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1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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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南傳統文化-眞髓玉-工藝 |
영어공식명칭 | Essence of Haenam Traditonal Culture, Precious Stone Crafts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오 |
옥공예 명인 제31호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명량로 953[옥동리 1078] | |
옥공예 명인 제32호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명량로 976[옥동리 8-35] | |
옥공예 명인 제33호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명량로 974[옥동리 8-28] |
[정의]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서 옥돌을 쪼아 다듬어 생활 도구나 치렛거리 등으로 맵시 있고 쓸모 있게 만드는 공예.
[개설]
옥(玉)은 동양 문화권을 대표하는 보석이며, 일찍부터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 장신구로도 이용되었다. 해남군은 예로부터 옥매산광산과 성산광산에서 채굴한 옥돌을 가공하여 만드는 옥공예품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옥매산이 있는 황산면 옥동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옥공예품 생산지로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황산 옥공예의 전통을 이어오는 장인들이 있다. 해남군 옥공예 향토문화재인 김육남, 박윤옥, 박상훈 등 명인 3인의 생애와 전승 과정 등에 관해 살펴본다.
[해남 옥공예의 역사]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는 옥공예품을 생산·판매하였던 옥공예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옥공예거리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다. 도로변 양편에 20여 개가 넘는 옥공예 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한 공장마다 10여 명이 넘는 인력들을 고용해 옥공예품을 생산하였다. 해남에서 채석되는 옥석은 빨강, 노랑, 검정 등의 다채로운 색깔을 띠고 있고, 손으로 깎고 다듬을 수 있을 정도로 물러 섬세하게 조각할 수 있다.
옥동마을에 옥공예거리가 형성되었던 것은 인근에 옥이 나오는 옥매산광산과 성산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옥매산광산은 납석(蠟石), 명반석(明礬石) 등이 산출되는 곳이다. 옥매산(玉埋山)[168m]의 옛 이름은 매옥산(埋玉山)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기록을 보면 “화반석(華班石)이 황원현의 매옥산(埋玉山)에서 나온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매옥산’이 뒤에 ‘옥매산’으로 바뀌었는데, ‘옥돌이 매장되어 있는 산’이라는 의미에서 지명이 유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옥매산(玉梅山)으로 기재되어 있다. 황산면과 마산면(馬山面)의 경계에 있는 성산(星山)에서도 납석이 산출된다.
옥매산과 성산의 두 광산은 일본의 아사다화학공업주식회사[옛 시카마 화학공업주식회사]가 1916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개발·운영하였던 곳으로 명반석 채취 등을 채취하였다. 명반석[백반석]은 군수물자로 알루미늄 제련 원료로 쓰이는데, 채취된 돌을 배를 통해 황산 입암포에서 일본 나고야 비행기 제조 공장으로 운반하였다. 지금도 옥동리 옥동선착장 인근에는 당시 명반석을 저장하기 위해 세운 저장고가 있고, 선착장 밑 부분에는 명반석을 운반하는 데 사용한 레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번창했을 때는 옥매산광산에 1,200여 명, 성산광산에 2만여 명의 인부가 있을 만큼 번성을 누렸다고 한다. 인근 춘정마을에 20여 개 입원실을 갖춘 병원이 운영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이곳의 번성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명반석 등과 함께 옥돌도 생산되었는데, 이곳에서 나오는 옥을 가지고 일본인이 인력을 고용하여 옥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옥공예 공장은 처음 우수영에 있었으나 1940년대에 지금의 황산 옥동마을로 옮겨왔다고 한다. 옥공예 제품이 인기를 끌자 옥동마을에는 우후죽순 옥공예 공장이 들어서게 됐고, 대표적인 옥공예 생산지가 되었다.
이곳은 1960년경부터 전국 최고 옥공예 생산단지로 명성을 떨쳤는데, 장수와 복을 준다는 동물상과 보석함, 체스 등을 제작하였고, 이 제품들은 외국인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3년 유류파동으로 약 50% 정도 폐업되었지만 곧이어 1975년부터 1990년까지는 야간작업을 해도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수석 가게나 승진한 사람들의 탁상용 명패와 도장 주문 등 국내에서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공무원 월급보다도 더 많이 수입을 올렸다. 옥동거리에서는 당시 약 200명의 옥가공 기술자들이 일을 하였다.
