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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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本- 阿羅伽耶 - 文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안홍좌 |
[정의]
일본 열도에서 찾은 고대 삼국 시대 아라가야 사람과 문화.
[개설]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 교류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가야(伽耶) 시기에 이르러 그 관계는 더욱 확대되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선진 문화뿐 아니라 가야의 문화가 일본 열도로 전파되었다. 그러한 흔적들은 현재 일본 열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가야 중에서도 아라가야(阿羅伽耶)의 문화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아라가야 사람들이 옮겨 가서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흔적도 많다. 일본 열도 곳곳에서 전승되고 있는 ‘아라’ 혹은 ‘아야’와 관련된 여러 지명 및 신사 이름들과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는 아라가야계 유물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 등에 기록되어 있는 아라가야 계통의 사람들이 그것이다.
[아라가야의 멸망]
아라가야의 멸망 과정은 알 수 없다. 아라가야는 가야 제국과 함께 서진하는 신라와 동진하는 백제로부터 가야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529년 안라국(安羅國)에서 고당 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고, 541년과 544년 백제성왕(聖王)이 개최한 ‘사비 회의’에 참가도 하였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는 가야 지역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 제국은 백제에 부용해서 신라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554년 관산성 전투가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벌어졌고, 가야 제국은 백제와 연합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성왕이 전사하고 전쟁에 패배함으로써 백제는 가야 지역을 포기하였고, 신라는 가야 지역으로 본격 진출하였다.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23년(562)에 “정월에 신라가 가야 제국을 쳐서 멸망시켰다.[어떤 책에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 한다. 총칭하여 임나이고 개별적으로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등 모두 10국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아라가야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전 560년에 멸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가야와 일본의 교류]
한국 고대 사회에서 삼국을 비롯한 가야의 여러 나라와 일본 열도의 교류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본 열도의 정치 집단들은 가까운 거리의 가야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과 가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가야를 표현하는 ‘가야(加耶)’·‘가라(加羅)’에 대한 일본어 표기인 ‘가라(から)’[唐·韓·漢·加羅·加耶·迦羅·伽羅·伽耶]는 일본어 사전에 의하면 “일본어 내지는 일본 문화를 모르는 외국인 또는 외국제 물건”으로 정의되어 있다. 즉 일본인에게 가야 사람은 최초의 외국인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서기』 「수인기(垂仁紀)」 2년(81) 기록을 들 수 있는데, “이 해에 임나인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였다. 아마도 선황의 시대에 알현하러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 그래서 소나갈질지에게 융숭하게 상을 주었다. 아울러 붉은 비단 100필을 주어 임나 왕에게 하사하였다.”에서 알 수 있다. 즉 기원전 후인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임나, 당시 삼한 시기에 해당하는 가야 지역 세력과 왜가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15년(554) 12월 기사에는 백제성왕과 안라[아라가야]의 여러 왜신, 임나의 여러 나라 한기들이 신라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왕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이에 왜가 군사를 파병해 신라에 대항해 연합군이 전쟁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가야와 왜가 특히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제국이 왜와 가야 멸망 시기까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열도에서 보이는 아라가야 사람들]
아라가야가 멸망하자 일본 열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흔적들은 일본호쿠부큐슈[北部九州], 오카야마[岡山], 오사카[大阪], 나라[奈良], 시가[滋賀] 등의 지역들에 남아 있다. ‘가라, 아라, 아야, 가야’ 등의 이름이 남아 있는 여러 신사(神社)와 지명, 고분 유적, 그리고 거기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유물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와 『풍토기(風土記)』, 『신찬성씨록』 같은 고대 일본의 문자 기록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815년 편찬된 기나이 지역[현 나라·오사카·와카야마 일대]에서 살았던 1,182씨족을 정리한 『신찬성씨록』 에 기록된 가야계 씨족은 기나이 지역 대부분에 분포하고 있다. 오사카 남부에 위치했던 섭진국(攝津國)의 아라라노키미[荒荒公]는 아라와 음이 통하는 것으로 보아 아라가야계 씨족으로 추정된다. 또한 야마토 정권에서 중요한 관료를 많이 배출한 야마토노아야[東漢]와 아야히토[漢人]는 가야계 씨족으로 밝혀졌다. ‘아야(阿耶)’라는 발음이 ‘안라’ 혹은 ‘아라’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 씨족들에 아라가야 사람들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더해 가야계 왜인으로 아라가야에 파견되었던 왜의 사신 가와치노아타히[하내직(河內直)]도 있는데, 그의 거주지였던 가와치[河內] 지역에서 가야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로는 가와치의 구로히메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수의 아라가야계 토기인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를 들 수 있다. 또한 가야 지역에 파견된 또 다른 왜의 사신 기비노오미[길비신(吉備臣)]의 근거지인 기비, 즉 오카야마에도 가야인이 거주하였다는 증거가 있다. 즉 『국조본기(國朝本記)』에 8세기께까지 기비 지역을 지배했던 씨족 중 아나쿠니노미야츠코가 보이는데, 이 사람은 오카야마 남부를 다스리던 아라가야계 도래 씨족으로 추정된다. 이에 더해 『일본서기』와 『퐁토기』에 아야노하타오리와 아나노하타오리 등이 기비 지역에서 직물 생산을 담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도 아라가야계 이주민으로 추정된다.
