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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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頭流山記-吳斗寅- |
영어의미역 | Record of Sighseeing at Duryusan Mounta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정화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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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89년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51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
성격 | 한문학|유람록 |
작가 | 오두인(吳斗寅)[1624~1689] |
[정의]
1651년 양곡 오두인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을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두류산기(頭流山記)」는 오두인(吳斗寅)[1624~1689]의 『양곡집(陽谷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오두인은 1651년(효종 2) 11월 1일부터 11월 6일까지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였는데, 「두류산기」는 이때 지은 것이다.
오두인의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생부는 사복시주부를 지낸 오상(吳翔)이고, 백부인 오숙(吳䎘)에게 입양되었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0년(효종 1) 사헌부지평을 거쳐 1656년(효종 7)에 장령, 1661년(현종 2)에 헌납·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현종 8) 홍문관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삭직 당하였다. 그해 5월에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1630~1701], 박태보(朴泰輔)[1654~1689]와 함께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양곡집』이 있다.
[구성]
기행 문학의 글쓰기 형식에 맞춰 ‘유람의 동기→일정별 유람 기록→유람의 총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정에 따라 그날의 상황을 기록한 산문 형식으로, 곳곳에서 『시경(詩經)』이나 이백(李白)[701~762]의 시를 인용하였고, 또 여러 관련 일화를 소개하는 등 작자의 문학적 재능을 한껏 발휘하고 있다.
이들의 유람 일정은 진주를 출발하여 하동 봉계→악양→화개 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신흥사(新興寺)를 둘러보고, 은정대(隱井臺)를 지나 남대사(南臺寺)를 거쳐 덕천서원(德川書院)을 구경하고 진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에 대한 유래 및 역사적 상황, 만나는 인물 소개, 지리적 여건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오두인의 유람록에는 여타 유람록에는 보이지 않는 지리산[1,915m] 속 사찰이나 암자, 마을 등의 이름이 많이 나타난다.
[내용]
오두인은 평소 쌍계사를 유람하려는 소망을 풀지 못하다가, 재상(災傷)을 살피기 위해 경상우도 지역을 살피는 공무 여가에 인근의 쌍계사와 불일암, 신흥사 방면으로 유람하였다. 동행은 진주목사 이상일(李尙逸), 진주 소촌역찰방(召村驛察訪) 김정(金釘), 하동태수 이진필(李震馝), 곤양 소모장(召募將) 김집(金緝)이다. 이들은 모두 예전에 남해를 함께 유람하였던 인물이다.
이들 네 유람자는 현직 관료였던 만큼 가는 곳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쌍계사에 이르렀을 때 승려 수십 명이 맞이하러 나온 것이나, 유람의 흥을 돋우고 여정의 노고를 위로받기 위해 여러 악공과 기생을 대동한 점, 내대를 넘어 덕산으로 들어갈 때 덕산사(德山寺)의 승려 수십 명이 교대로 이들을 맞이하러 나오는 모습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징]
청학동 유람은 천왕봉을 목적지로 하지 않는다면, 대개 신흥사를 구경한 후 왔던 길로 돌아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두인의 경우 신흥사를 보고 난 후 은정대를 지나 남대사로 가서 덕산으로 들어갔다. 은정대는 현재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에서 세석산장으로 오르는 길목의 대성동 근처에 있다. 그렇다면 오두인은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에서 거림골로 내려와 내대를 거쳐 덕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길은 지금까지 발굴된 지리산 유람록에서 특이하게 보이는 경로 중 하나이다.
「두류산기」에서는 조선 시대 산행을 인도하였던 향도자(嚮導者)와 관련한 중요한 자료가 발견된다. 조선 시대 산행 안내는 주로 인근 사찰의 승려가 주도하였는데, 신흥사에서 내대로 넘어가는 길에서 오두인 일행을 안내하였던 승려는 16년 전에 오두인의 부친을 같은 코스로 안내하였고, 5년 전에는 오두인의 숙부를 안내하였던 인물이다. 곧 그 승려는 그 오랜 시간 동안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 유람 안내를 도맡아 해 오던 전문 가이드였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지리산 유람은 여러 부류의 인물에 의해 이루어졌다. 현직 관료가 공무 여가나 친·인척을 방문하였다가 오르거나, 지리산 자락에 은거하던 인물, 또는 멀리서 지리산 등반을 목적에 두고서 장기간의 일정으로 오르는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두류산기」는 현직 관료가 지리산을 유람하고서 지은 글로, 유람자의 현실적 기반과 유람과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데 적절한 작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