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564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염승연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9년 1월 31일 - 「삼암[돌모랭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암마을에 거주하는 길상길의 이야기를 채록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0년 - 「삼암[돌모랭이]」 『광주의 전설』에 수록 |
채록지 | 삼암마을 -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 43번지 |
성격 | 설화|지명전설 |
모티프 유형 | 지형|지명유래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 삼암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삼암마을의 지명유래에 관한 이야기.
[개설]
「삼암[돌모랭이]」은 일제강점기에 마을을 '삼암'이라고 부른 유래와 그 이전에는 '돌모랭이'라고 불렀던 이름의 유래를 담은 지명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9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 삼암마을에서 길상길[남, 58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길상길은 삼암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970년대 후반에 죽은 아버지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내용]
삼암마을 오른쪽으로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이를 '바위등'이라 하였다. 바위등 뒤편에 있는 산은 매 두 마리가 나란이 앉아 있는 형국으로, 삼거리 뒤편에 작은 매가 있고 그 앞에 큰 매가 있다고 한다. 바위등은 매가 마치 방울을 달고 가는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매방울'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원래 바위등이 있는 곳은 응유마을에 속하였다. 지금의 삼암마을은 응유마을과 통합되었는데, 바위 세 개가 떨어져나왔다고 하여 한자 석 삼(三)’ 자와 바위 ‘암(岩)’ 자를 사용하여 ‘삼암(三岩)’ 이라고 했으며, 중간에서 마을이 나뉘었다고 한다.
삼암마을의 묏자리와 비석이 있는 곳이 풍수적으로 보면 매의 머리 쪽이라고 한다. 제보자 길상길의 증조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풍수가들은 그 묏자리 앞에 임씨 선산이 있는 곳이 꿩 자리이며, 꿩이 양림마을 뒤에 앉아 있어서 매가 꿩을 보고 날아가려는 형국이어서, 명당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에 ‘삼암’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는 동네를 돌아가는 모퉁이란 의미에서 '돌모랭이'라고 불렀다. 일제 강점기 전쟁 때에는 마을마다 공출량을 할당하고, 공출을 하지 않으면 다음 날 먹을 것까지 다 뒤져서 쓸어갔다고 한다. 당시 삼암마을은 형편이 넉넉한 편이었다. 그러나 응유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공출 때마다 마을이 시끄러웠다. 그런 이유로 응유마을이 분리되었고, 삼암마을만 삼암이라고 불렀다.
[모티프 분석]
「삼암[돌모랭이]」의 주요 모티프는 '지형으로 인한 지명유래'이다. 삼암마을은 예로부터 '돌모랭이', '영화촌', '매봉태' 세 마을로 이루어진 곳이다. 인근 응유마을 앞산의 모양이 매와 같아 매봉산이었고, 매봉 아래의 마을에 매가 날아들어와 한자로 '응유(鷹遊)'라고 불렀다는 명칭 유래를 보거나 이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삼암마을이 있었던 돌모랭이와 응유마을은 하나의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응유마을에서 공출 문제가 불거졌다. 일제(日帝)는 응유마을을 분리시키고, 돌모랭이 마을에는 마을 동쪽에 세 개의 바위가 있다는 의미의 '삼암(三岩)'으로 마을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