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94
한자 朴文奎
영어공식명칭 Park Mungyu
이칭/별칭 박인수(朴仁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영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6년 2월 24일연표보기 - 박문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5년 5월 - 박문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피검 후 기소유예
몰년 시기/일시 1971년 10월 15일연표보기 - 박문규 사망
출생지 박문규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조영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박문규 거주지 - 서울틀별시 종로구 관철동 123
수학|강학지 박문규 학교 - 경상북도 경산시
수학|강학지 박문규 학교 - 대구광역시
수학|강학지 박문규 학교 - 서울특별시
외가|처가 박문규 처가 - 경상북도 경산시 점촌동 지도보기
묘소|단소 박문규 묘소 - 북한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리
성격 학자|독립운동가
성별
본관 밀양
대표 관직|경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박문규(朴文奎)[1906~1971]는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수학하고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가가 되어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국내 공산주의그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44년 건국동맹을 거쳐 광복 이후 좌익계열의 민족운동에 헌신하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월북한 후 북한 정부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가계]

박문규는 1906년 2월 24일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조영동 263번지[현 경산시 조영동]에서 밀양 박씨 구산공파(龜山公派)의 대지주 박병석(朴炳奭)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압량면 점촌동[현 경산시 점촌동] 출신의 안수원(安壽元)[이명 안옥순(安玉順)]이다.

[활동 사항]

박문규는 경산보통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한 후 1927년 법문학부로 진학했다. 1년 선배 유진오(俞鎭五)와 이종수(李鍾洙) 등이 1926년에 만든 교내 연구 서클 ‘경제연구회’에 가입하였다.

1930년 3월 법과를 졸업하면서 시카다 히로시[四方博] 교수의 경제연구실 조수(助手)로 임용되고, 시카다 주도의 조선경제연구소 회원도 되었다. 그러나 조선사회 정체론(停滯論)을 바탕에 깔고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는 시카다의 관학(官學)에 맞서 대항 이론의 정립과 새로운 조선 인식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지지와 소련 체제 찬양을 주지로 하는 등사판 간행물 『조선과학』도 냈는데, 두 번 다 경찰에 압수되었다. 경제연구회가 1930년 여름에 강제해산되자 박문규는 다른 회원들과 함께 1931년 9월 조선사회사정연구소(朝鮮社會事情硏究所)를 학교 밖에 설립하여 조사연구부의 경제반 책임자가 되었다.

1933년 6월 부수(副手)로 승진하고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부설 만몽문화연구회(滿蒙文化硏究會)의 촉탁으로 근무하였다. 1934년 들어 박문규는 프로핀테른(Profintern)[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극동부에서 파견되어 온 권영태(權榮台) 지도 하의 공산주의자 그룹에 합류하여 문화자금부 부원이 되었다. 그 해 5월초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나, 권영태 그룹의 동향을 포착하고 검거에 나선 경찰에 5월 22일 체포되었다. 박문규는 조사를 받고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송국(送局)되었는데 예심판사의 기소유예 결정으로 풀려났다. 그때 부수 직을 그만두었고, 1937년경 회사원이 되어 일본 도쿄[東京]에서 근무하다 1941년경 조선은행(朝鮮銀行)[한국은행의 전신]에 들어가 조사부원으로 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4년 8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조직된 비밀결사 건국동맹(建國同盟)에 가입하여 은밀히 활동하였다. 또한 해방 직후의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과 그 후신인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제1차 대표자회의에서 토지농업문제 보고를 한 데 이어 「농민운동의 행동강령」을 작성해 12월의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서 발표하였다. 1946년 2월에 좌익연합체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중앙상임위원이 되고 사무국의 선전부장 겸 기획부 차장을 맡았다. 민전 산하의 토지농업문제 연구위원과 식량대책 연구위원도 겸하면서 ‘긴급경제대책’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토지문제의 평민적 해결’ 즉 토지개혁을 주창하면서 그 방안을 민전 상임위에 보고하기도 했다. 1946년 11월 좌익 3당의 합당으로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이 결성될 때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사무국장으로서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의 담화에 반박하는 성명을 냈다가 ‘미군정 포고령 위반’을 이유로 체포되었다. 비공개 특별군정재판에서 7만 5천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으나, 열흘쯤 후에 3·22 총파업 주동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군정재판에서 3년 1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거기서 수형인 일반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다 형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여론이 나빠지자 6월에 특사(特赦)로 석방되었다.

