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3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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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怨讐- 實踐者, 孫良源 牧師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덕산4길 39[구성리 685]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개항기 함안 출신의 기독교 목사.
[개설]
산돌 손양원(孫良源)은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맞서 저항한 항일 운동가이자, 두 자녀를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아 용서와 사랑의 화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함안 출신의 기독교인이다. 1902년(고종 39)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태어난 손양원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1908년(순종 2)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강제하자 우상 숭배라고 참배를 거부하여 광주 형무소, 청주 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의 와중에 두 아들이 반란군에 의해 납치 살해되었는데, 범인이 국군에 의하여 총살당할 상황에서 구명을 탄원하고, 아들을 죽인 범인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으면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애양원(愛養院)의 나환자들을 버려 두고 피난 갈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남아 있다 북한 인민군에게 체포 구금되어 1950년 9월 28일 여수 근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손양원 목사의 생애]
함안 지역의 기독교 역사는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한다. 사촌 교회, 이령 교회, 칠북 교회, 부봉 교회, 군북 교회, 하기 교회 등은 모두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기독교의 역사와 더불어 참 그리스도인으로 추앙받는 한 인물이 있다. 그는 한국 교회 인물 가운데 주기철 목사와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는 손양원 목사이다. 1949년 3월, 백범(白凡)김구(金九)는 26년 연하의 손양원 목사를 만나 평소에 애송하던 시를 건넸다. 그리고 김구는 3개월 뒤 운명하였다. 김구가 손양원에게 건넨 시와 손양원의 삶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눈 내린 들판 걸어갈 제[踏雪夜中去]
발걸음 어지러이 말 것은[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지나간 발자국[今日我行跡]
뒷사람의 이정표 될 것이기에[遂作後人庭]
손양원은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덕산4길 39[구성리 685]에서 아버지 손종일과 어머니 김은수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손씨 가문의 항렬을 따라 ‘연준’이라고 하였다.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손양원은 1913년 3월 12세 나이로 칠원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인 교장이 동방 요배를 강요하자 아버지로부터 우상 숭배는 절대 안 된다고 배운 손양원은 형식적이라도 절을 하는 것을 거부하여 퇴학을 당하였다. 그 후 다시 복학을 했지만 몇 번이나 퇴학을 당할 위기를 넘기고 1919년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3일 맹호은[F. J. L. Macra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손양원은 한동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다. 그러나 진학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어 부모님께 고학할 결심을 말하고 집을 떠나 상경하였다. 그리고 서울 중동 중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재학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버지가 3·1 독립 운동에 가담하여 마산 형무소에 투옥되자 학교를 중퇴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손양원은 가사를 도우며 마산 창신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20세가 되던 해 손양원은 못 다한 공부를 하기 위하여 동경스가모[巢鴨] 중학교 야간부에 편입하였다. 재학 기간 무교회 사상을 접하였고, 1923년 귀국하여 칠원 교회 집사로 피선되었다. 이듬해 부모님의 권유로 함안군 대산면 옥열리에서 나고 자란 19세의 정양순[본명 정쾌조]과 결혼하였다. 이즈음 그는 진주에 있는 경남 성경 학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성경 공부와 전도에 필요한 과목을 공부하였다.