그러던 것이 1990년 중국과 수교 이후 중국을 포함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베트남, 브라질 등지에서 수입품이 많이 들어오면서 옥공예 사업이 사양길에 들게 되었다. 옥공예 기술자들도 옥동을 떠났고 2000년대에는 10명으로 줄어들었다. 해남군이 황산 옥공예를 살리기 위해 1997년에 옥동마을 길가에 전시 판매장을 건립하였지만, 2010년대 진도 방면으로 4차선 길이 새로 생기면서 옥공예는 더욱 쇠락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해남 옥공예의 전통을 잇고 명성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고가의 작품 제작과 함께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도장, 명패, 낙관 등 주문자의 취향에 맞는 공예품을 만들어 내며 옥공예 지키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해남군에서도 이러한 노력들을 인정하여 2015년 옥공예 명인 3인을 해남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옥공에 장인 김육남 명인]
1. 성장 과정 및 활동
옥공예 장인 김육남(金六男)은 1953년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5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김육남의 아버지는 김동현(金東鉉)으로 장흥에서 거주하다 강진 칠량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본디 김동현은 서당 훈장을 하다가 전업을 하여 짚공예품을 만들었다. 슬하에는 6남 1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김장환, 다섯째 아들 김수환, 여섯째 아들 김육남이 옥공예에 종사하였고, 지금은 김육남만이 전업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육남이 옥공예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손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여덟 살 때부터 도토리나 상수리 등을 가지고 도장을 팠는데, 이것을 마을 이장이 주문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이장 부인[해남 황산 신전리 출신]이 해남에 가면 옥매산에서 옥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그 옥에다 도장을 새기는 것이 더 좋겠다고 조언을 해 주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김육남은 아홉 살 때 해남 황산에서 옥 조각을 얻어다 과제물을 만들어 제출한 결과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김육남이 옥공예 기능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시기는 1969년에 황산옥동마을 옥공예소에서 직공으로 일하면서이다. 당시 김육남은 강진 칠량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낮에는 목동생활을 하고, 밤에는 한학을 배우다 해남 황산으로 옮겨와 독립하였다. 김육남은 황산에서 박창중이 운영하던 ‘일성공예’ 등 옥공장에서 5년 정도 일을 하면서 다양한 옥 다루는 기능을 배웠다. 그리고 20대 중반인 1977년에는 부곡리 477번지의 자택에 공장을 차려 자립하였다. 그때 당시 부곡리에는 약 10여 집이 옥공예 일을 전문으로 하였다.
이후 1987년 11월 3일 부곡리에서 황산면 옥동리 1078번지로 이사하였다. 이곳은 당시 서울 사람이 ‘사당공예사’라는 이름으로 옥공예 공장을 운영하다 폐업한 곳이다. 이곳은 ‘화신공예사 제작판매장’인데, 1층은 작업장, 2층은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1999년 11월에는 명량로를 사이에 두고 ‘화신공예사 제작 판매장’과 마주보고 있는 곳[옥동리 29-8]에 전시관 겸 살림집을 지었는데, 이곳이 ‘화신공예’이다. 1층은 전시 공간, 2층은 주거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시 품목은 김육남이 제작 출품한 작품을 비롯하여 약 1,000여 점에 이르는데 이 중 50%는 수입품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화신’이란 상호는 김육남의 딸 김혜화와 아들 김혁신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와 붙인 것이다.
처음에는 두꺼비, 용, 거북이, 사자, 호랑이 등을 주로 제작하였으나 낙관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주로 도장과 낙관, 서화용품[벼루, 연적, 문진 등] 등을 제작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하지 않는 용과 사군자 등의 그림을 직접 밑그림 없이 예술적으로 새겨 넣는다.