1948년 월북하여 8월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고 1967년 제4기까지 연거푸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때 초대 농림상으로 발탁되어 농업구조 재편을 주도하고 1952년 농업상으로 계속 기용되었다. 남로당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때도 살아남아,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1961년 재선]과 국가검열상, 1959년 지방행정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1962년 재선], 1962년 내무상, 1964년 국토관리상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박문규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시절부터 재정학 조교수인 미야케 시가노스케[三宅鹿之助]의 지도를 받으며 마르크스주의 사상서를 탐독하고 경제이론 공부에 몰두하였다. 졸업 후 학문적 소질을 인정받아 경제연구실 조수가 되고 다수의 경제학 논문을 집필하여 대중교양지들에 속속 발표하였다. 박문규는 「졸업논문-자본축적이론 소고(小考)」[『대중공론(大衆公論)』 2-2, 1930. 3], 「관세전쟁」[『대중공론』 2-6, 1930. 7], 「몰락과정에 있는 자본축적과 공황의 특질」[『대중공론』 2-9, 1930. 10], 「봉건유제와 금융자본과의 야합」[『신흥』 4, 1931. 1], 「1931년의 총결산, 세계공황 1주년 개관」[『동광』 28, 1931. 12], 「지대논전소견(地代論戰所見)」[『신흥』 6, 1931. 12], 「지주와 소작인의 본질-질전(櫛田)씨의 오론(誤論)을 격(擊)함」[『비판』, 1932. 1], 「세계적 경제공황과 자본주의제국(資本主義諸國)의 노동자상태」[『신흥』 7, 1932. 12] 등의 경제학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1931~1932년의 논문 5편은 ‘박인수(朴仁洙)’라는 필명으로 기고하였다.

1933년 12월에는 회심의 대작논문 「농촌사회 분화의 기점으로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하여」를 경성제대법문학회 논집 제6책인 『조선사회경제사연구』에 일문으로 발표하였다.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도입된 근대적 토지소유제와 조선 전래의 영세농적 생산양식 간의 모순을 직시하고 파헤친 이 논문은 학계의 극찬을 받으면서 ‘1930년대 농업문제 논쟁’[또는 ‘사회성격 논쟁’]의 물꼬를 열었다. 이 논문 덕분에 『조선사회경제사연구』가 서울과 도쿄에서 정가의 몇 배를 주어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잘 팔렸다고도 한다. 유진오의 인물평처럼 “온건·착실한 대신 놀랄 만한 끈기가 있는 사람”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그 후에도 박문규는 「조선농촌과 금융기관과의 관계-특히 금융조합에 대하여」[『신동아』 4-2, 1934. 2]와 「조선농촌기구의 통계적 해설」[『신흥』 8, 1935. 5]을 발표하였지만, ‘권영태 그룹 사건’으로 피검되어 학교를 떠나고부터는 더 이어지질 못하였다. 그러나 위의 논문들을 한데 묶어 1946년 12월에 출간한 두 권의 저서 『조선농업생산관계고(考)』와 『조선토지문제 논고』는 토지개혁론과 농업근대화론의 이론적 기반이자 좌파정책의 나침반 역할을 하였다. 앞서 1945년 11월에 소논문 「토지문제와 자작농 창정(創定)」을 써서 『조선인민보』에 실었고, 북한에서는 「농민문제에 관한 레닌의 학설」[『근로자』 7, 1950. 4]을 발표하였다.

[묘소]

박문규의 묘소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조성되었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직함이 새겨져 있다.

[상훈과 추모]

박문규는 1956년과 1958년에 북한 정부로부터 노력훈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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