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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을 무대로 하여 김선민이 제작한 단편 영화. ‘가리베가스’는 구로구의 ‘가리봉’과 라스베가스의 합성어이다. 「가리베가스」는 가리봉동을 떠나는 여주인공 선화의 하루를 그린 단편 영화로서, 가리봉 지역에 대한 추억을 담고 있다. 2005년에 제작된 단편 영화로 상영 시간은 19분이다. 영화 전체는 핸드헬드로 촬영되었다. 각본 및 감독은 김선민 여성 영화 감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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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시인 박노해가 가리봉시장을 소재로 하여 지은 현대시. 「가리봉 시장」은 박노해가 1970~1980년대 구로구 가리봉시장을 배경으로 부근 공장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을 노래한 자유시이다. 노동자 시인인 박노해[노동 해방을 뜻하는 필명]는 「가리봉 시장」을 통해 사회 변혁 운동의 세기이자 열정과 연대의 세기였던 1980년대를 통과하는 노동자로서의 삶의 허기와 분노, 소박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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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을 배경으로 하여 이창동이 제작한 영화. 「박하사탕」은 ‘박하사탕’이라는 추억이 담긴 소재를 통해 20여 년의 한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이다. 첫 장면은 ‘가리봉동우회’의 야유회 장소로 시작되며, 그 장소는 영화의 끝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구로구 가리봉동은 영화 속 주인공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자 젊음을 시작한 곳이다. 1999년 제4회 부산영화제 개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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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의 심야 만화방을 배경으로 하여 김홍준이 제작한 영화. 「장미빛 인생」은 당시 영화진흥공사의 만화방 세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면이 실제 구로구 가리봉동을 배경으로 하여 촬영되었다. 경제 성장에 따른 우리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가리봉동은 낙후 지역으로 남아 1994년 촬영인데도 불구하고 1987년의 분위기를 흡사하게 낼 수 있었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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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촬영한 이창동이 제작한 영화. 「초록물고기」는 이창동의 데뷔 작품으로, 영화 속 고물상은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실제 고물상을 배경으로 촬영하였다. 1997년 2월 7일 개봉한 영화로 상영 시간은 114분이다. 대본은 이창동과 오승욱이 맡았으며, 감독은 이창동이 맡았다. 영화 음악은 이동준이 작곡하였다. 출연자는 한석규, 심혜진, 문성근, 명계남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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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패션 거리. 구로구의 동명인 ‘가리봉동’과, 미국 비버리힐즈의 세계적인 패션 거리인 로데오드라이브에서 ‘로데오’를 따와 가리봉 로데오거리라고 이름 붙였다. 구로구 가리봉동 지역은 과거 구로공단의 핵심 지역으로서, 구로공단 지역 내에 위치한 의류 회사들이 이 지역에 자사 상설점을 내면서 가리봉 로데오거리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섬유 및 의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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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일대에 형성된 복합 여흥 거리. 가리봉 먹자골목은 가리봉오거리, 속칭 ‘가오리’에 형성된 일련의 음식점 골목을 말한다. 여기에 가산디지털단지가 설립되고 지하철 1호선 및 지하철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과 남구로역이 들어온 후 급속도로 유동 인구가 많아져서 자연스레 상권이 형성되었다. 가리봉 먹자골목은 가리봉오거리에 접해 있다. 가리봉오거리는 예전에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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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던 극장. 1980년대 이후 구로공단의 제조업체 대부분이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구로공단오거리에는 의류 할인 상설 매장을 중심으로 한 패션 거리인 가리봉로데오거리가 형성되었다. 가리봉극장이 위치한 가리봉로데오거리 주변은 천일극장과 함께 유흥업소가 밀집되면서 매우 번화한 곳이 되었다. 1964년부터 수출 산업의 육성과 국제 수지의 향상을 위하여 조성된 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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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속하는 법정동이자 행정동. 가리봉동은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고을[谷]과 같은 의미인 ‘갈’ 또는 ‘가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인데, 구로구의 전체 지형이 바짓가랑이처럼 갈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다고 여겨진다. 조선 말기 경기도 시흥군 동면(東面) 가리산리(加里山里)였다가 가리봉리(加里峰里)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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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5일 서울시에서는 ‘가리봉지구 재정비 촉진계획안’을 발표하면서 구로구 가리봉동 125번지 일대를 재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계획안에 따르면 가리봉동 지역에 최고 53층의 고층 빌딩과 5430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지금의 벌집과 다세대 주택으로 가득 찬 공간이 완벽하게 탈바꿈하는 것이다. 서울시와 구로구청은, 구로디지털단지와 광명시를 잇는 위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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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점이 있다. 사람이 모이면 음식을 먹고 그것이 바로 문화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를 알아보려면 음식을 먹어 봐야 한다. 음식은 사람들을 따라 이동하고 전파되며 뿌리내리고 변화한다. 가리봉동의 음식 문화 역시 살고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했다. 김밥과 분식을 파는 한국 음식점을 비롯해서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양고기꼬치를 비롯해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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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수령 약 500년의 보호수. 가리봉동 측백나무는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2.5m이다. 가리봉동 측백나무에는 나무속에 큰 뱀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과 함께 측백나무를 훼손하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다. 