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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812
한자 白信愛
영어공식명칭 Baek Sinae
이칭/별칭 무잠(武簪),백무동(白戊東),박계화(朴啓華),조성희(照星嬉)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남상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8년 5월 20일연표보기 - 백신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5년 - 한문 독선생[이모부]에게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18년 - 영천공립보통학교 2학년 편입
수학 시기/일시 1923년 - 영천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3년 -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 강습과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4년 - 공립 사범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영천공립보통학교 교사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자인보통공립학교 전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조선 여성동우회 및 경성여성청년동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경성청년동맹 및 근우회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소련 블라디보스톡에서 일경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나의 어머니」 당선
수학 시기/일시 1930년 - 일본 니혼[日本]대학 예술과 입학 및 중퇴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1930년 일본키네마에서 배우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39년 6월 23일연표보기 - 백신애 사망
출생지 경상북도 영천군 창구동 - 경상북도 영천시 중앙동
거주|이주지 자인보통공립학교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영천공립보통학교, 경북 공립사범 - 경상북도 영천시
학교|수학지 경북공립사범학교 - 대구광역시
활동지 경상북도 경산시
묘소 경상북도 칠곡군
성격 소설가
성별
본관 수원
대표 경력 자인보통공립학교 교사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활동한 소설가.

[개설]

백신애(白信愛)[1908~1939]는 일제 강점기 경산 지역에서 교사로 활동한 여류 소설가이다. 아명은 무잠(武簪)이며, 호적명은 백무동(白戊東)이다.

[활동 사항]

백신애는 1908년 5월 20일 경상북도 영천군 창구동에서 아버지 백내유와 어머니 이내동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학업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였다. 백신애에게는 5살 위의 오빠 백기호가 있었고, 아버지 백내유는 영천읍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미곡상이었다. 1920년대 백내유는 대구까지 진출하여 경마장과 도정공장을 운영하며 사업을 확장하였지만 친일적인 인물이었다. 백신애의 오빠 백기호는 대구고보와 일본 호세이대학을 수학한 인텔리로서 부친과 달리 ‘정우회’, ‘북풍회’ 등의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백신애는 영천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대구 공립사범학교를 졸업한 1924년부터 영천보통학교, 경산 자인보통학교 교사로 활동했지만 여성동우회와 청년동맹 등의 활동이 문제가 되어 강제 사직당하였다. 해임 후 시베리아를 여행하였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귀국하였다. 1929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자전적 단편소설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었다. 당시 심사자는 박영희였으며, 백신애는 ‘박계화(朴啓華)’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썼다.

1930년 도일하여 일본대학 예술과에서 문학 공부를 하게 되었지만 부친 백내유의 강권에 귀국하였다가 결혼문제로 인하여 다시 도일하였다. 백신애는 일본 체류 중에 ‘조성희(照星嬉)’라는 예명으로 영화배우로도 활동하였다.

1932년 귀국 후 부친이 소유한 대구 반야월의 과수원에서 글쓰기에 몰두하였다. 이듬해 은행원 출신으로 백내유의 공장 관리인이자 전처 소생의 자녀가 있던 이근채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부친 백내유가 사과 과수원을 크게 일군 대구 반야월 송정동에서 살림을 하였고, 백신애는 이곳에서 여러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문학적·사상적 소양과 신념이 깊은 진보적 신여성 백신애와 가부장적인 남편 이근채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이런 처지에 놓인 백신애에게는 사상적으로 영향을 끼친 오빠 백기호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어머니 또한 부친과 달리 딸의 은밀한 동조자였다.

백신애의 결혼은 파경에 이르렀고 오빠 백기호 역시 일제의 사상 통제와 감시 속에 놓여 있어 두 남매는 1938년 상해로 잠행하였지만 백신애의 건강이 문제가 되어 곧 귀국하였다. 1939년 5월 백신애는 이근채와 이혼하였다. 이혼 직후 『조광』지에 자전적 소설 「혼명(混冥)」을 발표하였는데, 「혼명」이 백신애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1939년 6월 25일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백신애의 전작은 단편 16편, 중편 2편, 미완의 장편 1편, 시 1편, 수필 등의 산문 25편이다. 대표 작품으로는 단편 「꺼래이」[『신여성』, 1934], 「복선이」[『신가정』, 1934], 「채색교」[『신조선』, 1934], 「적빈」[『개벽』, 1934], 「낙오」[『중앙』, 1934], 「악부자」[『신조선』, 1935], 「정현수」[『조선문단』, 1935], 「빈곤」[『비판』, 1936], 「식인」[『비판』, 1936], 「정조원」[『삼천리』, 1936], 「광인수기」[『조선일보』, 1938], 「혼명」[『조광』, 1939], 유고 「아름다운 노을」[『여성』, 1939), 수필 「백합화단」[『중앙』, 1934), 「녹음하(綠蔭下)」[『조광』, 1937]가 있다. 주로 농촌의 빈곤과 가정폭력 문제 등 사회성 높은 작품을 다수 발표하였다. 1930년에는 일본키네마[日本キネマ] 제2회 작품 「모던 마담(モダン·マダム)」에서 조성희라는 예명으로 배우 활동을 하기도 했다.

[묘소]

화장 후 경상북도 칠곡군의 어머니 묘소 부근에 분묘를 조성하였으나 6·25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2007년 5월 11일 백신애기념사업회가 발족하였다. 2007년 6월에는 제1회 백신애문학제를 개최하였으며, 이후 매년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2008년 5월 13일 백신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영천시에 백신애문학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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