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13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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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存-代表名門宗家綠雨堂-尹善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윤섭 |
고산윤선도유적지녹우당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5[연동리 82] |
[정의]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종택 녹우당과 해남윤씨 집안의 인물 이야기.
[개설]
해남윤씨(海南尹氏)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대표 명문 종가로, 종택인 녹우당은 호남 문화예술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 상징하는 당호 ‘녹우당’]
녹우당(綠雨堂) 고택 앞에 서면 만나게 되는 500여 년 된 늙은 은행나무는 녹우당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500년이 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백 명의 녹우당 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나무이다. 늦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융단과 같이 쌓아서 고택을 아름답게 장식하곤 한다.
녹우당의 은행나무는 녹우당에 처음 터를 잡은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1476~1543]이 아들의 과거 급제를 기념하여 심었다고 한다. 관료 사회인 조선시대에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사대부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윤효정의 아들 삼형제 윤구(尹衢)[1495~?], 윤행(尹行)[?~?], 윤복(尹復)[1512~1577]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과거 급제는 오늘날 고시에 합격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한 명도 아니고 아들 삼형제가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윤효정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들 삼형제의 과거 합격과 집안의 융성으로 인해 해남윤씨는 해남이라는 본을 얻고, 일약 명문 사대부가로 성장한 것을 보면 이 은행나무는 녹우당의 상징이며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은행나무를 지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온다. 마당에는 계절마다 피어나는 화초와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마당에서 한 단 높은 기단 위에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의 가운데쯤에 ‘녹우당’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 집안의 당호(堂號)이다. 날렵한 행서체의 이 현판은 옥동(玉洞) 이서(李漵)[1662~1723]가 지어 준 것으로 집안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당호에는 그 집안의 학문과 사상, 가풍, 문화적 취향 등이 담겨 있다. 따라서 당호는 이를 상징하는 뜻으로 지어지곤 한다. 녹우당이라는 당호를 짓고 써 준 이서는 조선 후기 실학의 거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형으로, 이를 보면 실학이 새로운 학문의 기류로 자리 잡아 가는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호방한 자연풍광이 펼쳐진 해남읍 연동리에 터를 잡고 문화예술을 꽃피운 집안에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서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와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같은 남인이라는 정치적 동료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실학이라는 학문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 이서는 이 집안의 학문과 문화, 예술의 상징적 의미와 공간적 정서를 함축하는 의미를 담아 ‘녹우당’이라 이름 지었을 것이라 본다.
지금까지 녹우당의 당호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고택 앞에 서 있는 늙은 은행나무에서 바람이 불면 잎이 비처럼 떨어진다 하여 유래되었다고 말하였다. 녹우(綠雨)가 ‘푸른 비’라는 뜻이니 가장 직설적인 해석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고택의 뒤뜰 대나무 숲이나 뒷산 비자나무 숲에서 나는 바람소리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호가 그 집안의 철학과 학문적 사유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때 좀 더 다른 상징적인 뜻을 품고 있다고 본다. 녹우는 보통 계절적인 이치로 보면 늦봄에서 여름 사이에 풀과 나무가 푸를 때 내리는 비를 말하는데, 이때는 대지의 모든 생물들이 신록으로 물들어 ‘녹색의 장원’으로 변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푸르다는 것은 사대부의 지조나 절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윤선도가 「오우가(五友歌)」를 통해 대상으로 삼은 소나무나 대나무가 그렇듯이 녹우당은 사계절 푸른 이곳 장원의 원림과 사대부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비유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윤효정의 해남정착과 아들 삼형제의 과거 합격]
자손을 많이 낳아 크게 번창하는 것이 모든 집안이나 문중의 바람이듯이, 해남 땅으로의 이주와 정착은 해남윤씨가 크게 번창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전기를 마련한 이가 윤효정이다. 윤효정은 강진군 도암면 강정리에 살았으나, 해남의 거부이자 향족(鄕族)인 해남정씨(海南鄭氏)의 정귀영(鄭貴瑛)의 사위가 되면서 해남에 정착하여 살게 된다. 해남윤씨가 윤광전(尹光琠)을 중시조로 한다면 해남윤씨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윤효정이다.