가리봉동 측백나무는 2004년 12월 27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가리봉동 13-175번지 주택가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지역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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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에는 중국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1990년대 후반에 벌집으로 들어오게 된 사람들이 가리봉동 중국 동포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역 사회가 이뤄졌다. 가리봉시장을 중심으로 중국 동포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중국 식당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가리봉동에서 만난 『동포타운신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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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재래시장. 가리봉시장은 1970~1980년대 구로공단 직공들이 자주 찾던 곳으로서 1976년 형성되었다. 2010년 가리봉시장 일대를 재개발하는 ‘가리봉균형발전촉진지구 개발사업’에 따라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125번지 일대의 28만여 ㎡ 땅에 서울디지털산업단지와 호텔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시장 재건축 사업이 불투명해지자 가리봉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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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에 중국 사람들이 많이 모인 이유는 저렴한 집값과 중국 음식, 중국 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 중국인들을 보살피는 교회와 지원 단체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단체 가운데 하나인 서울중국인교회에서 만난 한족 여성의 이야기는 가리봉동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중국인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가리봉동에 살고 있는 한족들과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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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의 현황을 듣기 위해 구로경찰서 가리봉지구대를 찾았다. 구로구에서만 10년째 경찰 생활을 하고 있는 파출소장 김남준[1954년생] 씨가 알려 준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가리봉동에는 2010년 현재 7543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중 조선족이 7205명, 한족이 261명, 기타 민족이 77명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합법적인 거주자만 고려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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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지역의 균형 발전을 위한 재정비 촉진 사업 지구. 재정비촉진지구란 도시의 낙후된 지역에 대한 주거 개선과 기반 시설 확충 및 도시기능 회복을 위해 광역적으로 계획하고 체계적·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지정하는 지구를 말하며 주거지형과 중심지형으로 대별된다. 이중 주거지형은 주로 노후·불량 주택 및 건축물이 밀집한 지역으로서 주로 주거 환경의 개선 및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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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던 가리봉전자에서 일어난 노동 운동. 가리봉전자는 1983년 독산공장을 설립하고, 1984년 구로공장을 설립한 발광다이오드, 저항기 등의 전자 부품 생산 업체로서 자본금 26억8천2백만 원, 노동자 수 800여 명의 규모를 가진 업체였다. 노동운동에 대해 탄압으로 일관하던 5공화국 정권은 1983년 말부터 정권이 안정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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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 취재가 한창이던 때는 2010년 5월, 마침 6·10지방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거리에는 홍보 전단이 가득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빠지지 않고 선거 이야기를 했다. 유흥열[1945년생] 씨를 만날 때도 그랬다. 유흥열 씨는 구청장 후보 명함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지금은 모 정당의 홍보를 맡아서 하고 있으며 40년 동안 가리봉동에서 살았으니 여기가 고향이나 마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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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가리봉동 지역은 논과 밭 그리고 산밖에 없었다. 지금의 언덕배기에 집들이 들어선 자리는 모두 산이었다. 산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대부분 논이고 밭이었다. 가리봉동 사람들이 말하는 ‘구종점’ 자리, 다시 말해 지금의 남구로역 4번 출구 근처는 복숭아 과수원이 있던 밭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과수원을 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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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을 지나고 있는 현재 구로구 지역은 첨단 디지털 도시로 탈바꿈했지만 1970년대 구로구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중심지였다. 굴뚝 공장은 구로구의 상징처럼 인식됐고, 수출 공업 단지의 대명사가 됐다. 일자리가 많으니 당연히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십대들이 가리봉동에 살면서 구로구의 공장으로 일하러 가는 것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가리봉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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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인터체인지. 구로인터체인지는 남부순환도로의 한 부분이다. 남부순환도로는 완전한 자동차전용도로가 아니며 중간 중간 신호등도 있으며, 큰길과 접하는 곳은 구로인터체인지와 같은 입체 교차로로 이루어져 있다. 2010년 현재 구로인터체인지는 남부순환도로와 광명대교에 연결된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입체 교차로의 특성상 높이가 있어서 경부선 철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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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중국 요리 전문점.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 가리봉동에 자리를 잡은 때는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이후부터이다. 구로공단이 번성하던 1970년대 쪽방촌이던 이곳에 저렴한 숙소를 찾는 중국 동포가 몰려들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가리봉동은 중국 동포 밀집 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공업 단지가 밀집해 있는 구로구 가리봉동의 특성상 다수의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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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가리봉동을 찾고 있다. 