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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동 개웅산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터. 전근대 시기 중요한 국방·통신 시설로 불이나 연기를 피워 정보를 전달하였던 봉수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국의 봉수는 국토의 남북 변경에서 시작하여 서울의 목멱산[남산]에 집결하도록 구성되었다. 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동 천신마을 뒷산인 개웅산에 있다. 봉수 제도가 사라지면서 다른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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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 지역에 있던 조선시대 봉수대. 봉수대는 전근대의 대표적인 통신 수단으로, 특히 적군의 침략 등 위급 상황 시 그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 설치되었던 구조물이다. 봉수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고려 의종 때에 전국적으로 봉수 체계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을 이용하여 소식을 알렸으며, 봉수의 운영을 위해 토지가 지급되었다. 전국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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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 지역과 관련한 조선시대 지도. 고지도는 지도가 제작된 시대의 여러 상황이 반영되며, 만든 목적에 따라 실려 있는 내용이 달라진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이전에 발간된 지도는 남아 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세계 지도이다. 현존하는 고지도의 경우 대부분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지도로서, 구로 지역과 관련한 지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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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년부터 1895년까지 구로 지역에 속해있던 조선 시대의 행정 구역.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과천현(果川縣)은 동쪽으로 광주(廣州)와 남쪽으로 수원부(水原府), 서쪽으로 금천(衿川)·안산(安山), 북쪽으로 노량(露梁)과 경계를 이루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413년(태종 13) 대대적인 지명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기존의 지관(知官)과 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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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4년 구로 지역에 설치된 조선 시대의 행정 구역.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현조에 “동쪽으로 과천현(果川縣)까지 11리(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경기도읍지(京畿道邑誌)』「시흥군읍지」에는 “과천과 동쪽으로 20리 떨어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과현(衿果縣)은 조선시대 경기도 금천현(衿川縣)과 과천현이 합하여 이루어진 지명이다. 금천현은 오늘날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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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구로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현조에 “북쪽으로 양천현(陽川縣)까지의 거리가 27리(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양천현조에는 “금천현(衿川縣)까지 동남쪽으로 20리이다”라고 실려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조와 양천현조의 기록에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 금천의 옛 지명이었던 고구려의 잉벌노현(仍伐奴縣)을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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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구로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고려를 멸망시키고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통치 조직과 지방 제도에서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조선왕조의 기틀이 어느 정도 다져지자, 태종은 1413년에 대대적인 지명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는 다분히 고려왕조의 잔재를 불식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 태종은 각 도의 부관(府官)은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감무(監務)는 현감(縣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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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에 분포하고 있는 조선시대 무덤. 고분(古墳)’이란 글자 그대로 옛 무덤을 뜻하기도 하지만 고고학에서는 개념적으로 엄격히 한정해 특정 시기의 무덤 양식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넓은 의미에서 고분이란 과거 사회에서 죽은 이를 위해 수행된 매장 의례가 물질적인 증거로 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로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은 여계 묘역(呂稽墓域), 정선옹주 묘역(貞 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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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구로구 고척동에 있던 조선시대 다리 터. 구로구 고척동은 현재의 경기도 부천시와 안양시, 강화 사람들이 안양천을 경계로 서울 지역 사람들과 생필품 및 농산물 등을 교환하거나 판매하던 곳이다. 이곳은 목동 신시가지 개발 이전에는 김포평야의 일부분이어서 방앗간이 많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상업이 번성하여 늘 방아 찧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방앗간 앞에는 안양천 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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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년부터 1895년까지 구로 지역에 설치된 조선 시대의 행정 구역. 1454년(단종 2)년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당시 부평(富平)은 “서쪽으로 대해(大海)까지가 10리, 남쪽으로 인천까지가 10리, 북쪽으로 김포까지가 10리다. (중략) 호수(戶數)가 429호, 인구가 954명,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0명, 선군(船軍)이 128명이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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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구로 지역에 설치된 행정 구역. 부평현(富平縣)은 본래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다.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 체제는 부(府), 목(牧), 군(郡), 현(縣)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에는 부,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가 있었으며, 도호부는 인구가 밀집한 거대 읍(邑)이나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되었다. 부평도호부는 서울인 한양과 가까웠고, 바다와 한강 하류 지역에 접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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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구로 지역에 있던 순흥안씨 양도공파의 묘역. 순흥안씨(順興安氏) 양도공파(良度公派)는 조선 건국에 참여한 양도공 안경공(安景恭)의 가계에서 비롯되었다. 양도공파의 주요 인물과 관련하여 가계를 살펴보면 판문하부사 안종원(安宗源)의 아들 안경공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아들이 안순(安純)이다. 그리고 안순의 아들이 넷 있는데, 그들은 안숭직, 안숭선, 안숭신, 안숭효이다. 현재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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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정조 13)인 기유년(己酉年)에 전국적으로 일제히 실시됐던 호구 조사 결과를 기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지금의 구로구 인근 지역인 금천현은 6개 면 41개 리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동면(東面)에는 독산리·가리산리·문교리·난곡리·장내리·신림리·봉천리·상도리·성도화리·서원리가 속해 있었으며, 호수는 332호, 인구는 1268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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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구로 지역에 있던 온수산의 봉수대 터. 봉수대는 전근대의 대표적인 통신 수단으로, 특히 적군의 침략 등 위급 상황 시 그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 설치되었던 구조물이다. 조선시대 국방상의 통신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봉수 제도는 전근대의 중요한 통신 수단으로 그 기원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찾을 수 있으나, 제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이다. 고려시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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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부터 1598년까지 서울특별시 구로구 지역에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조선 시대의 전쟁. 오늘날 서울특별시 구로 지역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금천현(衿川縣)과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속하였고 수도인 한양 및 바다와도 가까워 전란의 중심권에 속해 있었다. 이 지역은 의병 활동 또한 매우 활발한 지역이었으며 전란의 한 복판에서 피해 또한 막심하였다. 구로 지역은 한양과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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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 시기의 구로 지역의 역사. 1392년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지방의 통치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목·도호부·군·현을 두어 각기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때 구로 지역이 속한 부평도호부는 전국 44개 도호부 가운데 하나로 종3품인 도호부사가 파견되었다. 부평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수원진관(水原鎭管)에 소속되어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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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진주하씨의 입향조. 조선 초기 영의정을 지낸 경재(敬齎) 하연(河演)의 5세손이다. 진주하씨로는 처음으로 구로구 천왕동에 정착하였다. 하백연은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였다고 전해질 뿐 자세한 행적은 알 수가 없다. 부사과는 종6품 무관직이기는 하지만, 원래 보직이 없는 사람들로 녹봉만을 주기 위한 관직이었으므로, 특별한 벼슬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