한편 결혼과 동시에 손양원은 나환자와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부산 감만동에 사는 나 권사라는 여인을 통해서였다. 손양원은 감만동 교회에서 나환자들을 상대로 전도 활동을 하는 한편 1929년 3월 경남 성경 학원을 졸업한 이후에는 여러 곳에 개척 교회를 세웠다. 부산에서 울산으로 가는 중간쯤에 남창이라는 작은 마을에 남창 교회를, 그 후 양산에서는 양산 교회와 원동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고 본격적인 신학 수업을 위하여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려고 평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1935년 나이 34세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사 참배 반대 운동과 신행 일치의 삶]
손양원은 어렵게 공부하여 1938년 평양 신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하지만 그해 9월 신사 참배가 시행되면서 이를 반대한 평양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고, 졸업반 학생들은 졸업식도 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졌다. 손양원은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목적으로 부산 지역의 선교사[대리]가 되어 순회 전도를 하였다. 그리고 1939년 봄, 애양원에서 원가리[Rev. J. Kelly Unger] 선교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경상남도 노회는 그가 일본의 무교회주의자였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책을 즐겨 읽어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목사 안수를 거부하였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는 전도사 자격까지도 박탈하였다. 경상남도 노회의 이러한 처사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경상남도 노회가 총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행하기로 결정한 신사 참배를 그가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교회의 공식 기관들은 대부분 신사 참배를 인정하였으나 개척 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은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손양원은 애양원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지역에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사 참배에 대하여 조직적, 집단적 반대 운동보다는 독자적으로 저항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애양원 교회에서나 다른 교회에서도 설교 때마다 손양원은 신사 참배가 하나님의 십계명 중 제1 계명과 제2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절대로 금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곳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도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곧 망한다고 절규하였다.
친일 기독교 단체의 활동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친일 친목회 우문환은 신사 참배를 반대하던 목사 이승길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이승길, 김응순, 장운경 등으로 하여금 일본 각 교회를 시찰하게 하고, 일본 기독교 대회 의장 도미다[富田]를 초청하여 부산과 대구를 거쳐 평양에까지 와서 신사 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하며 신사 참배를 설득하였다. 이때 손양원은 주기철 등과 거세게 반대하였다. 결국 그는 신사 참배 거부로 감옥에 갇혔고, 전향을 하라는 간수의 회유와 검사의 위협에도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1937년 7월 손양원은 애양원의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신학교 재학 중 애양원 교회 집회를 인도한 일이 계기가 되어 초빙을 받게 된 것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외부인은 흰 장갑을 끼고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는 장갑도 끼지 않고 환자들고 악수도 하고 함께 식사도 하였다. 교역자로 부임하면서 그는 부인과 함께 이름을 개명하였다. 자신은 연준에서 양원으로, 부인은 쾌조에서 양순으로 고쳤는데, 이는 부부가 일생 동안 나환자들과 함께하기로 작정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1940년 그가 신사 참배 거부를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면서 차질이 생기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25일 손양원은 연행되었고 1941년 7월 21일 여수 경찰서에서 광주 구치소로 옮겨 재판을 받았다. 1941년 11월 4일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 받고 광주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3년 5월 17일 형이 만료되었다. 하지만 손양원은 풀려나지 못했다. 검사국에서 그가 밖에 나가면 또다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할 것이 분명하다고 하여 보호 관찰소로 보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옥고를 치르고도 전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무기 구금 언도를 받았다.
[용서와 화해의 순교자]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르고 광복이 되었으나 좌익과 우익의 사상 분쟁은 계속되었다. 혼란했던 광복 정국에서 1948년 10월 19일 이른바 여순(麗順) 사건(事件)이 발발하였다. 당시 좌익 학생들은 기독교는 친미적이라 하여 기독교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하였다. 손양원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이 이 와중에 살해되었다. 애양원에서 이인재 목사를 강사로 부흥회를 개최하던 중 소식을 접한 손양원은 비통한 가운데 며칠을 보내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두 아들을 죽인 범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범인을 취조하던 경찰은 피우던 담배를 떨어뜨리며 “손양원 목사! 손양원 목사!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거행된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손양원 목사는 ‘아홉 가지 감사’를 하였는데 이는 유명한 일화로 기록되고 있다.
