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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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𥙿後 |
영어공식명칭 | Chae Yuhu |
이칭/별칭 | 백창(伯昌),호주(湖洲)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평강(平康)이고,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湖洲)이다. 아버지는 채충연(蔡忠衍), 할아버지는 채경선(蔡慶先), 증조할아버지는 채난종(蔡蘭宗), 외할아버지는 안사열(安士說)이다. 장인은 이서(李曙)와 윤민헌(尹民獻)이고, 작은아버지는 채충원(蔡忠元)이다.
[활동 사항]
채유후(蔡𥙿後)[1599~1660]는 17세인 1615년(광해군 7)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 개시 문과(改試文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사가 독서(賜暇讀書)[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한 뒤 1628년 정언과 수찬을 지냈고, 이조 좌랑을 거쳐 1634년 사간(司諫)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집의(執義)로서 왕을 호종하였다. 김류(金瑬) 등의 강화 천도의 주장을 반대하고 주화론(主和論)에 동조하였으며, 이성구(李聖求)의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에 가서 술에 취해 잘못한 것으로 탄핵을 받아 1637년 10월 강서(江西)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월 석방되었다. 1641년 광해군(光海君)이 제주도에서 죽자 예조 참의로서 호상을 맡았는데, 상여 운반 때 담군(擔軍)들이 모두 백건(白巾)을 사용하였다는 비난이 일자 병으로 사직하였다. 1646년 아무도 지으려 하지 않는 강빈 폐출 사사 교문(姜嬪廢黜賜死敎文)을 부득이하게 짓고는 집에 돌아간 즉시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사륙전서(四六全書)』를 불태워 버려 후회하는 뜻을 보였다. 1647년 동부승지를 거쳐 부제학·대사성·대사간을 역임하고 이조 참의가 되었다.
1653년(효종 4) 대제학(大提學)으로서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1657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9년 대사헌이었으나 술에 취해 예의를 잃은 행동을 보인다는 사헌부의 상소로 파직되었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찬집청 당상(撰集廳堂上)으로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7월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0년(현종 1) 5월 실록청(實錄廳) 지춘추(知春秋)가 되었으나 유계(兪棨)의 탄핵으로 사임하였다. 이후 공조 참판과 내국 제조(內局提調)를 거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2월 병으로 사망하였다. 채유후는 술을 좋아하여 실수가 많아 탄핵을 당하였지만 성품이 깨끗하고 까다롭지 않았으며 문재(文才)가 뛰어나 중용되었다. 죽은 뒤 실록 편찬의 공으로 숭정 대부(崇政大夫)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학문과 저술]
채유후가 지은 시조 2수가 전하며, 채유후의 간찰(簡札)이 오세창의 『근묵(槿墨)』에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호주집(湖洲集)』이 있는데, 1705년 간행되었으며 7권 3책으로 구성되었다. 현재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과 국립 중앙 도서관 및 연세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중이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채유후의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1651년 왕대비 옥책문 제술로 반숙마 1필을 하사받았으며, 1661년 숭정 대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