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C01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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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집필자 | 정동락 |
[도진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
고려 후기 고령박씨가 정착한 후 도진리는 박씨들의 세거지가 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도진리에는 대가야 시대 유적들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도진리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도진리 바위구멍 유적’과 인근 사촌리에 있는 ‘사촌리 고인돌’ 등을 통해 최소한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도진리 바위구멍 유적은 도진리 마을 뒤편의 진산인 대장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우곡면사무소 앞에서 예곡리 들꽃마을 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대장산으로 약간 오른 곳에 입지해 있다.
도진리 바위구멍 유적은 길이 14m, 폭 3.8m 정도 되는 비스듬한 바위면 위에 약 300여 개의 구멍이 빽빽하게 뚫려 있다. 특히, 구멍 사이를 가늘고 얕은 홈으로 연결시켜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별자리형 바위구멍 유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바위구멍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밤하늘의 별을 바위 위에 형상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청동기 시대 도진리에 살았던 사람들은 농사의 성공을 위해 계절의 절기를 알 수 있는 별자리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고령 지역에는 바위구멍 유적이 여러 곳에 있으나, 우곡면에서는 도진리가 유일하다.
이후 삼한 시대로 넘어오면서 도진리는 고령 지역에 있었던 소국인 반로국(半路國)에 포함되었으며, 낙동강을 통해 남해안 지역과 교통하는 통로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의 중요한 세력 집단이 존재했던 곳]
삼한 시대를 거쳐 대가야 시대가 되면서 도진리의 정치 세력들은 대가야의 중요한 세력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마을 뒷산인 대장산에 ‘도진리 산성’과 ‘도진리 고분군’ 등을 축조하였다.
도진리 산성은 도진리의 북쪽에 있는 높이 302.5m의 대장산 정상부에 동서로 길게 축성되어 있다. 도진리 산성은 대장산성·의병산성 등으로 불리는데, 성벽은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그 둘레를 쌓은 퇴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800m 정도 된다. 성 내에는 성문 터와 우물터, 전망대 등이 확인되나,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성 내부에 대가야 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고, 인근에 도진리 고분군이 위치해 있어 대가야 시대에 쌓았던 산성임을 알 수 있다.
도진리 산성은 개진면 개포리 방면의 낙동강과 낙동강을 통해 대가야읍으로 들어오는 모듬내[회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지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산성은 낙동강과 회천 방면을 방어하는 대가야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진리 고분군은 도진리 산성이 위치한 대장산 정상부의 남쪽과 북쪽 능선 위에 위치해 있다. 2000년에 고분군의 일부가 발굴 조사되었는데, 조사 결과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2기가 확인되었으며, 뚜껑접시와 뚜껑, 긴목항아리 등 전형적인 대가야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로 보아 도진리 고분군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대가야 시대의 도진리에는 산성과 고분군을 만들었던 세력이 존재하였다. 고분군의 규모로 보아 이들은 대가야의 최고 지배층 아래 중·하위 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진리는 대가야가 낙동강을 이용해 외부와 통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과 군사 요충지이다. 그 때문에 도진리를 중심으로 낙동강과 회천 쪽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 여러 곳에 축조되었는데, 도진리 산성을 비롯해 우곡면 대곡리의 소학산성, 대가야읍 내곡리의 내곡리 산성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도진리 산성이 가장 중심이 되는 방어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도진리는 가시혜현의 고지(故址)였다]
대가야에서는 도성을 방어하는 낙동강 방면의 방어성으로 도진리 산성을 축조할 만큼 이 일대를 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가야 시대의 사정을 전하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는 고령군에 속한 고을로 ‘야로현(冶爐縣)과 신복현(新復縣)’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야로현은 원래 적화현(赤火縣)이었고, 신복현은 원래 가시혜현(加尸兮縣)이었다고 한다. 적화현[야로현]은 오늘날 합천의 야로면·가야면·묘산면 일대로 여겨진다. 하지만 가시혜현[신복현]에 대해서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서로 다른 의견이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신복현을 “고령현의 서쪽 10리에 있는 가서곡(加西谷)”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신복현을 현재의 쌍림면 고곡리 일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신복현을 “현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일명 가시성(加尸城)”이라고 하였다. 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 고령의 남쪽 회천 변, 오늘날 우곡면 도진리 일대로 비정해 놓았다. 즉, 김정호는 ‘신복현=우곡면 도진리 일대’로 비정하고, ‘가시혜현=가시성’이라고 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가시혜현과 관련한 지명이 대가야 시대 이후인 642년과 661년에 걸쳐 두 차례 등장한다. 642년의 기록은 김유신(金庾信)이 백제의 가혜성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그 결과 가혜진(加兮津)을 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661년의 기록은 신라가 낙동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가시혜진(加尸兮津)을 이용했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가시혜현은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있는 교통·군사 요충지로, 성과 나루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시혜현은 김정호의 견해대로 오늘날 우곡면 도진리 일대를 중심으로 한 개진면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리고 가혜성은 ‘도진리 산성’으로, 가혜진은 개진면 개포리의 ‘개포나루’로 여겨진다.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킨 후 대가야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대가야군’으로 편성하였다. 이러한 경우로 보아 도진리 일대를 지칭하는 ‘가시혜’라는 이름은 대가야 시대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대가야 시대의 도진리는 가시혜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을 통해 도진리는 대가야 시대 가시혜 지역의 중심지로, 가시혜 세력들은 낙동강과 회천 방면을 방어하는 산성과 나루터를 관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만든 산성이 도진리 산성이고, 무덤은 도진리 고분군이었던 것이다.
가시혜 지역은 562년 대가야가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의 대가야군에 속하는 가시혜성이 되었으며, 도진리에는 행정 관사가 들어서고 지방관도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신라의 삼국 통일 후인 685년에는 가시혜현으로 바뀌었고, 경덕왕 때인 757년에는 신복현으로 변한다.
이후 신복현은 고려 전기에 고을이 없어지고 고령의 직할 지역으로 편입되었으며, 도진리에 설치된 행정관서도 폐지된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별도의 고을로 편성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도진리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주변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그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우곡면의 면소재지로 자리하고 있다.