고려 말까지 해남 지역에 등장하지 않았던 해남윤씨가 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윤효정이 해남정씨 정귀영의 딸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가능하였다. 당시 재지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들 사족 집안과의 혼맥(婚脈)과 관직 진출이었다. 윤효정은 해남정씨와 혼인하여 부를 축적하고 금남(錦南) 최부(崔溥)[1454~1504]의 제자가 됨으로써 이후 아들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의 관직에 진출하여 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선 사회에서 가장 빨리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단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인데, 윤효정은 세 아들을 모두 문과에 급제시킴으로써 일시에 집안의 기틀을 다져 나간다. 큰아들 윤구는 151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홍문관 부교리를 지내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영암에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며, 해남육현(海南六賢)의 한 사람으로 해촌사(海村祠)에 배향되어 있다. 윤구는 최산두(崔山斗)[1483~1536], 유성춘(柳成春)[?~?]과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로 불렸다. 동생인 윤행도 문과에 급제한 후 동래부사와 나주목사, 광주목사 등 여덟 주의 목사를 지냈고 후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또한 윤복도 1538년 문과 을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들 삼형제로 인해 더욱 빛을 보게 된 해남윤씨는 그 후에도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경상도관찰사, 예조판서 등을 지낸 윤의중(尹毅中)[1524~1590]과 평안도사와 공조좌랑을 지낸 윤광계(尹光啓)[1559~?] 등 여러 인물을 배출한다. 또한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윤선도는 국문학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해남윤씨 가운데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해남윤씨는 이처럼 윤효정이 해남에 정착한 이후 16세기 사림정치기를 통해 많은 인물들이 관직에 진출함과 아울러 경제적 기반도 착실히 다져 해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명문 양반가로 성장한다.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반영한 터 녹우당]
윤효정은 정귀영의 사위가 되어 읍치소에서 처가살이를 하다가 분가하여 새로운 터를 찾게 된다. 그때 새롭게 잡은 터가 지금의 해남읍 연동리이다. 당시의 풍습 속에서 결혼 초 처가살이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윤효정 역시 처가살이를 하다가 독립을 하자 연동리에 터를 잡고 일가를 이루게 되는데, 분가를 하면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당시는 남녀균분상속제에 의해 딸에게도 아들과 똑같이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 관례였다.
연동에 터를 잡은 윤효정이 철저하게 실천하고 완성하려 했던 것은 성리학적 세계의 실현이었다. 조선 사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유교적 이상사회의 건설이었으며, 16세기는 그 정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풍수사상에 의해 자리 잡은 연동의 자연과 원림(園林) 역시 이러한 성리학적 세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으며, 집안의 학문사상 역시 성리학의 실천을 위한 것이었다.
녹우당은 윤효정의 유교적 이상향의 세계관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윤효정은 스물여섯 살 때인 1501년 성균관 생원에 합격하지만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직 농업과 자손 교육에 힘쓰며 살아간다. 고기나 잡고 땔나무를 하면서 살겠다는 어초은(漁樵隱)이라는 호가 도가적 취향을 잘 말해 준다. 윤효정은 자손들의 바람직한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성리학의 실천적 사고와 전통 풍수사상에 맞추어 백련지(白蓮池)를 꾸미고 원림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연동마을은 윤효정의 이러한 사상이 잘 반영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연동이라는 마을 이름, 마을의 주산인 덕음산(德蔭山), 백련지는 모두 이러한 유교적 사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공간과 대상들이다. 녹우당이 있는 연동마을은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본래 ‘백련동(白蓮洞)’이라 불렀다. 녹우당 입구의 잘 조성된 소나무 숲 앞으로는 ‘백련동’이라는 이름을 짓게 한 연지(蓮池)가 자리 잡고 있다. 연지는 녹우당 사랑채에서 내려다보이는 장원의 중심이자 덕음산의 기운이 합일되는 장소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소나무 숲은 녹우당 앞의 탁 트인 벌판을 가로막으며 조성되어 비보(裨補) 기능을 한다.
윤효정은 유교적 철학 사고가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理)’와 기‘(氣)’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덕음산을 바라보기 가장 좋은 위치에 ‘심(心)’ 자 동산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덕의 기상이 물처럼 내면의 일상생활과 행동에 함께 스며들도록 백련지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에 조성된 백련지를 ‘심(心)’ 자의 형태로 조성하고 연못에는 백련을 심었다. 이는 맑고 깨끗한 기품과 향기로 심신을 맑게 하고 자연을 닮고 싶은 기원의 뜻이 담겨 있다.
