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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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龍雲 |
영어공식명칭 | Han Yongun |
이칭/별칭 | 만해(萬海·卍海),유천(裕天),정옥(貞玉),봉완(奉玩)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된 일제 강점기의 승려·시인·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법호는 만해(萬海·卍海), 속명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계명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龍雲)이다. 아버지는 한응준(韓應俊)이고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다.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출생이다.
[활동 사항]
한용운(韓龍雲)[1879~1944]은 여섯 살 때 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홍성에서 벌어진 동학 농민 전쟁과 의병 활동의 실패를 보았고,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가 불교의 기초 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때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광무 9) 다시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 학교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 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 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였고, 대승 불교의 반야 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통해 불교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한편,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 불교 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에 참여하였다. 선언서에서 불만스러운 점을 수정 가필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울 것을 선언한 공약 삼장(公約三章)을 첨가하였다. 그리고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더라도 변호사·사식·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투쟁 원칙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1919년 7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명쾌한 논리로 「조선 독립의 서」를 기초하여 제출하였다.
옥고를 치른 뒤 1924년 불교 청년회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조선 총독부에 사찰령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또한 중앙의 불교 행정 기관을 각성시켜 불합리한 법규를 정정하게 하고, 대중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전력을 기울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그해 백담사에서 대표 시집 『님의 침묵』을 완성하고, 1926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섰다. 수록된 시는 88편이며, 대체로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였고, 1928년 신간회 중앙 집행 위원이 되어 경성 지회장을 맡았다. 1930년 5월에는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 20여 명의 청년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민족 자주 독립을 위한 항일 운동 단체 만당(卍黨)의 당수로 취임하였다. 만당은 경상남도 사천의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국내 여러 지역과 동경에도 지부를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조선 불교 청년회를 조선 불교 청년 동맹으로 개칭하는 등 불교를 통한 청년 운동을 강화하고,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해 많은 논문을 발표하며,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 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3년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택호로 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살았다. 집을 지을 때 한용운을 돕던 인사들이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집을 지으라고 하였으나,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여 끝내 동북향으로 틀어 집을 지었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 일보』에 연재하였다. 1937년 불교 관계 항일 단체인 만당 사건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또한 1940년 일제가 실시한 창씨 개명 반대 운동을 벌였으며,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는 등 일제 말기까지 단호하게 투쟁하였다. 불교의 혁신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1944년 해방을 불과 한 해 앞두고 67세를 일기로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한용운 전집』 (6권)이 있고,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 불교 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 주해(十玄談註解)』·『불교 대전』·『불교와 고려 제왕(高麗諸王)』, 장편 소설인 『흑풍(黑風)』·『박명(薄命)』 등이 있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지에 묘가 있으며, 2012년 10월 19일 등록 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었다. 묘의 연보비에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서, 이 같은 본성은 남이 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독립에 관한 감상」중에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7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파고다 공원에 「용운당 대선사비」가 건립되었고, 1973년 『한용운 전집』 전6권이 간행되었다. 1981년 10월 21일 성북동 심우장에 만해 기념관을 열었다가 1998년 5월 20일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안에 새로 건축하여 이전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