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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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영어공식명칭 | Contemporar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기도 구리시의 역사와 문화.
[개설]
1945년 광복 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 6·25 전쟁, 남북 분단,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을 수반한 산업화, 민주화 운동 등을 경험하면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였다. 구리 지역도 1963년 서울특별시 확장 때 지역 편제를 거쳐 1973년 남양주군 구리읍이 되었고, 1986년 남양주군에서 분리되면서 구리시로 승격하였다.
[해방 정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행정과 치안에서 일시적 공백이 발생하였다. 이를 메우기 위해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구리 지역이 속했던 경기도 양주군에도 양주군 인민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49년 6월 이승만 정부는 농지 개혁법을 공포하고 1950년 3월 농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양주군 구리면도 농지 위원회가 구성되어 위원장에 정준섭(鄭俊燮), 위원에 안순봉(安順奉)·현천업(玄千業)·이명덕(李命德)·신환식(申煥湜)·김용배(金容培) 등이 선출되었다.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남한을 전면 공격하였다. 북한군은 삼 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전쟁 발발 두 달이 채 안 된 8월 중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도 지역을 제외한 전국을 장악하였다. 구리 지역은 북한의 점령 정책이 실시되어 인민 위원회가 재조직되었고, 젊은 사람들은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 한편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 미군과 국군은 9월 20일 행주산성을 장악하였고, 구리 지역 탈환을 위해 9월 26일 밤부터 27일 새벽까지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1950년 11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6·25 전쟁은 국제전 양상으로 변하였다. 1951년 전세(戰勢)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휴전 협상에 들어갔고, 1953년 7월 23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행정 구역의 개편]
1963년 1월 서울특별시 동대문 구역 확장에 따라 양주군 구리면의 묵동리·중하리·상봉리·신내리·망우리 등 다섯 개 리가 분리되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이에 양주군 구리면은 인창리·사노리·교문리·수택리·토평리·아천리·갈매리 등 7개로 편제되었다. 양주군 구리면은 1973년 7월 1일 구리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 4월 1일 양주군이 남양주군과 동두천시로 분리 개편될 때 남양주군에 속하였다. 이어 1986년 구리시(九里市)로 승격되었으며, 7개 법정동[갈매동·사노동·인창동·교문동·아천동·수택동·토평동]과 6개 행정동[갈매동·동구동·인창동·교문동·수택동·수평동]으로 편제되었다. 1995년 3월 13일 교문동이 교문 1동과 교문 2동으로 분리되어 행정동은 7개가 되었으며, 1996년 1월 8일 수택동이 수택 1동으로 개칭되고, 수평동이 수택 2동과 수택 3동으로 분동되면서 행정동이 8개가 되었다.
[1986년 시 승격 이전]
1960년대부터 남한에서는 경제 개발이 실시되어 수출 지향의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경제 개발로 공업 부문에서 고용 기회는 확대되었으나, 도시와 농촌 간 소득 격차가 심화되자 이촌 향도(離村向都) 현상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특히 6·25 전쟁 후 서울시는 수도로서 기능을 급속도로 팽창하였고, 1963년 양주군 등 7개면 54리를 편입하여 시역(市域)을 확장하였다. 1970년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화 지역을 서울 외곽까지 확산하였다. 1982년 수도권 밀집 억제와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유도하기 위한 ‘수도권 정비 계획법’이 제정되었고, 1984년 수도권 정비 기본 계획이 수립되었다. 구리 지역도 이 시기에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양주군 구리면은 1963년 인구는 10,595명으로 4.5%의 인구 증가율을 보였고, 구리읍으로 승격한 1973년에는 인구 34,983명으로 8.8%의 증가율을 보였다. 남양주군 구리읍으로 소속된 1980년에는 인구 66,541명으로 4.4%의 증가율을 보였고, 구리시로 승격한 1986년에는 총인구 92,069명으로 9.6%의 증가율을 나타냈다.
[1986년 시 승격 이후]
1986년에 시로 승격한 경기도 구리시는 전국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도시로 시역의 80%가 개발 제한 구역이었으며, 66%는 군사 시설 보호 구역이었다. 또한 13%는 상수도 보호 구역이었고, 수도권 정비법이 발효된 뒤에는 시가지 전체가 공장 신증축 억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 40% 증가한 인구는 시 승격 2년 만인 1988년에 10만 명을 넘어섰다. 2016년 2월 현재 7만 1378세대 18만 6117명이 거주하고 있다. 시 승격과 더불어 구리시 최대 역점 사업은 택지 개발 사업이었다. 1987년 교문 1지구와 1989년 교문 2지구를 시작으로, 1993년 인창 지구 및 2001년 사업이 종료된 토평 지구가 개발되면서 구리시는 서울의 위성 도시로서 자리 잡았다. 상업 시설로는 1994년 인창동에 구리 LG 백화점[현 롯데 백화점 구리점]이 개점하였고, 1997년 구리 농수산물 도매 시장이 개장하였다.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지역인 구리시는 2005년 12월 경의 중앙선 청량리~덕소 간 전철 복선화가 완공되면서 구리역이 개통되었다. 현재 수도 동북부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2017년 완공을 목표로 구리시 토평동~포천시 신북면을 연결하는 구리 포천 민자 고속 도로 사업이 추진 중이다. 2009년부터 시 서북부에 위치한 구리시 갈매동 50만 평에 보금자리 주택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수도권 주거지로서 구리시 역할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