2. 주요 입상 경력
김육남 명인의 중요 대회 입상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대회 입상 경력을 살펴보면 전국공예품경진 전라남도 예선대회에 출품하여 1992년 제22회 대회 입선, 2000년 제30회 대회 장려상, 2001년 제31회 대회 입선, 2002년 제32회 대회 우수상, 2005년 제35회 대회 입선, 2006년 제36회 대회 장려상, 2007년 제37회 대회 은상, 2008년 38회 대회 장려상, 2009년 제39회 대회 동상, 2013년 제43회 대회 입선 등의 경력이 있다. 또한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전라남도 예선대회에도 참여하였는데, 2002년 제5회 대회 입선, 2004년 제7회 대회 장려상, 2011년 제14회 대회 일반상, 2012년 제15회 대회 은상을 수상하였다.
전국 단위 경진대회에서도 다양한 입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먼저 관광기념품 공모전에 출품하여 1998년 제2회 대회 입선, 2011년 제14회 대회 특선, 2013년 제16회 대회 동상, 2013년 제16회 대회 동상을 수상하였다. 아울러 (전국)공예품대전에서는 2002년 제32회 대전 장려상, 2003년 제33회 대전 입선, 2007년 제37회 대전 장려상, 2008년 제38회 대전 입선, 2009년 제39회 대전 입선, 2010년 제40회 대전 입선, 2014년 제44회 대전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특히나 2010년 제40회 대한민국 공예품대전과 2016년 제46회 대한민국 공예품대전에서는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여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아울러 2013년에는 한국관광공사로부터 2023년까지 ‘한국관광명품’ 인증마크를 사용할 수 있는 승인을 받았고, 2007년에는 세계명인 문화예술대축제에서 연옥공예부분으로 대한명인 인증서[제07-188호]를 받았다. 또한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2015년 7월 옥공예분야 해남무형문화재로 선정[향토문화유산 제31호]되었다.
3. 옥공예 제작 및 현재적 상황
옥공예 재료인 원석은 해남 황산면 부곡리 성산광산의 것을 80% 정도, 옥동리 옥매산광산의 것을 20% 정도 구매하여 사용한다. 주로 도장과 낙관 제작용으로 사용하는데 성산광산의 것을 서울 사람들이 인정해 주기 때문에 더 많이 쓰고 있다. 옥매산의 것은 글을 새기는 데 적합하지 않아 주로 호랑이나 두꺼비, 사자 등을 제작하는 데 사용한다.
옥 공예품을 만둘 때는 쇠톱, 활비비, 정, 갈이틀, 물레, 조각도 등을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현대적으로 개발된 다양한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원석 절단기계인 절단기를 비롯하여 둥글게 깎는 작업 등에 쓰이는 선반기, 연마용 핸드그라인더, 두꺼비나 거북이 등을 제작할 때 쪼아내는 에어컴프레서, 홈 등을 파고 마무리 작업 등 다양하게 쓰이는 조각도 등이 있다.
제작 과정은 품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6단계로 나누어져 이루어진다. 원석 채석-디자인-절단-성형-세부조각[구멍 뚫기·홈파기]-광택의 순이다.
예전에는 지역민들이 옥공예를 가난하고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옥 일 하는 놈’이라 칭하며 농사짓는 사람보다 더 낮게 보았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옥 일 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고, 또 공예작업을 예술작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김육남은 예전부터 자신이 제작한 옥 공예품을 주문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현재는 주로 낙관 제작 판매가 전체 품목 중 약 80%를 차지하며 나머지 20%는 다양한 것들이다. 주요 판매처는 서울 인사동에 80%, 전국 각 지역 화방과 필방에 10%, 광주·목포·순천 등지의 지인에게 10%를 납품하고 있다.
[옥공에 장인 박윤옥 명인]
1. 성장 과정 및 활동
옥공예 장인 박윤옥은 1956년 해남 문내면에서 출생하였다. 옥공예에 입문하게 된 시기는 18세 때인데, 당시 옥공예 생산업체 등의 경기가 매우 좋아서였다. 당시 옆집에 부산 태생인 김채만이 옥공예를 하고 있었는데, 김채만에게서 3년 정도 조각 계통의 기능을 배웠다. 주로 용문 등이었다.