고대 일본의 지명 전승에도 아라가야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기비 지방 등에는 아라가야와 관련된 많은 지명이 보이는데, ‘안나군’이나 ‘아나군’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교토 동쪽의 거대 호수 비파호(琵琶湖)[673.9㎢] 남단 시가[滋賀] 현에도 아라가야 사람들이 이주해 신앙생활을 하던 아라 신사[安羅神社]가 남아 있다. 구사츠[草津] 역 인근 5㎞ 이내에는 아라 신사라는 이름을 가진 신사가 무려 3개나 있다. 신사의 대문 격인 도리이[鳥居]에는 ‘안라 신사(安羅神社)’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신관(神官)은 분명히 ‘아라진자’라고 되어 있어 아라가야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이곳 신사의 유래를 알려 주는 안내판에도 함안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신사들이 위치한 현재 마을 이름도 ‘아나무라[穴村]’라 하여 ‘아나’라는 아라가야를 칭하는 말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 많은 아라가야계 사람들이 살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일본 열도에 보이는 아라가야 토기]
일본과 아라가야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물질적 증거가 토기이다. 그중에서도 명확한 것이 아라가야의 대표적 토기 양식인 굽다리에 불꽃무늬 구멍이 뚫려 있는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화염문 토기]’이다. 이런 아라가야 토기가 일본 열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나라 현가시하라 시청 소속 발굴단이 ‘신도우 유적’에서 파손된 상태로 발견한 토기 조각을 복원하자 아라가야의 대표적 토기인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로 드러났다. 이들은 다른 유물들과 함께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부속 박물관에서 ‘바다를 넘나든 교류-가시하라의 고분과 도래인’이라는 주제의 특별전에 전시되었다. 이것은 현재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고 있는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와 전체적인 모양, 색깔, 재질 등이 똑같다. 이로 보아 아라가야에서 제작된 토기가 이곳 나라 현까지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당시 나라 현과 아라가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나라 현 덴리 시 ‘후루 유적’에서도 아라가야의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와 닮은 토기가 출토되었다. 나라 현 ‘미나미야마 4호분’의 기마 인물형 토기는 김해 지역 양식으로 추정되기도 하였으나, 함께 나오는 유물들의 형태로 보아 아라가야 양식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나라 현 ‘신도 유적’에서 출토된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와 사격자문 원통형 배도 아라가야 양식으로 추정된다. 나라 현 동부의 미에 현 쓰 시의 ‘로쿠다이 유적’에서도 아라가야 양식 토기가 발굴되었고, 나라 현 서부 에히메 현의 ‘사루가타니 2호분’에서도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같은 에히메 현의 ‘후나가타니 유적’에서도 아라가야 양식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이외에도 오사카 시 사카이 ‘오바데라 유적’과 ‘구호우지 유적’에서도 불꽃무늬 굽다리 접시를 비롯한 아라가야 양식 토기가 여러 점 출토되었고, ‘노나카 고분’에서도 아라가야 양식의 파수부단 경호가 출토되었다. 나가사키 현의 ‘구와바루 고분’과 ‘고후노사에 유적’, 후쿠오카 현의 ‘미쿠모 유적’과 히로시마 현 ‘이케노우찌 2호분’, ‘스나시리 유적’, 오이타 현 ‘시모고우리 유적’에서도 아라가야 양식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이처럼 일본 열도의 오사카와 나라 지역 여러 곳에서 아라가야 양식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들 토기는 대부분 고분 시대[3세기 말~7세기 초] 유적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것은 고분 시대에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였던 나라 현뿐 아니라 그 동쪽까지도 아라가야의 토기 문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가 전파되었음을 의미한다.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는 일본 현지에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후루 유적’이나 ‘오바데라 유적’에서 출토된 아라가야 양식 토기에서 함안 지역에서 출토의 것과 달리 문양과 모양이 조금씩 변형된 점이 보인다. 또한 가가와 현 ‘미야야마 요’, ‘미나니사부로이케요’, 오사카 부 ‘오바테라 요’ 등 초기 스에키 요에서도 아라가야 양식 굽다리 접시가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라가야 양식 토기가 한반도에서의 직접적인 수입뿐 아니라 일본 현지에서 직접 제작되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이다. 즉 아라가야 사람들 혹은 아라가야에서 기술을 익힌 일본인들이 일본 현지에서 토기를 제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 열도와 아라가야의 교류, 그 현재적 의미]
일본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기록, 그리고 전승되는 지명들을 통해 아라가야 사람들이 일본 각지에 거주했거나 교류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구나 아라가야계 이주민으로 추측되는 야마토노아야[東漢] 씨와 아야히토[漢人] 씨들이 야마토 정권에서 중요한 관료를 많이 배출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전했던 선진 문화와 기술 그리고 신앙 등이 고대 일본의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일본에 이주했던 아라가야인과 문화를 이해할 때 단순한 선후 관계나 주종 관계 혹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국가 혹은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과거의 사실을 이용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물론 아라가야계 이주민들이 여러 가지 선진 문화를 전파했고, 그 결과 일본 열도에 큰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일본 열도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어떤 세력을 형성해 인근 지역을 지배하고 그들 위에 군림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자료들이 발견되는 지역 일대를 아라가야인들이 지배했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들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어떠한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일본 열도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아라가야 사람들이 일본 열도의 현지인들과 어떠한 관계 속에서 살아갔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가야와 왜와의 관계는 후대 사람들, 즉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 낸 ‘임나일본부설’에서 벗어나야 한다. 향후 한국과 일본과의 올바른 국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야와 왜의 관계는 정치적 목적이 아닌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