 부산 일신 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함안 지역의 경우, 이보다 앞선 1919년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에서 시위가 발생하였다. 1919년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시위를 시발점으로 3월 중순 이후 경상남도 지역 3·1 독립 만세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19년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시위를 시작으로 3월 13일 동래·영산·밀양, 3월 14일 창녕·통영·의령, 3월 18일 합천·진주·통영·하동 등으로 시위가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물론 경상남도 지역 전체가 같은 속도로 시위가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창원·양산·함양·김해에서는 1919년 3월 하순, 울산과 남해에서는 4월 상순에 가서야 비로소 3·1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경상남도 지역의 3·1 독립 만세 운동은 경상남도 내 21개 부·군에 걸쳐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즉, 경상남도의 3·1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초순에 시작되어 3월 중순과 4월 초순에 절정기에 달하였다가, 4월 중순 이후 일제의 병력 증강 배치로 탄압의 강도가 더해지면서 열기가 식고, 4월 말에 이르러 사실상 종결되었다.
[가려진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 시위, 경상남도 독립 만세 운동의 확산을 이끌다]
함안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을 시발점으로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 4월 3일·8일·13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 등 함안 지역에서는 총 11회의 만세 운동이 있었으며, 총 참가 인원은 약 1만 2000명에 이른다.
함안의 이령리 사람 중 고종의 국장(國葬)을 참배하고 온 사람들은 김정오의 부친이자 이령리 교회 장로인 김세민을 비롯한 13명이었다. 이 중 김세민 장로가 이령리 주민을 이끌고 상경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13명은 김경오·여봉준·김주현·윤기선·황병민·하갑수·한세호·정영실·김홍찬·김갑일·황경수·김차선·안수원으로 이들은 칠북면 이령리 시위를 사전에 계획하였으며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의 인산(因山)에 다녀온 14명의 유지는 3·1 독립 만세 운동을 참관하고 돌아왔다. 이들을 중심으로 1919년 3월 6일 이 지역 새말 예배당에 29명이 모여 3월 9일 연개 장날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결정하였고 대책 위원 여봉준·곽성복·김주현·김정오·윤기선 등에게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 제작 등 시위 준비를 맡겼다.
1919년 3월 9일 정오, 수천 명의 군중이 총궐기한 가운데 김세민이 개회사를 하고 유광도의 격려 연설, 김정오의 선언문 낭독으로 이어졌으며, 경명 학교 선생들과 학생들을 선두로 많은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석양이 질 때까지 칠북면 각 마을을 순회하고 해산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1976년에 주민들이 세운 3·1 운동 기념비에서 만세 운동 준비 모임에 참석한 29명[김두량·김수감·이만웅·여경천·곽진수·손학봉·김금석·림경환·엄태경·김만옥·김윤석·김성추·황출이·배양전·박기우·구제남·이명이·황마리아·이귀애·김혜림·이선옥·김혜숙·김장덕·곽성복·임순우·엄도일·운봉수·진익이·김순 혹은 39명]과 36명의 명단이 확인된다.
마산 경찰서 칠원 경찰관 주재소와 거리가 멀어 비밀이 유지되어 시위는 평화적으로 매듭지었으나 다음날 정보를 입수한 일제의 경찰은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위 사실을 부인하고 축소하여 연행자는 모두 훈방되었다. 당일 행렬에 앞장섰던 나머지 사람들은 문장환·박쾌일·하숙찬·김도근·김도석·김경돈·김찬욱·차서식·구사문·김영수·김성요·배희동·김우천·김용이·김우진·이규근·임용이·곽종철·이상안·조은성·김백은·윤봉인·양성만·윤한경·구찬문·구역조·윤봉기·차학련·차만갑·한명수·전수업·이덕호·황진규·임제한·김학률·김영정과 같은 지방 유지와 하갑조·박종실·윤효준·차용학·문삼갑·배대위·구주현·김삼백과 같은 학생 등이었다.