손양원에게도 오늘 우리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은 원수보다도 미웠을 것이다. 그만큼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인간적 고뇌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손양원은 자녀-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사랑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고의 경지를 몸소 보여 준 실천이었다. 그리고 그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았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오히려 아들로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한 것이다. 그만큼 그는 한 영혼이라도 구하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6·25 전쟁의 와중에도 그는 전도와 봉사 활동을 쉬지 않았다. 전쟁 와중에 여러 차례 피신할 기회가 있었으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해 순교할 것을 결심한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많은 나환자와 신도들을 위해 피신하지 않았다. 1950년 7월 27일 여수 지역에는 인민군과 좌익 인사들의 세상이 되었다. 몸담고 있던 애양원 교회에서 끝내 피신하지 않고 부흥 집회를 열었다. 1950년 9월 13일 정오가 지날 무렵 인민군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수 율촌 분주소 소장을 비롯한 다섯 사람이 무장을 하고 애양원으로 들이닥쳤고 손양원을 연행하였다. 감옥에 갇힌 그는 공산당과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생각으로 신앙 고백을 적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의 날, 인민군들은 쫓기고 있는 상황에서도 감방에 있던 사람들을 묶어서 밤 10시 넘어 순천으로 출발하였다. 100리나 되는 자갈길을 걸어서 이동하던 중에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서울 수복의 기쁨으로 가득하던 시기에 손양원은 요란한 총성 소리와 함께 여수 근처 미평의 한 과수원 안에서 순교하였다.
[사랑의 실천자, 손양원의 기독교관]
손양원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이웃을 섬기고자 한 참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의 벗이기를 원했고, 병든 자와 함께하며 하늘의 위로를 전하는 소박한 전도자이기를 원했다. 그는 평소 “내가 죽을 때와 장소는 강당에서 설교를 하다가 죽거나 노방에서 전도하다가 죽거나 고요한 곳에서 기도하다가 죽거나 할지언정 약사발 들고 앓다가 죽을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그는 일제 강점의 치하에서 때로 민족의 아픔을 싸매기도 하며 국가적, 사회적 죄악을 통렬히 비판하여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탄압하는 일제의 엄혹한 학정 아래에서 민초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절망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몸소 제물이 되기까지도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광복 후 손양원의 활동은 각종 집회의 인도에서 두드러졌다. 1948년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은 이후 그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그 어떤 설교자와도 비견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선한 싸움, 사랑과 용서에 대한 언행일치의 모범은 그 어떤 설교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손양원의 사상에 영향을 준 인물로는 아버지인 손종일 장로, 일본도쿄의 판교 성결 교회 목사였던 나카타 주지[中田重治], 주기철 등이 꼽히고 있다. 그리고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손양원에게 나라 사랑과 민족애로 나타나게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의 신앙 정신은 아들에게 이어졌고 다시 손자 손동이, 손동신에게 이어져 3부자의 순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손양원의 생애는 한마디로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는 모든 인류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보여 준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사랑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뿐 “나는 나의 신앙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할까 봐 두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원수와 소외된 이웃[나환자]에게 보인 그의 사랑의 실천은 그를 ‘성자’, 나환자의 아버지, 사랑의 원자탄 등 여러 이름으로 평가하게 하였다.
손양원의 사상은 자족 정신과 효, 그리고 사랑의 실천으로 요약되기도 한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어떠한 환경, 어떤 조건 속에서도 자족하였다. 이 자족 정신으로 인해 그에게 밀어닥친 숱한 고난과 역경들을 극복하고, 기쁨과 소망으로 승화시켜 신앙의 승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 설교에서 효를 ‘자녀의 의무요, 당연한 본분’이라고 하고, 부모에 대한 효는 당연한 의무와 도리로서 행하는 것인데, 그 행위의 결과는 약속 있는 축복으로 귀결(歸結)된다고도 하였다.
김구는 1949년 3월 26일 손양원을 만났다. 김구는 그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손양원을 신뢰하였고, 자신이 설립한 창엄 학교의 교장으로 그를 초빙하기도 하였다. 그가 암살되기 불과 3개월 전, 특별히 「답설야중거[踏雪夜中去]」란 시를 그에게 선물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분단된 민족의 현실과 이를 극복해 낼 지도자의 상을 그리면서 본받을 만한 지도자 상으로 그를 상정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