이후 군대 제대 후 집에 공장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옥공예 작업에 전념하였다. 현재는 황산면 옥동리 8-35에 소재한 해남옥석공예 전시장을 관리하면서 바로 옆 유한회사 옥석공예 생산 공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1997년 일자리 창출과 지역공동체 산업 활성화를 통한 옛 명성을 되찾고자 전라남도와 해남군의 지원[6억] 및 자부담[20%]을 들여 현재의 위치에 해남옥석공예 전시장과 옥석공예생산공장을 건립하였다. 그 뒤 2002년 8월 16일에는 유한회사 옥석공예라는 법인단체를 세워 운영하였다.
2012년에는 마을기업이 지역 공동체에 산재한 각종 특화자원을 활용하여 소득 향상을 꾀하는 만큼 옥동마을만의 특색을 담아낸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창출될 수 있도록 해남군이 5200여만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명품 옥석 공예촌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일자리 창출과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위하여 전라남도와 해남군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게 된 옥석공예는 이제 해남군 옥석공예 지정업체 12-1호가 되고 ‘유한회사 해남옥석공예마을’이라는 새로운 명패를 얻게 되었다.
박윤옥이 보유한 주요 옥공예 기능은 용 향로 조각 등이다. 2톤가량의 용 향로를 45일 만에 제작 완성하여 목포 이훈동의 집에 기증한 바 있다. 또 주문을 받아 제작된 작품은 주로 이처럼 대작을 부산 사람 정영화를 통해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지금은 대작보다는 두꺼비를 비롯한 거북이, 호랑이, 탁상용 명패 등을 주로 제작하고 있다.
2. 주요 입상 경력
박윤옥 명인의 중요 대회 입상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대회 입상 경력을 살펴보면 전국공예품경진 전라남도 예선대회 에 출품하여 1993년 제23회 대회 특선, 1994년 제24회 대회 특선, 1995년 제25회 대회 특선, 1995년 제26회 대회 우수상, 2000년 제30회 대회 입선, 2001년 제31회 대회 특선, 2002년 제32회 대회 입선, 2004년 제34회 대회 우수상, 2005년 제35회 특선, 2014년 제44회 대회 장려상 등을 수상하였다. 아울러 (전국)공예품대전에서는 1993년 제23회 대회 특선, 2001년 제31회 대전 입선, 2014년 제44회 대전 입선 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2011년 제14회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전라남도 예선대회 장려상, 2011년 제14회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특선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2015년 7월 옥공예분야 해남무형문화재로 선정[향토문화유산 제32호]되었다.
3. 옥공예 제작 및 현재적 상황
재료 원석은 해남 황산면 부곡리 성산의 것과 옥동리 옥매산의 것을 주로 구매하여 사용한다. 1년에 소모되는 원석의 양은 약 10톤에서 12톤가량이다.
공예품을 만드는데 쓰이는 작업 도구는 예전에 전통 도구를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구입한 기계를 이용하고 있다. 현재 옥석공예 생산 공장에 갖추어진 기계는 활석기[절단기]를 비롯해 환상구 가공기, 도장 가공기, 도장 R가공기, 도장연마기, 도장카터기, 도장날, 다이아몬드날, 정밀조각기, 지게차, 코아[보링기계], 절단기[커터기], 재단기[절단기], 연마기 등이다.
제작과정은 품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6단계로 나누어 이루어진다. 원석 채석-디자인-절단-성형-세부조각[구멍 뚫기, 홈파기]-광택의 순이다.
