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3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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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烽燧 |
영어공식명칭 | The Becon Signal Fir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석환 |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정치, 군사적인 목적으로 운용되던 조선 시대의 통신 제도.
[개설]
봉수(烽燧)란 횃불과 연기로서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를 중앙에 알리는 군사 통신 제도의 하나이다. 조선 시대의 군사 통신 수단을 대표하는 것으로 조선 왕조 500여 년간 국가적인 기간 통신망으로 운영되었다. 횃불과 연기로 국경과 해안의 안위를 약정된 신호 전달 체계에 따라 본읍(本邑)과 본영(本營), 본진(本鎭)이나 중앙에 전하였다. 삼국 시대부터 활용되기 시작한 후 고려 시대에 이르러 정례화되었고, 이후 조선세종 대에 크게 정비되어 1895년(고종 32)까지 국가적 규모로 운영되었다.
현재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약 500여 기의 봉수터가 연안의 만(灣)이나 섬 혹은 육지 내륙의 정상이나 산중에 소재하고 있다. 봉수는 성격에 따라 수도에 위치하였던 경봉수(京烽燧), 변경 지역의 연변 봉수(沿邊烽燧)와 중앙의 경봉수를 연결하는 육지 내륙에 위치하였던 내지 봉수(內地烽燧), 그리고 국경과 해안가 및 도서 지역 등에 두었던 연변 봉수로 구분된다. 이외에 조선 후기에 군사적으로 중요하였던 영(營)과 진(鎭)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하여 본읍과 본진으로만 연락하도록 운용되었던 권설 봉수(權設烽燧)가 있다.
조선 시대의 봉수 거화법은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신호를 전달하였는데, 변경 정세의 완급에 따라 1거(擧)에서 5거를 들게 하였다. 봉화 노선은 총 5개의 중요 노선이 있는데 이를 직봉(直烽)이라고 하며 경상남도 지역은 직봉 제2 노선에 해당된다. 이 직봉 노선 외에 간봉(間烽) 10개 노선이 직봉 사이에 연결되어 있었다.
[현황]
함안 지역의 봉수는 모두 2개소로 함안 파산 봉수대(咸安巴山烽燧臺)와 안곡산 봉수대(安谷山烽燧臺)가 현존하고 있다. 함안 파산 봉수대는 진동~함안 간을 넘나드는 한치(限峙) 서쪽의 봉화산[649.2m] 북쪽 최고봉에 위치하며 1999년 8월 6일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220호로 지정되었다.
함안 파산 봉수대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함안군 산천조에 "남쪽으로 진해현(鎭海縣)가을포(加乙浦)에 응하고, 북쪽으로 의령현(宜寧縣)가막산(可莫山)에 응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가을포 봉수[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요장리]를 받아 가막산 봉수[의령군 정곡면 적곡리 봉화산]로 중계하는 간봉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함안지(咸安誌)』 봉수조에서 봉수대의 규모와 배치 인원 및 장비 등에 대해 상세히 밝히고 있으며, 현재 봉수대가 위치한 산 정상에는 바닥 지름 8m, 높이 3.5m의 붕괴된 봉수대와 이를 관리하던 집터가 남아 있다. 이 봉수대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지표상에 드러난 붕괴된 구조물만으로는 알기 어려우나,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파산 봉수조가 증보된 것이 아닌 것에 근거해 볼 때 늦어도 1491년(성종 22)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곡산 봉수대는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안곡산 정상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칠원현 봉수조에서 "안곡산 봉수(安谷山烽燧)는 현 서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남쪽으로 창원부성황산(城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영산현봉산(峯山)에 응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24에 소개된 봉수망(烽燧網)의 제2거 간봉 6의 중계소 중 하나이며 천성보(天城堡)[진해 웅천]-사화랑(沙火郞)[진해]-고산(高山)[진해]-성황당(城隍堂)[창원 봉화재]-안곡산[함안]-소산·봉산(所山·峯山)[창녕 영산]으로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안 파산 봉수대와 안곡산 봉수대는 1894년(고종 31) 전국의 팔로 봉수(八路烽燧) 폐지 시 모두 폐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