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2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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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周梁 |
영어공식명칭 | Juryang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명량마을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변남주 |
비정 지역 | 주량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명량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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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나루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명량마을에 있었던 조선시대와 개항기 나루.
[개설]
주량(周梁)은 조선시대의 포구이자 나루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여러 지리지 기록에서 확인되지만 나루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명칭 유래]
명량마을 주변에 있는 나루에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형성 및 변천]
조선시대 주량에는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명량마을과 진도군 군내면 녹진마을을 잇는 나루가 설치되어 해남의 화원반도와 진도의 북부 지역을 연결하였다. 진도에서는 녹진으로 불리었고, 해남에서는 주량으로 달리 불리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에 의하면 진도의 녹진에는 녹진원(鹿津院)이 설치되었다. 1555년 달량진왜변 시에 진도의 남도포에 왜구가 침략하자 진도 지산면에 귀양 와 있던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주량나루를 이용하여 순창까지 피신하였다. 명량마을의 나루는 『비변사방안지도(備邊司方眼地圖)』, 『조선 후기 지방도』, 『구한말지도』, 『일제 초기 지도』 등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1872년 『조선 후기 지방도』에는 진선이 그려져 있으며 녹진과의 거리를 5리[약 1.96㎞]로 표기하였다. 일제강점기까지 배가 운행되다가 1959년 8월부터 50~60명이 승선할 수 있는 발동기선이 도입되고, 조류의 흐름과 상관없이 우수영으로 직통하게 되자 명량마을에 있었던 나루는 소멸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해남읍지(海南邑誌)』에 의하면 “해남현 서쪽 75리[약 29.45㎞]에 있으며 땅이 다한 끝으로 등산진(登山津) 상류이다.”라고 하였으며, 『해남읍지』[1872]에는 “별진포(別津浦) 하류이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는 황원[화원반도 일대에 있었던 옛 이름]의 남면(南面)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해남군 문내면 소재지인 우수영은 해남현의 서쪽 70리[약 27.49㎞]에 있고, 명량마을은 우수영에서 남쪽으로 2㎞ 떨어져 있으니 합하여 75리여서 앞에서 언급한 기록과 일치한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주량은 명량마을에 있었다. 나루 선창은 『구한말지도』와 일제강점기 『1:50,000 지도』에서 확인되는데[학동리 1459번지], 마을의 남서쪽으로 약 100m 바닷가에 녹진과 마주하고 있었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1432년(세종 14)에 “본도의 수영(水營)을 목포에 옮겨 설치하고, 목포의 병선은 황원(黃原)의 남면 주량에 옮겨 정박(碇泊)하게 하고[木浦兵船移泊于黃原南面周梁]”라고 하였으며, 이어 1433년 기록에 “목포의 병선을 주량으로 옮겼으나 호칭을 그대로 목포 천호(千戶)라고 일컫고 있었다. 따라서 주량 천호로 개명하도록 하였다[木浦兵船, 移泊周梁, 而仍稱木浦千戶未便, 請以周梁改號].”라고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주량은 해남현 서쪽 75리에 있으며 땅이 다한 끝으로 등산진(登山津) 상류이자 별진포의 하류에 있다[周梁 在縣西七十五里 地盡之頭 登山津之上 卽别津浦下流也].”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