현재는 유한회사 해남옥석공예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당시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김상득, 김성구, 김육남, 김춘태, 구달회, 박상훈, 박윤옥, 이진묵, 장성필, 정상오 등 10명이었으며, 주요 제작 판매 용품은 향로, 낙관, 각종 주전자, 동물류 일체, 옥, 목욕탕 재료 일체였다. 그러나 현재는 상근·비상근·고용직원이 없고 회원 및 출자자 수도 6명[김상득(대표), 김춘태, 구달회, 박윤옥(총무), 장성필, 정상오]으로 적혀져 있다. 이 또한 서류상 명단이고 실제적으로는 6명 중 박윤옥만이 옥공예 제작 활동을 하고 있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박윤옥은 그동안 두꺼비, 토끼, 촛대, 연필꽂이, 경락용 주걱, 경락용 빗, 낙관 등을 제작 판매해 왔다. 그러나 이 또한 옥공예만을 전문으로 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서 개인별로 현지에 와서 주문을 하게 되면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제작 판매하고 있는 실정이다.
[옥공예 장인 박상훈 명인]
1. 성장 과정 및 활동
옥공예 장인 박상훈은 1956년 해남군 황산면 원호리에서 태어났다. 박상훈의 아버지는 그림을 그렸는데, 박상훈이 세 살 때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박상훈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 마을인 남리에서 성장하였다.
박상훈이 옥공예에 입문한 시기는 16세 때이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15세 때 충무에서 나전칠기를 배우고자 하였으나, 집안사람들이 못하게 해서 16세 때 옥공예를 시작하였다. 당시 해남 황산에 있다 부산으로 옮겨 옥공예를 하던 김봉주를 찾아가 처음에는 월급 없이 허드렛일만 하다 이후 용 향로, 용 주전자, 호랑이 등을 제작할 수 있는 기능을 배웠다. 김봉주 집안은 본래 옥공예를 주업으로 하던 집안이었다. 서울에 살던 김봉주의 아버지 김상현이 처음 황산으로 와서 옥공예를 하였고, 이어 아들 김봉주가 이 사업을 이어 받았으며 김봉주의 동생 김남주는 부산에서 공예학교 교사를 하였다.
부산에 있는 김봉주의 사업장에서 약 3년 정도 기술을 익힌 박상훈은 다시 고향인 황산으로 돌아와 5년 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옥공예 기능을 배웠다. 그때 황산에는 약 10여 집이 옥공예 일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그중 작고한 한용문과 서봉술에게는 도장함, 담배함, 호랑이, 두꺼비, 컵 등을 만드는 것을 배웠고, 임복환에게는 제주도 하루방과 해녀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웠다.
이후 20대 중반에 공장을 차려 자립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부산에서 1년 정도 일을 더하다 다시 황산으로 되돌아왔다. 송호리에서 직원 2~3명을 채용해 작업을 해 오다 현재의 소재지로 사업장을 옮겨 온 시기는 결혼 후였다. 도로와 인접해 있어 관광객들이 쉽게 찾고 공예품도 좀 더 많이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지금의 전시장·판매장 겸 주거시설 등을 건립하였으며, 바로 옆에는 별도로 작업 공간을 갖추었다. 이곳의 판매장[고려공예사]에 전시되어 있는 품목은 박상훈이 제작 출품한 작품을 비롯하여 약 200여 점인데 이 중에는 수입품도 일부 전시되어 있다.
박상훈이 보유한 주요 옥공예 기능은 창의적으로 개발한 미용도구이다. 예를 들자면 손등 긁기, 머리빗 등 다양한 마사지 용품으로 특허신청을 하려다 하지 못하였고 의장등록만 하였다. 주특기는 호랑이를 실물처럼 정교하게 제작하는 것이다. 주요 작품은 향 촛대, 호랑이, 거북이, 두꺼비, 재떨이 세트 등이며, 2014년부터는 화신공예 김육남의 기법을 벤치마킹하여 작품 표면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2. 주요 입상 경력
박상훈 명인의 중요 대회 입상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대회 입상 경력을 살펴보면 전국공예품경진 전라남도 예선대회에 출품하여 1984년 제14회 대회 입선, 1985년 제15회 대회 입선, 1993년 제23회 대회 장려상, 1994년 제24회 대회 특선, 1995년 제25회 대회 특선, 1997년 제27회 대회 장려상, 1997년 제27회 대회 입선, 1998년 제28회 대회 우수상, 2000년 제30회 대회 우수상, 2002년 제32회 대회 특선, 2003년 제33회 대회 특선, 2004년 제34회 대회 특선, 2006년 제36회 대회 장려상, 2007년 제37회 대회 장려상 등을 수상하였다. 또한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전라남도 예선대회에도 참여하였는데, 1999년 제3회 대회 입선, 2000년 제4회 대회 특선, 2002년 제5회 대회 특선 등을 수상하였다.
