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의동 석저마을 당산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320
한자 德義洞石底-堂山祭
이칭/별칭 덕의동 석저마을 동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덕의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 덕의동 석저마을 당산제 중단
의례 장소 윗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덕의동 석저마을 입구지도보기
의례 장소 아랫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덕의동 석저마을 입구지도보기
성격 마을 공동 제사
의례 시기/일시 정월 열나흗날
신당/신체 윗당산[느티나무]|아랫당산[느티나무]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덕의동 석저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 주민들의 화합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에 모셨던 마을 공동 제사.

[개설]

덕의동 석저마을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 주민들의 화합을 기원하며 두 곳의 당산에서 마을 사람들이 지냈던 마을 공동 제의로, 정월 열나흗날 밤에 모셨다. 마을 사람들의 고령화와 젊은층의 대도시 이주로 인하여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 중단되었다.

[연원 및 변천]

무등산광주호 사이에 있는 석저마을은 마을에 돌이 많아 석제, 석보, 돌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석저마을은 대나무와 측백나무로 둘러쌓여 있고 이름처럼 돌담이 많은 마을이다. 약 300여 년 전에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고 하며, 과거에는 석저면의 중심지로 본촌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근교 충효동이나 금곡동보다 더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광주호가 만들어지면서 마을 입구가 수몰되어 현재는 작은 규모의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산지 지형의 경사와 계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다. 석저 당산제가 언제 중단되었는지 명확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신당/신체의 형태]

석저마을의 당산은 마을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를 당산으로 모시고 있다. 위쪽에 있는 나무를 윗당산, 아래쪽에 있는 나무를 아랫당산이라 부른다. 아랫당산의 제단은 높이가 낮아 축대를 쌓고 시멘트로 발라 윗당산 제단과 높이를 같게 하였다. 제단은 각각 있는데 자연석으로 되어 있으며, 당산나무 옆에 헌식터가 마련되어 있다. 이외에도 마을 입구 다리 옆에 입석이 하나 있으며, 당산제가 끝나면 당산 주변에 쳐놓았던 금줄을 입석에 감아 놓았다.

[절차]

덕의동 석저마을 당산제는 과거에는 마을 어른들이 주관하여 정갈한 사람을 제관(祭官)으로 뽑았으나, 1993년 조사 당시 여느 마을과 달리 석저마을은 마을 주민인 김복규[당시 73세]가 주관하여 따로 제관을 선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김복규 자신이 당산에 치성을 드려 태어난 내력을 가지고 있어 당산에 정성을 많이 쏟는다고 하였다. 고정적으로 제관을 맡고는 있지만 예전에 제관을 선출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월 초부터 상가 등 부정한 곳을 가지 않고 매일 목욕하는 등 깨끗한 상태를 유지한다. 당산제에 사용되는 비용은 주로 마을 자금에서 사용하지만, 부족할 경우 김복규가 모두 부담하기도 하였다. 제물(祭物)로는 비린 것을 장만하지 않고 미역, 마른 상어, 나물류 등을 간단히 준비한다. 제기(祭器)는 매년 새것을 구입하여 사용한다. 정월 12일에 대나무에 금줄을 걸어 마을 입구에 치고 금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 9시 무렵에 제를 지내는데, 아랫당산을 먼저 모시고 다음에 윗당산을 모신다. 당산 제일(祭日)이 되면 농악을 치면서 마을과 샘을 돌아 당산제가 있음을 알리고 마을 사람들의 결집을 도모하였다. 제를 알리는 신호로 징을 치는데, 과거에는 나발을 불었다고 한다. 제차(祭次)는 '진설→재배→헌작→재배→독축→재배→소지→헌식' 순으로 진행된다. 제의 절차는 두 당산이 동일하다. 소지할 때는 "모든 병은 물[광주호] 아래로 내보내고, 마을 사람들 무병장수하고 재수 좋고 올해도 풍년이 들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기원을 한다. 헌식하고 남은 음식은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면 다음날까지 마당밟이를 하였다.

[현황]

덕의동 석저마을 당산제는 마을 사람들의 고령화와 젊은 층의 대도시 이주로 인하여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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