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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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億祺 |
영어공식명칭 | Lee Eokgi |
이칭/별칭 | 경수(景受),의민(毅愍)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무신.
[개설]
이억기(李億祺)[1561~1597]는 조선 시대 왕실의 종친(宗親)이다. 온성 부사·순천 부사·전라 우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싸우다 정유재란 칠천량 해전 때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사하였다. 구리시 아천동에 의관을 거두어 조성한 묘가 있다.
[가계]
이억기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수(景受),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아버지는 이연손(李連孫), 어머니는 박명견(朴命堅)의 딸이며, 큰형은 이억복(李億福), 둘째 형은 이억희(李億禧)이다. 할아버지는 이부정(李富丁)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이며, 고조할아버지는 정종(定宗)의 10번째 아들 이후생(李厚生)이다.
[활동 사항]
이억기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하였다. 17세에 사복시 내승(司僕寺內乘)에 천거되고 이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21세가 되던 1581년(선조 14) 육진(六鎭)의 하나이자 두만강의 요충지인 경흥 부사에 임명되었다. 1583년 여진족이 두만강을 건너와 창고와 병기를 약탈하자 기보병(騎步兵) 300명을 여진족 옷으로 변장시키고 여진족의 진에 돌입하게 하여 여진족 추장 두 명의 수급을 베어 전세를 역전시키고 잡혀간 수십 명을 구해 돌아왔다. 1586년 두만강 최북단의 거진(巨鎭)인 은성의 부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순천 부사를 거쳐 1592년 5월 전라 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593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파죽지세로 침략할 때 이억기는 전라 우수영 판옥선 23척을 이끌고 나아가 6월 1일 옥포(玉浦)에 도착하여 선봉에 서서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1593년 7월 이순신 함대와 합세하여 당포(唐浦)에서 전투를 벌여 적선 30여 척을 격침시켰다.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전투를 벌여 적선 42척을 파괴하였다. 1597년 1월 이순신이 투옥되고 원균이 그 자리를 대신하자, 이억기는 이순신의 무고함을 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파견한 어사 남이신(南以信)이 실정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이억기의 의견을 무시하였다. 이에 군관 송희립(宋希立)을 시켜 이순신에게 편지를 써서 이항복(李恒福)에게 전하게 했고, 이로 인해 이순신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1597년 7월 왜군이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 진출하자 이억기는 좌익군으로 돌격하였다. 왜군이 매우 강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억기는 충청 수사 최호(崔湖)에게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신하의 본분"이라고 하면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를 때까지 종일토록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의관(衣冠)을 거두어 조성한 묘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억기는 선무공신 2등으로 병조 판서에 추증되고 완흥군으로 추봉되었으며, 1600년에 여수 충민사에 이순신과 함께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