전국 단위 경진대회에서도 다양한 입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국)공예품대전에서 출품하여 1985년 제15회 대회 입선, 1993년 제23회 대회 입선, 1994년 제24회 대회 입선, 1997년 제27회 대회 입선, 1998년 제28회 대전 입선, 2002년 제32회 대전 입선, 2007년 제37회 대전 입선, 2016년 제46회 대전 입선 등의 경력이 있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2015년 7월 옥공예분야 해남무형문화재로 선정[향토문화유산 제33호]되었다.
3. 옥공예 제작 및 현재적 상황
옥공예 재료인 원석은 해남 황산면 부곡리 성산의 것과 옥동리 옥매산의 것을 주로 구매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소량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과 강원도 정선에서 생산되는 칠보석과 목문석 등을 쓰기도 한다. 1년에 소모되는 원석의 양은 약 5톤 정도였는데 요즘은 주문이 있을 때만 제작하기 때문에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옥 공예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작업 도구는 대략 25년 전까지는 쇠톱, 활비비, 정, 갈이틀, 망치, 평밀, 조각도 등이었으나 지금은 현대적으로 개발된 다양한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원석 절단기를 비롯해 선반기, 연마용 핸드그라인더, 에어컴프레서 등이다.
제작과정은 품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6단계로 나누어 이루어진다. 원석채석-디자인-절단-성형-세부조각[구멍 뚫기, 홈파기]-광택의 순이다.
예전에는 지역 주민이나 외지인들이 명절 때마다 찾아와서 옥공예를 관람하고 또 선물용으로도 많이들 사갔다. 그러나 요즘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고 또 옥공예 사업이 쇠퇴해가는 것을 볼 때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박상훈은 예전부터 자신이 제작한 옥 공예품을 주문 제작에 의해 판매하고 있다. 현재는 작업량이 거의 없지만 가끔 주문에 따라 마사지 용품을 만들어 판매한다. 주요 판매처는 현지에서 소매로 80%를 소화하고 나머지는 부산, 서울, 포항 등지의 상인들이 사간다. 1985년에서 1995년까지는 경기가 좋아 성업을 이루었으나 해남-진도 간 외곽도로가 개설되면서 이후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게 되었다.
[해남 옥공예의 특징]
옥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상의 품성에 비견되었고 그만큼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면서 때로는 영험이 깃든 약효가 있는 것으로도 여겨져 왔다. 옥공예를 만드는 데는 고가의 원석을 다루기 때문에 채석 및 밑그림 그리기 등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정확한 예측이 필수적이며 섬세한 형태와 정교한 조각 과정을 위해서 기술자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고도의 예술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해남 옥공예 장인인 김육남, 박윤옥, 박상훈은 모두 어린 나이인 10대 후반으로부터 40여 년이 넘도록 옥 공예품 제작 활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또한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 제작 관련 전통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김육남 명인은 18세 때부터 지금까지 옥공예 제작 활동에 종사하며 두꺼비, 거북이, 용, 사자, 호랑이 등 다양한 공예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또 쇠퇴해 가는 옥공예 산업의 활성화와 기능 전수 등을 위해 관내 관광지에 체험·판매장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숙련된 기술을 응용하여 새로운 실용상품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즉, 독특한 기술로 제작한 도장과 낙관·서화용품이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용과 사군자 등의 그림을 밑그림 없이 직접 새겨 넣는 방법으로 기능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얻고 있다.