가리봉동이 재개발되기 전에 그 모습을 기록하려고 찾아온 대학생도 있고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가리봉동의 상징인 벌집촌을 도면으로 그려 냈고, 어느 대학원생은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주 상황을 논문으로 기록했다. 학술적인 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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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농촌 마을에서 몇 십 년 만에 도시화가 이루어진 가리봉동 여기저기에는 생채기와 같은 역사가 남아 있다. 교회에도 남아 있고, 나무에도 남아 있다. 학교 운동장에도 남아 있고 새롭게 지어진 아파트에도 역사는 남았다. “서울에서 무슨 마을 역사를 찾는가?” 하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역사는 남아 있는 법이다. 산업화를 일궈 낸 젊은 여공들의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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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 개발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2010년 현재 생존해 있는 가리봉동의 주민들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으로 한정지으면 대략 1930년대까지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팔순이 넘는 노인들이 가리봉동에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발이 계속되면서 떠나갔다. 서울의 어느 지역에서나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가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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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있던 대동전자에서 일어난 노동 쟁의. 1960년대 이후의 경제개발계획은 저임금을 기반으로한 수출주도형으로서 일정 정도 노동자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1970년 전태일열사의 분신 이후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투쟁은 민주 노조 설립 운동으로 조직화되기 시작되었다. 청계피복, 동일방직, 삼원산업 등에서 파업과 시위 농성 등을 통해 정치권력과 기업의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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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부터 불어 닥친 산업화의 바람은 구로구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농사를 짓던 가리봉동 일대에도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주로 섬유 공장과 가발 공장이 많았다. 당시의 공장들은 기계화나 산업화보다는 다수의 인력을 투입해서 제품을 만드는 제조업이었다. 따라서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가리봉동 일대에 보다 많은 주거지가 필요했다. 가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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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구로공단이 있던 곳. 대한민국 수출의 10%를 담당했던 산업 1번지. 수많은 여공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던 곳. 바로 가리봉동이다.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화목한 가정에서 평범한 유년 생활을 보내고~’로 시작하는 교과서 같은 이야기와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좁은 방에서 언니·동생과 부대끼며 살아야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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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던 자연마을. 모아래가 있던 곳은 원래 청룡(靑龍) 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던 청룡혈(靑龍穴)의 산이었으나, 갈증이 난 용이 물을 먹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던 중 자기가 잠을 자던 산 아래쪽 땅속으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고 못을 파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저수지가 생겨났고 그 아래에 40여 세대가 모여 살면서 못아래마을이라 하였다가 후에 음이 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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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흑룡강성에서 농사를 짓다가 1년 전인 2009년 한국으로 들어온 이주학[1959년생] 씨는 가리봉동 벌집에 살고 있다. 중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일하러 오려고 하지만 비자 문제가 쉽지 않다. 한국 사람의 초청을 받거나 한국 업체의 초청을 받아야 하는데 초청하는 곳은 많지 않고 오려고 하는 사람은 많다 보니 돈 벌기 위해 한국으로 오는 일이 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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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구로동과 가리봉동에 들어선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두어 평 남짓한 좁은 벌집에서 서너 명이 같이 생활했다. 어떤 이들은 ‘쪽방’이라 부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벌집'이라 부르기도 한 곳으로, 두어 평 남짓한 작은 방에 부엌이 딸린 집을 말한다. 2010년 현재도 벌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김정득[1947년생] 씨에 따르면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고치고 살기 좋아졌다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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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을 다녀보면 눈에 띄는 전단지들이 있다. ‘원룸’, ‘화장실 있음’ 같은 부동산 전단지다. 물론 다른 동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골목을 조금 더 걸어 보면 색다른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전단지가 아니라 칠판인데, 흰색 바탕에 검정 매직으로 빈 방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마치 군대 상황판처럼 출입문 좌측 담벼락에 붙어 있으니 눈에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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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의 소식을 많이 전하는 구로구의 지역 신문 『구로타임즈』 2006년 12월 5일자 기사에 가리봉1동의 옛 지명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청룡이 파서 마시던 물에서 유래」했다는 김윤영 기자의 기사에서 가리봉동은 “산업 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밤나무골, 사당골, 석바탱이, 큰논배미, 모아래 등 훈훈한 옛 지명이 말해 주듯 호박밭이 넓게 펼쳐진 몇 가구 살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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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었던 미용 전문 고등학교. 세계 속에서 미용계를 이끌어 갈 유능한 미용인 육성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다. 