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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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의미역 | Goryeo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해영 |
[정의]
918년 고려의 건국으로부터 1392년 멸망하기까지의 경상남도 하동군의 역사.
[개설]
고려 시대 하동 지역의 사정을 살필 수 있는 구체적인 사료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관련된 몇 건의 기사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진주목조에 진주목의 속읍 아홉 곳 가운데 하나로 하동군에 관한 간략한 연혁이 나올 뿐이다.
고려 시대에 하동군과 같은 속읍의 지방 행정은 주읍인 진주목의 관할을 받아 향리가 담당하였다. 향리는 지역 내 토착 세력이었고, 이들의 작폐가 심하여 속읍의 주민은 주읍의 주민에 비해 사회적·경제적 처지나 생활 여건이 열악하였으며 지역 발전도 부진하였다.
진주목의 9개속읍 가운데 강성군과 더불어 하동군이 군(郡)이었고 나머지 7개 속읍은 모두 현(縣)이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하동군의 지역적 위상은 진주목을 주읍으로 하는 여타의 속읍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하동군에 하급의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는 시기도 여타의 속읍에 비해 빠른 편이었다.
[행정 구역]
하동이라는 군명이 처음 사용된 것은 신라 경덕왕 때 전국의 행정 구역을 한자 지명으로 바꾸면서부터이다. 종래 한다사군(韓多沙郡)으로 칭하던 고을 이름을 이때부터 하동군으로 칭하게 되었으며, 당시 하동군은 성량현[고려 때는 금양부곡이라 일컬어짐]과 악양현, 하읍현의 세 현을 관령하였다.
고려 왕조에 이르러서도 하동군이라는 군명과 행정상의 영역은 그대로 이어졌으나 1018년(현종 9)에 전국의 지방 행정 중심지를 4도호부 8목의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하동군은 진주목의 속군이 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신라 시대 이래 하동군의 영현이었던 악양현과 하읍현[고려 때에는 곤명현으로 개칭]도 진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하동군에 최하급의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는 것은 1172년(명종 2)이며, 이때부터 비로소 진주목의 속군에서 벗어나 군 감무를 수령으로 하는 독자적인 행정이 이루어졌다.
[교통과 방어시설]
고려시대에는 현재의 진교면 지역에 율원역(栗院驛), 옥종면 지역에 정수역(正守驛), 악양면 지역에 평사역(平沙驛), 횡천면 지역에 횡포역(橫浦驛)이 설치되어 있었다. 역참(驛站)은 육로의 운송을 담당하는 교통 기관으로서 공문서의 전달, 관물(官物)의 수송, 공무로 왕래하는 관리에게 교통 및 숙박의 편의 등을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하동의 역은 고려의 역로 중 산남도(山南道)에 속하는 데 산남도는 진주를 중심으로 전주와 거창, 하동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이다. 즉 하동의 역은 일차적으로 진주로 이어져 전라도와 경상도 방면을 연결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하동의 방어시설로는 구성(龜城)과 원동산성(院洞山城), 금오산성(金鰲山城), 소란산성(小卵山城), 이명산성(理名山城) 등의 성이 있다. 이 중 구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려말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다. 원동산성은 횡천강 가까이에 있어 강을 통해 들어오는 왜구를 방어하며, 금오산성은 남해 연안의 금오산 정상에 있어 바다를 통한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다. 소란산성은 섬진강 가까이에 있어 역시 강을 통해 들어오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은 매우 극심하여 공민왕 때만 115회, 우왕 때는 378회나 되었다. 왜구의 침입은 비단 바닷가 마을에 한정되지 않고 내륙까지 확대되었다.하동 지역은 공민왕 때 3회의 침입 기록만 보이지만, 하동이 원래 진주에 속했으므로, 진주에 침입한 횟수까지 치면 매우 빈번히 침략을 당했다 할 수 있다. 원동산성의 경우 왜구의 침입으로 성이 함락될 때 병사 수천 명이 혈전하다가 전사하여 혈주촌(血注村)이 생겨났다 는 전설까지 있다. 이로써 고려시대 하동의 왜구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고, 역으로 하동 지역의 산성들은 바다와 강 가까이 위치하여, 하동이 지리적 측면에서 산과 바다, 강의 어느 쪽으로도 통하는 교통의 요로였으며 방어에 긴요한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토성 및 인물]
