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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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悅 |
영어공식명칭 | Jo Yeol |
이칭/별칭 | 금은(琴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광철 |
[정의]
고려 후기 함안 출신의 문신.
[개설]
조열(趙悅)은 고려공민왕(恭愍王)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면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유하였고, 고려 말 벼슬을 버리고 함안으로 낙향하였다. 조선 건국 후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호는 금은(琴隱). 증조할아버지는 삼사 우윤을 지낸 조희(趙禧)이고, 할아버지는 조지흥(趙之興)이다. 아버지는 판도판서 조천계(趙天啓)이다.
[활동 사항]
『함주지(咸州誌)』 인물조에서는 조열이 공민왕 대에 공조 전서로 활동하였고, 처음 함안의 평광(平廣)에 살다가 뒤에 산팔리(山八里) 원북동(院北洞)으로 옮겨 살았다고만 전한다. 조선영조(英祖)에서 순조(純祖) 대에 걸쳐 활동했던 이채(李采)[1745∼1820]가 쓴 「고려 공조 전서 조공 묘갈명(高麗工曹典書趙公墓碣銘)」에는 조열의 활동이 좀 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조열의 행적은 맹사성(孟思誠)이 지은 만은(晩隱)홍재(洪載)의 행장이 전해지면서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홍재의 행장에는 어느 날 밤 판서 성만용(成萬庸), 평리사(評理事) 변빈(卞贇), 박사 정몽주(鄭夢周), 전서 김성목(金成牧) 등이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논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비간(比干)은 죽었고 미자(微子)는 떠났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하여 결의하였다고 한다. 홍재는 귀향하기로 마음먹고 삼가(三嘉) 대평촌(大坪村)으로 우거(寓居)하여 이곳을 두심동(杜尋洞)이라 하였다. 이때 함안에 우거하고 있던 조열과 이오가 이곳을 서로 왕래하면서 시사(時事)를 걱정하였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이 모여서 울며 비가(悲歌)를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맥수(麥秀), 채미(採薇)의 비가와 비유하였다. 후인들이 그 의리를 흠모하여 운구 서원(雲衢書院)을 지어 봉향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문집인 『금은 실기(琴隱實記)』가 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하림1길 80-30[하림리 363]의 함안 조씨 묘역 안에 있는데 길이 4.6m, 폭 3.2m, 높이 1.5m의 방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