녹우당에 서서 주변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면, 오른쪽 방향에 산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주민들은 이 산을 말뫼봉이라 부르는데, 주변 봉우리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봉우리인 문필봉(文筆峰)이다. 문필봉이라는 이름에서도 유교사회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녹우당은 1만여 평의 집터와 50만 평에 달하는 주변 자연과의 조화가 이루는 호방한 맛과 격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 격은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고택이 자리 잡고 있는 터에서 전해지는 호방함이기도 하다. 이곳은 풍수에서 말하는 소위 사신사(四神砂)인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가 둘러싸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 녹우당은 무엇보다도 사신사가 아주 훌륭하다.
[고아한 국어미(國語美)를 창출한 윤선도]
녹우당 사람들을 보면 예술적 기질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세기 사림정치기를 거쳐 사족으로 성장하면서 정치적 기반과 경제력을 함께 겸비하게 된 해남윤씨는 여러 방면에서 예술적으로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한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나 공재 윤두서의 예술 세계는 남인이라는 정치적 한계 속에서 자연에 은둔하거나 유배지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창작의 산물이라는 성격도 있지만, 이들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없었다면 이루어 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 중 윤선도는 정치적으로 숱한 역경과 논란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국어미를 살린 뛰어난 시가 작품을 남겨 국문학상 시조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대부분 한문 문학과 경직된 사회구조의 틀 속에 갇혀 있을 때 윤선도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섬세하고 미려한 시조들을 지었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와 「오우가(五友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윤선도가 한문으로 작품을 표현하지 않고 우리글로 이처럼 멋진 시를 표현해 낸 것은 뛰어난 시적 감성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다.
윤선도의 생애는 한마디로 유배와 은둔의 생활이 거듭된 굴곡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신의 굴곡진 삶과 시름을 시문을 통해 흥(興)과 원(願)으로 풀어냈다. 정치적으로 불우했지만 문학적으로는 화려하게 살다 간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몸집은 작고 체질도 연약한 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엄숙하고 단정한 몸가짐을 가진 꼬장꼬장한 선비였다.
윤선도가 평생을 통해 쏟아낸 엄청난 시구로 인해 우리 국문학사는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다. 윤선도의 창작 산실은 거의 유배지나 은둔지였으며, 작품들은 공간적인 배경을 비롯하여 그 공간에서 처하게 된 동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윤선도가 택한 은둔지는 해남의 금쇄동(金鎖洞)과 완도의 보길도(甫吉島)였다. 금쇄동은 첩첩산중 육로를 거쳐 찾아가야 할 산수자연(山水自然)이요, 보길도는 배를 타고 찾아가야 할 해중자연(海中自然)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되는 삶의 공간이었다. 해남에서 창작의 주 무대는 현산면에 있는 금쇄동과 수정동(水晶洞), 문소동(聞簫洞)이었다. 여기서 10년을 번갈아 머물면서 『산중신곡山(中新曲)』, 『금쇄동기(金鎖洞記)』를 썼고, 보길도 부용동에서는 일곱 차례에 걸쳐 약 12년간을 자연 속에 은둔하며 살았다.
윤선도의 작품들은 첫 번째 유배지인 함경도 경원에서 지은 「견회요(遣懷謠)」와 「우후요(雨後謠)」로 대표되는 초기, 해남의 금쇄동과 완도의 보길도 등지에 머물며 지은 『산중신곡』과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그리고 「어부사시사」의 중기, 경기도 양주[현 남양주시]의 고산에서 지은 「몽천요(夢天謠)」로 대표되는 후기의 작품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기의 작품이 현실 참여가 박탈된 유배지에서 지은 것이라면, 중기에는 은거지에서 이상적인 절대공간을 노래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처한 공간에 따라 정치 참여에 대한 동경과 갈망, 자연에의 안주와 몰입 등의 상반된 욕구가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해남은 윤선도의 음영 짙은 내면 풍경과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다. 윤선도는 이곳 금쇄동에서 물[水], 돌[石], 소나무[松], 대나무[竹], 달[月]을 소재로 한 「오우가」를 지었다. 작품을 통해 볼 때 윤선도의 자연으로의 은둔은 현실적 좌절을 위로받는 은자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좌절을 극복하고 더욱 절제된 시세계를 보여 주는 지조 있는 선비의 모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