박윤옥 명인은 18세 때부터 지금까지 옥공예 제작 활동에 종사하며 두꺼비, 토끼, 거북이, 호랑이, 탁상용 명패, 촛대, 연필꽂이 및 용 향로 대작 등 다양한 공예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1997년부터는 일자리 창출과 지역 공동체 산업 활성화를 통한 옛 명성을 되찾고자 지자체 지원 등을 통해 설립된 해남옥석공예전시장 및 생산 공장[현재 유한회사 옥석공예마을기업]에서 10명의 지역 작가들과 함께 작품 활동을 해 왔으나 현재는 상황이 좋지 않아 박윤옥만이 남게 되었다. 최근에는 수요자의 요구에 맞는 실용상품으로 경락용 주걱이나 빗 등을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다.
박상훈 명인은 16세 때부터 자금까지 옥공예 제작 활동에 종사하며 두꺼비, 거북이, 호랑이, 촛대, 용 향로, 용 주전자, 도장함, 재떨이 세트, 컵, 제주도 하루방과 해녀 등 다양한 옥공예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호랑이를 실물처럼 정교하게 제작하는 것이 특기이며, 최근에는 손등 긁기, 머리빗 등 다양한 마사지 미용 용품을 개발하여 의장등록을 하였다. 현재는 옥공예 산업의 침체로 인해 농사를 겸업으로 하며 주문이 있을 때만 간혹 제작 판매하고 있다.
황산 옥동리의 옥공예거리는 일제강점기 때 생겨난 곳이다. 전국에서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옥동으로 몰려들었고 이곳에서 생산된 옥공예는 일본과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동네 아이들도 옥공예 기술을 배웠다. 황산 옥공예는 빨강, 노랑, 검정 등의 다채로운 색깔과 무늬를 자랑한다. 이곳에서 생산된 옥은 손으로 깎고 다듬을 수 있을 정도로 물러 섬세한 조각품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손으로 깎고 다듬은 섬세한 조각은 황산 옥공예에서만 볼 수 있다.
[옥공예 활성화를 위한 앞으로의 과제]
옥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세 명의 장인은 모두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옥동리는 1960년경부터 전국 최고 옥공예 생산단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옥돌의 원산지인 옥매산이 바로 옆에 있어 원석을 구하기 쉽고 그 품질도 좋아 예로부터 옥공예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값싼 수입품이 범람하면서 그 명성이 퇴색되었고, 현재는 이들 3명만이 그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옥공예의 활성화와 지속적인 계승을 위해서는 해남군 등의 기관에서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해남군은 국가나 도에서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지역 문화유산 가운데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자원을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향토문화유산은 지역의 역사문화적 특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나 도지정 문화재 못지않게 중요성이 인정돼 자치단체 조례에 의거 지정 보호되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군단위 문화재로 인식되어 소홀히 대접받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옥공예 활성화를 위한 홍보와 계승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황산의 옥공예 생산 및 전시장을 지역 관광코스에 포함시키는 등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 또한 전라남도 농업박물관과 같은 문화기관에서는 이들의 작품 전시회 등을 통한 전통문화 알리기 및 지역민의 문화 향유 기회 확대와 특산품 판매 등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상호 유기적인 협력도 필요하다.
옥공예 장인 김육남은 쇠퇴해 가는 옥공예 사업의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해남군에 체험장 개설 등을 요구한 바 있다. 그 결과 현재는 해남군의 도움으로 2014년부터 우수영관광단지에 체험 겸 판매장[약 7평]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서예를 전공한 20대 남녀 한 쌍이 간혹 체험을 통한 기능을 전수받고 있다.
옥공예 기능 전승과 관련해서는 김육남 명장을 제외하고는 난감한 상황이다. 김육남 명장의 경우 처남 김형국이 약 3개월 정도 기능을 전수받은 바 있는데, 퇴임 후 황산으로 이거하여 옥공예를 전문으로 배우겠다고 하여 거처를 마련해 놓은 상태다. 한편 김육남의 아들 김혁신이 현재 옥공예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하지만 박윤옥 명인과 박상훈 명인의 경우 자신의 옥공예 기능을 전수할 만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다. 황산 옥동마을 옥공예거리는 우리나라 유일하게 연한 광석을 이용한 옥을 생산하는 곳이다. 따라서 옥공예 전통이 전승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과 관심이 지속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