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 이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672
한자 載寧 李氏
이칭/별칭 안릉 이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집필자 류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재령 - 황해도 재령
입향지 모곡 -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세거|집성지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성씨 시조 이우칭(李禹偁)
입향 시조 이오(李午)

[정의]

이우칭을 시조로 하고, 이오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재령 이씨(載寧李氏)는 황해도 재령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이를 '안릉 이씨(安陵李氏)'라고도 한다. 2000년도 통계 자료에 의하면 전국 가구 수는 1만 6000여 호이며, 종원은 약 5만 여 명이다. 이 중 약 80% 이상이 함안에 입향한 모은(茅隱)이오(李午)의 후손이다.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 16명, 무과 급제자 9명을 배출하였다. 김포파, 청도 식성군파, 청도 사정공파, 밀양파, 근재공파, 율간공파, 사의공파 등으로 분파되어 전국에 산재하고 있다.

[연원]

재령 이씨 시조 이우칭(李禹偁)은 경주 이씨소판공(蘇判公)이거명(李居明)의 후손이다. 고려조 보조공신에 책록되고 문하시중을 지낸 후 재령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시조 이후의 정확한 기록이 없어 고려 말 상장군 이소봉(李小鳳)을 중시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 오고 있다.

이소봉의 두 아들은 중랑장(中郞將) 이일상(李日祥)과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이다. 이일선은 고려가 망하자 가솔을 거느리고 밀양에 내려와 은거하였으며, 6남 1녀의 자손은 전국에 걸쳐 번성하게 되었다. 특히 넷째 아들 모은이오는 함안군 모곡으로 이거하여 모은공파(茅隱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오는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비(高麗洞壑碑)를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하였다. 그는 아들에게도 조선 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神主)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입향 경위]

이오는 고려 말에 아버지 이일선이 개성에서 밀양으로 내려와 은거할 때 함께 남하하였다. 그 후 의령 두심동(杜心洞)에 은거해 있던 만은(晩隱)홍재(洪載)와 함안에 은거해 있던 금은(琴隱)조열(趙悅)과 서로 왕래하던 중 함안군 모곡에 자미화(紫薇花)가 활짝 핀 것을 보고 그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였다.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가 편찬한 『함주지(咸州誌)』에 "공이 고려 말기에 응천(凝川)[지금의 밀양]으로부터 의춘(宜春)[지금의 의령]을 왕래하면서 함안군 모곡에 이르러 무성한 수풀 사이에 자미화가 활짝 핀 것을 보고 마침내 살 곳으로 정했다."라고 은거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현황]

함안에 거주하고 있는 재령 이씨는 대부분 이오의 후손이다. 2015년 현재 고려동에는 30여 호의 후손들이 동족 마을로 그 전대의 업을 잇고 있다. 『함주지』에 "이 자미화는 재령 이씨와 더불어 성쇠를 같이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처럼 모은의 후손은 이후 계속 번성하여 재령 이씨의 중심 세력을 이루었다. 모은의 아들은 참판에 증직된 이개지(李介智)이다. 큰손자 근재(覲齋)이맹현(李孟賢)[1436∼1487]은 문과에 급제하고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홍문관 부제학과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아들 7명을 두었는데, 그 후손들은 주로 경상북도의 영해·안동과 경상남도의 진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17세기 퇴계학파의 종장인 갈암(葛庵)이현일(李玄逸)[1627~1704]과 그 아들 밀암(密庵)이재(李栽)는 이맹현의 후손이다. 모은의 둘째 손자 율간(栗澗)이중현(李仲賢)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과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지냈다.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이포(李玸)는 김해로 이거하였으며, 둘째 아들 덕고(德皐)이무(李珷)의 후손은 함안군 모곡을 비롯한 함안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그 후 이중현의 증손 대에 이르러 미촌공파·간옹공파·모촌공파·갈촌공파로 다시 분파되었다. 특히 셋째 증손 모촌(茅村)이정(李瀞)[1541∼1613]은 남명(南冥)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창원 대도호부사·청주 목사를 역임하고 만년에 함안에서 진주 수곡의 원당으로 이거하여 덕천 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문집이 전하며, 후손은 주로 하동 양구에 살고 있다. 넷째 증손 갈촌(葛村)이숙(李潚)[1550~1615]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으며, 장성 현감·합천 군수를 역임하였다. 후손의 숫자가 많으며, 함안과 진주에 널리 세거하고 있다.

모은의 셋째 손자 이숙현(李叔賢)은 절사(絶嗣)되었으며, 넷째 손자 이계현(李季賢)은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지냈다. 아들 4명을 두었는데, 장자 이변(李玣)의 후손은 창원·진해·진주·밀양 일대에 살고 있다. 둘째 이침(李琛)의 후손은 진주 진성면·대곡면, 전라남도 남원 일대에 세거한다. 셋째 이종(李琮)의 후손은 하동 옥종·진주 수곡·전남 광양에 거주한다. 넷째 이전(李琠)의 후손은 함안에 살고 있다.

현재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있는 고려 종택(高麗宗宅)은 이오가 처음 정착한 이후 그 장손 이맹현이 서울로 이주함으로써 차손 이중현에게 맡겨졌다. 이중현의 장자 이포(李玸)가 김해로 이주하여 그 아우 이무(李珷)에게 맡겨졌다. 지금은 이무의 16세손 이홍섭(李弘燮)이 고려 종택과 향사를 수호하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2길 37-10[모곡리 580]에 있는 고려동 유적지(高麗洞遺蹟址)는 1983년 8월 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이오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담장을 쌓고 살았던 곳이다.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 담장, 고려 종택, 자미단 고려전(紫微壇高麗田), 자미정(紫微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井) 등이 있었다. 6·25 전쟁 동안에 대부분 소실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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