고려 시대 하동군의 토성(土姓)은 정(鄭)·곽(郭)·이(李)·하(河)의 네 성씨가 있었다. 이 가운데 하동 정씨만이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정씨의 중앙 관직 진출은 명종 때 서북면병마사를 거쳐 참지정사에 오른 정세유(鄭世裕)로부터 비롯되었다. 정세유의 집안은 이후 그의 아들 정숙첨(鄭叔瞻)과 정진(鄭稹) 대에 이르러서는 일약 권세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정숙첨은 최충헌(崔忠獻)의 아들 최이(崔怡)를 사위로 삼으면서부터 최씨 정권 하에서 그 일문이 요직에 포진하였다. 정씨는 중앙 관직 진출만이 아니라 본관지인 하동에 토착적 기반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최씨 정권 하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가문이 최씨 정권과 함께 몰락하였으나 재지(在地) 세력은 뒤이어 상경종사(上京從仕)의 길을 걸었다. 『고려사』 열전에 하동 출신 인물로 정세유(鄭世裕), 정지상(鄭之祥)의 두 인물이 등재되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하동현 인물조에 고려조의 인물로 정안(鄭晏), 정지상, 정혼(鄭渾), 정지연(鄭芝衍)의 네 명이 나타나는 것에서도 고려조에 하동 출신 인물의 활발한 관계 진출과 함께 하동 정씨의 번성했던 족세를 엿볼 수 있다.
정안(鄭晏))은 무인집정인 최우(崔瑀)의 처남이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하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연로한 어머니를 모셨다. 이후에 최우의 추천으로 다시 벼슬하였으나 최우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남해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몽고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롭자 최우는 팔만대장경의 역사를 시작하였고, 정안은 남해에 분사도감을 두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의 일부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최우가 죽고 최항(崔沆)이 집권하자 그의 정치를 비판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정안봉(鄭晏峰)은 정안의 이름에서 비롯된 명칭이며, 정안이 정안봉에 정안봉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구전된다.
하동군 옥종면 은 행정구역상 원래 진주 지역이었으나 뒤에 하동에 속하게 되었다. 옥종 출신의 인물로 강민첨(姜民瞻)을 들 수 있다. 강민첨은 1018년(현종 9) 거란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강감찬의 부장으로서 의주에서 적을 크게 물리쳤다. 그 공으로 1019년 응양상장군 주국 우산기상시(鷹揚上將軍柱國右散騎常侍)에 올랐으며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녹훈되었다. 옥종면 두양리에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그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있다. 하동읍에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강민첨장군이 강감찬장군과 함께 하동을 지날 때 읍내 구시장(舊市場) 터에 머물고 잠을 자는데 모기가 너무 많아 모기에게 호통을 친 이후로 모기가 없어졌다 한다.
한편 하동은 지리산 청학동이 있어 예부터 속세를 멀리하고 무릉도원을 찾아 하동에 머문 사람들의 전설이 많다. 고대에 최치원이 세이암(洗耳巖) 전설을 남겼다면 고려시대에는 한유한(韓惟漢)이 그러하다. 한유한은 고려 인종 때 사람으로 벼슬살이를 하다가 이자겸(李資謙)의 횡포가 심하여 장차 변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가족들과 함께 악양에서 숨어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화개면 부춘리는 한유한이 은거한 마을이라 불출동(不出洞)이라 했다는 지명 유래담이 있으며, 악양면 평사리의 삽암에도 한유한이 은거하며 낚시로 소일했다고 전해진다. 하동에는 한유한이 섯바위[삽암]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섯바위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이후 하동의 수려한 산수를 찾아,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삽암을 지나면서 한유한을 회고하는 시를 남겼다. 또한 하동은 산과 강, 바다가 어우러진 수려한 산수를 자랑하는 곳으로 고대이래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의 시나 유람기를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이규보가 화개에 와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인로는 청학동을 찾아 화개를 유람하고 「지리산유람기록(智異山遊覽記錄)」을 남겼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하동은 영남과 호남을 잇는 교통의 요로였으며, 바다와 강으로 들어오는 왜구를 막을 수 있는 방어상 중요한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상향의 꿈을 간직한 지역이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