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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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趾完 |
영어음역 | Yun Jiwan |
이칭/별칭 | 숙린(叔麟),동산(東山),충정(忠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상열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숙린(叔麟), 호는 동산(東山). 증조할아버지는 윤엄(尹儼)이고, 할아버지는 윤민헌(尹民獻)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윤강(尹絳)이다. 부인은 밀양박씨로 박천구(朴天球)의 딸이며,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형은 좌의정을 지낸 윤지선(尹趾善)이 있다.
[활동사항]
윤지완(尹趾完)[1635~1718]은 1662년(현종 3) 형과 함께 증광시 을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사간원헌납·홍문관부수찬 등을 지냈다. 1675년(숙종 1) 사헌부지평겸시독관으로 있을 때 붕당의 폐해와 송시열(宋時烈)의 신구(伸救)를 건의하였다가 남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홍문관부교리·홍문관부응교를 거쳐 경상도관찰사와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1682년(숙종 8) 부사 이언강(李彦綱) 등 475명을 거느리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어영대장·예조판서·병조판서·경상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88년 희빈장씨가 왕자 균(畇)을 낳아 숙종이 서둘러 왕세자에 책봉하려 하자 여러 대신들과 함께 시기가 빠름을 간하였으며 남인이 집권하면서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의정부좌참찬을 지내고 우의정에 올라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尙運) 등과 함께 정권을 잡았으나, 노론인 정호(鄭澔) 등의 탄핵을 받아 경기도 안성시 동산으로 내려갔다. 1703년(숙종 29)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윤지완의 졸기(卒記)가 실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중추부사 윤지완이 졸(卒)하였는데, 나이 84세였다. 자는 숙린이고, 호는 동산이다. 키가 8척(尺) 남짓하였는데, 소리는 큰 종이 울리는 듯하였다. 침착하고 굳세고 준엄하고 결백하여 지키는 지조를 빼앗기 어려웠다. 사물에 앞서는 지려(智慮)가 있어서 스스로 기관(機關)과 단절하였고, 일을 분변하는 재능이 있어서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을 망령되게 하지 않았다. 경신년에 한 번 사피(辭避)하였으나 주장하는 의논은 너그럽고 공평하였다.
임술년에 사명(使命)을 받들었는데, 오랑캐가 그의 성의와 위엄에 감복하여 이미 돌아온 후에도 언제나 그의 기거(起居)를 물었다. 갑자년 연대(筵對)에서는 앉아서 끊임없는 소란을 진정시켰는데, 이때부터 상하(上下)가 시귀(蓍龜)처럼 의지하였다. 갑술년에 맨 먼저 의정(議政)에 임명되어 왕의 돌보심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는데, 조정에 나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물러나기를 고(告)하고 종신(終身)토록 일어나지 못하였다.
원대한 사업은 강구하지 못하였지만, 만년(晩年)의 절개와 충성스런 말은 90세를 바라보는 남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30년 동안 보호한 큰 절개를 성취시켜 덕성(德性)을 온전하게 하고 명예를 완전하게 하여 남구만과 함께 천고(千古)에 함께 칭송받게 되었으니, 이른바 ‘국가의 어려운 때를 당하여’ 육척(六尺)의 어린 왕을 맡길 수 있으며 100리나 되는 지방의 행정을 위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고,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의논하는 자는 말하기를, ‘윤지완의 기량(器量)과 재능[才具]으로 대인(大人)의 학문을 길렀다면 틀림없이 갑술년 처음 경연(經筵)에서의 공봉(供奉)에 대한 의논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사림의 기대(期待)에 조금 가볍게 여기는 까닭이다.”
[묘소]
묘소는 본래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 안장바위에 있었으나 안산 어부들의 상소로 개성시로 옮겨졌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