1919년 3월 9일 연개 장날 만세 운동을 선두로 하여 3월 12일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장날 의거, 3월 13일 영산·밀양·통영 의거, 3월 15일 신반 의거, 3월 16일 지정 의거, 3월 17일 칠곡 의거, 3월 18일 진주·정촌·삼가 의거, 3월 19일 함안·합천 의거, 3월 20일 군북·대병·구민 의거가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즉 경상남도 지방 의거는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를 시발로 확산되었고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시위는 경상남도 3·1 독립 만세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이에 일제는 3·1 독립 만세 운동 후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을 폐쇄하고 가게를 헐었으며 일본 사람이 드나드는 술집만 하나 남겨 두었다.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 독립 만세 운동은 이후 칠원읍과 영산읍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김두량은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의 주요 역할을 하였고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의 주모자로 마산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은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경상남도에서 일어난 3·1 독립 만세 운동으로서 경상남도의 다른 지역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인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격렬한 시위와 다양한 세력이 참가한 경상남도 서부 독립 만세 운동]
경상남도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한 일본 측 자료를 살펴보더라도 3월 중순부터 하순 사이에 총 179회의 크고 작은 만세 운동이 거의 매일 일어났으며, 시위 참가 인원은 약 7만 명에 달하였다고 전해진다. 경상남도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함안과 합천, 진주와 같은 경상남도 서부 내륙 지방에서는 제지 세력에 의해 지역 연대적인 대규모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난 반면, 부산의 동래와 밀양, 김해 등 경상남도 동남부 해안 또는 대규모 농업 지역과 상업 중심 지역에서는 학생과 교사가 중심이 된 소규모적이고 평화적 시위를 그 특징을 하고 있다. 둘째, 독립 만세 운동 당시 체포자, 처벌자의 직업별 현황을 살펴보면 주로 농민·학생·기독교인·노동자 등이 참가한 것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불교 세력이나 유림 세력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함안 지역의 경우, 합천과 경북 성주 지역과 함께 유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상남도 최초이자 최고인 함안 독립 만세 운동]
함안의 독립 만세 운동은 기독교인과 유림 두 축으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칠북·대산·칠원 3개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의 주동자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이들 지역에서는 정보의 교환, 군중의 동원 등에서 서로 협력하여 하나의 거점을 형성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은 동명 학교(東明學校)와 안신 학교(安信學校)를 거점으로 하였는데 유림이 주도하고 대종교(大倧敎)를 신봉하는 교사들이 기획하였다. 함안읍 만세 운동 다음 날 발생한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백이산서산 서당을 거점으로 유림이 중심이 되었고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군북 시장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주된 역할을 하였다. 즉 함안읍과 군북의 독립 만세 운동은 칠북·대산·칠원과는 달리 유림 세력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함안의 독립 만세 운동에는 다양한 세력이 참가하였고 형을 선고 받은 사람[92명]과 형량의 누계[136년]가 경상남도에서 함안이 가장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함안의 독립 만세 운동은 다양한 세력이 참가하여 격렬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픈 역사에 비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함안의 독립 만세 운동]
경상남도 최초의 3·1 독립 만세 운동으로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함안의 독립 만세 운동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함안의 독립 만세 운동으로 체포된 사람이 함안읍은 63명, 군북은 18명으로 많은 수의 함안 지역민들의 고통 받았지만 독립 만세 운동 이후에도 함안 지역에서는 끊임없이 항일 운동이 일어나고 일제가 이를 가혹하게 탄압해 함안 지역민들이 독립 만세 운동 및 독립운동 참가를 감추게 되었다. 둘째, 일제의 의한 독립 만세 운동 관련 판결문이 훼손되었고 6·25 전쟁으로 면사무소 등이 불타면서 독립 만세 운동 관련 문서들도 불타 기록이 사라짐으로써 복원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셋째, 일제 강점기 탄압이 극에 달해 지역의 유지들이 점차 발언권을 잃게 되고 일제에 충성하던 사람들이 지역 유지로 부상하면서 각종 사회단체를 장악하였으며, 특히 광복 이후 적산(敵産)으로 일시에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함안 사회를 장악함으로써 함안의 독립운동을 정리하고 지사들의 행적을 선양하는 작업에 악영향을 주었다. 넷째, 부산·경상남도3·1 운동사의 집필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과 당시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이 일제 경찰의 문헌 자료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로 인해 부산·경상남도3·1 운동사에 누락되었고 이로 인해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와 함안읍의 독립 만세 운동이 제대로 인정이나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 만세 운동의 역사적 의의]
『부산 경상남도 3·1 운동사』의 기록에 의하면 각 도별로 제일 처음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일자는 1919년 3월 1일 서울·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를 시작으로, 3월 3일 충청남도·경기도, 3월 5일 전라북도, 3월 9일 경상북도, 3월 10일 강원도·함경북도·전라남도 순으로 전개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경상남도 지역의 경우, 1919년 3월 11일 부산의 일신 여학교 3·1 독립 만세 운동을 필두로 경상남도의 3·1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경상남도의 3·1 독립 만세 운동은 도내로 퍼져 3월 13일 밀양에서, 3월 14일 창녕과 통영에서 일어났고 이후 각 도내의 군·면으로 확산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함안군의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이 누락된 해석이다. 이는 1919년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평화적인 시위를 하면서 각 마을을 순회한 후 자진 해산하여서 사상자가 없고 옥고를 치른 사람이 없어 크게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는 지리적으로도 내륙과 해안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고 타 지역보다 빨리 교회가 설립되어 기독교가 자리 잡은 곳이며 경명 학교를 설립하는 등 비교적 근대 문물을 빨리 수용하였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경상남도 지역에서 제일 먼저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시위의 인적 구성과 지역 간의 연계를 보면 구마산의 기독교 신도인 배동석과 함안의 이령리 교회 신자들이 독립 만세 운동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은 평화적 시위였고 이후 함안의 다른 지역, 나아가 경상남도 지역에 시위운동을 전파하였으며 이령리 사람들이 인근 지역의 시위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등 함안 및 인근 지역 시위에 큰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