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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394
한자 烽燧
영어공식명칭 Beacon Fire Station
이칭/별칭 봉화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위은숙

[정의]

조선 시대 경산 지역에 설치된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시설.

[개설]

봉수(烽燧)는 전통 시대 때 불과 연기를 이용해 외적의 침입과 같은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통신 시설이다. 낮에는 연기를 올리기에 ‘봉(烽)’, 밤에는 횃불을 통해 통신하기에 ‘수(燧)’라고 한다. 각 봉수의 거리는 수십 리에 이르며, 봉수대는 산 정상에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 봉수 제도]

우리나라 봉수의 기원은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이것이 제도로 정비된 것은 고려 시대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세종은 고려의 봉수제를 계승하고 당의 제도를 참작해서 새로이 봉수 규칙을 정하였다. 이에 따라 평상시에는 1거(炬), 적이 나타나면 2거, 경계에 접근하면 3거, 경계를 침범하면 4거, 접전하면 5거를 올리도록 규정하였다.

봉화대의 군사적 중요도에 따라 봉수군의 배치가 달랐다. 서울 목멱산[현재 남산] 봉화대를 중심으로 다섯 방면의 봉수로를 정비하였는데 1로가 함경도·강원도 방면, 2로가 경상도 방면, 3로가 평안도 방면의 육로, 4로가 평안도·황해도 방면의 해로, 5로가 충청도·전라도로 연결되는 봉수로였다.

조선 초기에 확립된 봉수제도는 점차 해이해졌으며, 임진왜란을 앞두고 정부가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이후 파발제(擺撥制)가 봉수제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봉수제는 이후 정비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1894년(고종 31) 근대적인 통신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폐지 수순을 밟았다.

[경산의 봉수]

조선 시대 경산 지역의 봉수는 경상도 방면인 2로의 간봉(間烽)에 해당하는데, 성산봉수(城山烽燧)와 시산봉수(匙山烽燧)가 설치되었다. 성산봉수는 경산현(慶山縣) 북쪽 8리에 있었으며, 북쪽으로 하양현(河陽縣)시산봉수, 서쪽으로 대구부(大邱府)의 법이산봉수(法伊山烽燧)로 연결되었다. 시산봉수하양현 남쪽 7리에 있었는데, 동쪽으로 영천군(永川郡)의 성황당봉수(城隍堂烽燧), 남쪽으로 경산현의 성산봉수로 연결되었다.

[봉수 유적]

경산현의 성산봉수가 있던 곳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의 고산(孤山)이다. 봉수는 고산 정상부 해발 96.3m 높이에 축조되었다. 성산봉수는 2020년 발굴 조사에 따르면 둘레는 103.3m, 평면 형태는 타원형으로 확인되었다. 하양현시산봉수금호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 산60-1에 토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한편,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흥정리 산11대왕산 봉수 터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리 산39-2덕천리 봉수 터는 고대에 사용된 봉수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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