교훈은 ‘경천애인, 진리 탐구, 협동 정신’이다. 1969년 3월 2일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104번지에 영일재건[중]학교로 개교하였다. 1972년 2월 2일 중등부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고, 1978년 2월 28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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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1동과 구로디지털단지로 갈라지는 곳에 있던 고개. 석바탱이마을 뒤에 있는 고개였으므로 석바탱이고개라 하였다. 석바탱이마을은 매 사냥을 할 때 석 받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석바탱이마을은 대촌(大村)[일명 큰논배미]의 일부로서 대촌의 서쪽 귀퉁이에 자리하였다. 대촌은 현재 구로구 가리봉1동 13번지에 해당되는 마을로 가리봉동 중에서도 제일 크고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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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은 농촌 마을이다. 논농사를 짓고 밭을 일궈 온 것이 수백 년간 이어졌다. 그래서 물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가리봉동 농지는 말 그대로 천수답이었다. 하늘에서 비가 적당히 내리면 농사가 잘되니 먹고살기 좋았다. 하지만 가뭄이 들면 딱히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 배를 곯아야 했고, 반대로 물이 넘쳐 홍수가 나도 배를 곯아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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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정조 13)인 기유년(己酉年)에 전국적으로 일제히 실시됐던 호구 조사 결과를 기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지금의 구로구 인근 지역인 금천현은 6개 면 41개 리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동면(東面)에는 독산리·가리산리·문교리·난곡리·장내리·신림리·봉천리·상도리·성도화리·서원리가 속해 있었으며, 호수는 332호, 인구는 1268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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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무료 급식소. 우리들의 파란집의 설립자인 안재호와 최광석은 35년 전 구로동 판자촌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도시락 한 번 번듯하게 싸 가는 것이 소원이었을 정도로 가난에 이골이 났던 이들은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반드시 어려운 이웃을 돕기로 결심하였고, 현재 우리들의 파란집을 통해 그 약속을 실현하고 있다. 우리들의 파란집은 독거노인,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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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 골말경로당에서 만난 윤재병[1932년생] 씨는 평생을 가리봉동에서 살았다. 윤재병 씨에게는 위로 누이 두 분과 형님 한 분이 계셨다. 아버지는 윤재병 씨가 세살 때 돌아가셨고, 다섯 살 터울의 맏누이 윤묘병[1927년생] 씨가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을 돌봤다.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의 얘기 가운데 한결같은 것이 있었다. 모두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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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지역 사람들이 착용해 온 의복이나 이와 관련된 생활 풍속. 구로 지역의 의생활은 현재 가리봉 1동에 있는 대촌마을을 사례로 하여 살폈으며, 시기적으로는 1960년대 후반 구로공단이 들어서기 이전의 농경 생활을 하던 자연 마을일 때를 기준으로 하여 서술하였다. 정확히 말한다면 이 마을 주민인 제보자 조신일이 1940년생이므로 1950년대 전후 시기의 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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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2005년 말 가리봉동 지역 8만 4430평[27만 9107.44㎡]을 ‘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해 4단계 개발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가리봉동 지역을 구로동과 가산동 등에 세워져 있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를 지원하기 위한 호텔과 컨벤션, 창업 보육 센터를 포함해 상업·업무·주거 지역으로 구축하겠다는 목표였다. 그리고 5년이 지난 2010년 1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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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중국 동포 및 외국인 노동자 인권 및 복지 단체. 중국동포의 집은 ‘모든 사람은 인종과 언어와 국가를 초월하여 존엄성을 갖는다’는 가치를 설립 이념으로 하고 있다. 한국에 와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중국 동포를 위한 상담 및 지원을 통하여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한 새 생명 살리기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은혜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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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출신의 정치인. 허삼남(許三男)[1942~2002]은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태어났다. 1985년 구로3동사무소 동장, 1989년 가리봉1동사무소 동장, 1991년 독산1동사무소 동장, 1993년 시흥1동사무소 동장을 지냈다. 1995년 제2대 구로구 지방의회의원 선거에 가리봉1동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99년 제3대 구로구 지방의회의원 선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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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6월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효성물산에서 구로동맹파업의 일환으로 일어난 노동 운동. 노동운동에 대해 탄압으로 일관하던 5공화국 정권은 1983년 말부터 정권이 안정권에 들자 노동운동에 대해 유화책을 폈다. 이에 노조 결성이 활발해지고, 노동운동단체도 늘어났다. 그러나 한편 1984년의 경제상황은 7.8%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채이자 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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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정부가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면서 시작된 금융 위기로 대한민국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많은 사람이 원치 않는 퇴직을 했고 이어지는 기업들의 부도로 인해 거리로 몰려난 사람들도 늘어났다. ‘노숙자’, ‘명퇴자’, ‘실업자’가 시대의 아이콘처럼 등장했다. 가리봉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가리봉동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이 동네 재산가들이 1998년, 이른바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